어렸을 적 아버지가 퇴근하시는 것을 나는 곧잘 알아채곤 했다. 또각또각 소리는 골목 어귀에서부터 들려왔는데, 좁은 골목의 두 벽면이 그 소리를 좀 더 선명하게 전했다. 그 구두 소리가 반가웠던 건 아버지 손에 들려 있을 무언가에 대한 기대였다. 가족들을 위해 항상 무언가를 사 들고 오셨기 때문이다. 과자부터 치킨, 또는 과일. 월급의 어느 일부와 교환된 그것들은 달고 맛있었고 상큼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 멈췄다. 그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구두는 그렇게,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어른의 이미지로도 각인되어 있다. 실제로 내가 구두를 신어야 했던 때는 일자리를 구해야 했던 때와 일치한다. 누군가에게 정중함을 보여야 하는 자리. 구두를 신고, 일자리를 얻어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나는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내 구두도 여지없이 또각또각 소리를 낸다. 손에는 내 월급의 일부와 교환된 과자나 치킨, 또는 과일이 들려 있다. 아이들은 그것을 달고 맛있게, 그리고 상큼하게 먹는다.
구두를 신고 지나온 직장 생활을 돌아보며, 어렸을 적 아버지가 짊어졌던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버지의 구두 소리를 들었을 때 손에 들려진 것에 달려가지 않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겼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사 들고 온 치킨에 신나서 좋아라 하는 아이들에게 섭섭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미리 짐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언젠가 구두를 신을 나이가 되어 지금의 나와 같이 깨닫게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요즘은 편한 신발이 워낙 많다. 구두처럼 생겼지만 발바닥과 지면을 푹신하게 감싸주는 소재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캐주얼 데이’가 확산되면서 편한 운동화를 신고 회사에 가는 날도 많아졌다. 구두 특유의 또각또각 소리를 들을 일이 적어진 것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마음의 구두를 신는다. 구두를 신는 일은 직장인의 숙명이자 스스로 어른임을 상기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성장과 성공을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직장인으로 사는 한 구두를 계속 신어야 한다는 걸 안다.
구두를 신는 데 용기가 필요하단 걸 어렸을 땐 몰랐다. 뒷굽의 또각또각 소리를 나를 위한 갈채로 여기며 용기 내어 출근하고, 용기 내어 일하며, 용기 내어 퇴근한다. 오늘도 우리는 마음의 구두, 용기의 구두를 신는다. 아무리 편한 운동화를 신어도, 내 귀에는 그 ‘또각또각’ 소리가 들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