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계속 꿈을 꿨다. ‘아마도’ 악몽을 꾸는 것 같다. 왜 ‘아마도’ 악몽인지는, 근래 꿨던 꿈 내용을 들으면 확 와 닿을 것이다.
- 자기 전에 분명히 노트북을 껐다고 생각했는데, 꿈속에서 또 작업했다.
- 학교 졸업한 지가 언젠데 전학 가는 꿈을 꿨다. 그런데 전학 서류가 꼬여서 못 갈 뻔했다. 일어나서 ‘아 맞다, 나 졸업했지’ 하고 엄청나게 안도했다.
- 꿈속에서 유니콘이 쫓아왔다. 태몽 아니냐고 가족들한테 얘기했다가 등짝 맞았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랬다. 의외로 둔한 나는 위경련이 올 때나 되어서야 ‘아, 내가 스트레스받는구나’를 깨닫곤 했다.
연달아 ‘아마도’ 악몽을 꾼 후에야, 요즘의 나를 뒤돌아보았다. 잔뜩 쌓여 있는 일들에 매일같이 ‘일복이 넘쳐 감사하다’라는 말을 하지만, 그 감사한 일복 덕에 새벽까지 잠 못 드는 날이 많다. 그러다 겨우 침대에 누우면 핸드폰으로 그다음에 받아올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다 겨우 잠이 들면, 무슨 메시지라도 전하려는 것처럼 평소에는 꾸지도 않던 꿈들을 그렇게 꾸는 것이다.
그래, 홀로서기 10주 차. 그냥 솔직하게 내 마음을 정의 내리기로 했다.
나는 불안하다.
나의 불안 보고서
이제 딱 퇴사 10주 차가 되었다. 이제껏 베푼 것도 없었는데 돌아온 과분한 인복 덕에 월급보다 아주아주 조금 더 벌며 생활한다. 게다가 퇴사 직전 한 달 가까이 되었던 휴직 기간과 부지런히 세팅해두었던 부업 덕에 꽤나 ‘준비된’ 퇴사를 했다. 다른 말로 얘기하자면, 기본적인 생계에 대한 불안은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당장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은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평소에는 잔잔한 파도처럼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대로 빠져나가지만, 가끔은 거센 폭풍이 되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게끔 만든다.
나를 가장 크게 엄습해오는 불안감은 ‘현재하는 일들이 끝나면 그다음 일이 들어올까’에 대한 것이다. 현재 진행하는 두 개의 프로젝트 다 계약 기간이 12월까지인데, 이후에 재연장을 하게 될지 다른 프로젝트가 들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음 프로젝트의 유무는 생계에 바로 직결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영향은 있다. 만약 다음 프로젝트에 수입이 하나도 없더라도 내가 당장 굶어 죽는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님 댁에 조용히 들어가는 소위 ‘연어족’이 되더라도 나를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당연히 원치 않고, 혹시나 하는 그런 상상은 바로 그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제일 핵심은, 일의 난이도·재미·보상까지 ‘적절한’ 프로젝트들이 들어올 것이냐에 대한 문제다. 난이도, 재미, 보상.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충족되지 않는 프로젝트들은 꽤나 많다. 디자이너가 나름 전문직이라는 것을 그럴 때 느낀다. 하지만 재미를 차치하고라도 나에게 적합한 규모와 난이도에, 그에 따른 보상을 주는 프로젝트가 들어오는 것 또한 꽤나 개인의 능력과 ‘운빨’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불안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 불안은 ‘현재하는 일들을 완성도 있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들은 나 개인의 역량으로 100퍼센트 받아온 일이 아니다. 어찌 됐건 ‘회사’에 소속되었을 때의 역량과 감사하게도 좋은 자리를 소개해준 주변 지인들 덕이 크다. 그래서 이렇게 사수님도 없고 코칭해줄 사람도 없이 홀로 하는 프로젝트는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때보다 완성도에 대한 부담감에 쫓긴다. 이번 일의 결과가 다음 프로젝트의 존재 여부와 직결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렇게 불안의 고리가 시작된다.
마지막 피날레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가 괜찮을까?’라는 근본적인 불안이 엄습해온다. 이 근본적인 불안은 갑자기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방향을 흔들어 버린다.
사실 퇴사 후 10주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원래 계획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퇴사 직후 내가 상상한 나의 일과 나의 생활 중 맞아떨어진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원래는 기술공을 따라다니며 일을 조금 배우고 싶었는데, 퇴사 후 단 며칠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시간이 도저히 안 나서 못 했다.
그렇다고 비생산적으로 산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재밌게 흘러갔고, 좋은 기회에도 응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흐르는 생활을 하루하루 짚어보다가 문득 이대로 괜찮나, 라는 생각이 엄습해 왔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원래 계획이 맞고, 지금의 ‘운’에 의한 긍정적인 결과들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들이 몸 안에 빠르게 번져나갔다.
불안이 이렇게까지 이어지다 보면, 문득 내 몸이 소리친다.
그만 불안해해!
그만 불안해하기, 가능할까?
몇 년 전에 본 젊은 사장님의 강연이 문득 생각난다. 잘 모르는 회사지만, 그런 자리에서 강연할 정도면 꽤 잘 나가는 회사 대표였던 것 같다. 영상 속 방청객이 대표에게 질문했다.
저는 취업 시장에서 이력서를 내는 순간에도, 회사를 다니면서 제안서를 내면서도 다가오는 결과에 불안하더군요. 그런데 대표님은 어떻게 매번 결정의 순간에 불안을 딛고 행동하셨나요?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비법이라도 가지고 계신가요?
그 대표의 이름이나 회사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표의 답변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런 걸 보면 그의 말이 퍽이나 인상 깊었나 보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저는 어제도 이 강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불안했는걸요.
뒤이어 그는 소탈하게 웃었다. 혹 주변에 ‘불안하지 않다’라고 얘기하는 사장님이 있거든 순 뻥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의 핵심은 이러했다.
불안은 극복할 수 없다. 그냥 쭉 함께 가져가는 감정이다.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몸이 외칠 정도가 되면, 나는 굳은 의지로 그렇게 해나갔다. 몸이 ‘운동 좀 해!’라고 하면 운동을 했고, ‘그만 늘어져!’라고 하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지런히 방 청소라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만 불안해하기’는 결코 실현된 적이 없다. 퇴사 이후 홀로서기를 하기 이전부터, 내 몸은 종종 ‘그만 불안해 해!’라고 소리치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 입시를 할 때도 그랬고, 대학교 4학년 때 무서운 교수님 앞에서 작업을 발표할 때도 그러했고, 심지어 회사를 다닐 때도 그러했다. 게다가 불안의 내용은 디테일에서만 살짝 차이가 있을 뿐 대개 같은 내용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대학교에 붙을 수 있을까? 안 붙으면 어쩌지’라고 고민했고, 대학교에 다닐 때는 ‘취업이 안 되면 어떡하지’라고 고민했다. 그리고 요즘은 ‘다음 일이 없으면 어떡하지’하고 고민한다.
둘째는, 상대방의 기대에 대한 불안감이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내 작업물이 사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한참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 나의 일의 완성도와 부담감도 결국은 결과물을 받는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의 고민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회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작한 요즘의 나에게, ‘이대로 괜찮을까’는 꽤나 자연스러운 질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 학교처럼 안정적인 프레임 안에 있을 때도 나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계속되곤 했다.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이대로 나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스튜디오로 돌아와서도 낮은 급여와 자가 복제되는 작업물을 보며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나는 세 가지 종류의 불안을 번갈아 가면서, 또는 여러 개를 동시에 겪으며 살았다. 불안과 항상 붙어 있는 삶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다. 영상 속의 잘 나가는 대표도 그랬고, 내 친구도 가족도 그리고 나에게 일을 주는 업체 대표님도 다 구체적인 내용과 정도만 다를 뿐 ‘불안과 붙어 있는 삶’을 산다.
그러니까 ‘그만 불안해하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그 젊은 사장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정의 내리고 싶다.
어느 누구도, 불안하지 않다면 다 순 뻥이다.
불안, 없앨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다면
그래, 모두가 불안하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누군가는 매일같이 폭풍 속에서 흔들린다면, 누군가는 먼 곳에서 잔잔한 파도를 바라볼 것이다. 나는 대체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잊고 살려고 한다. 하지만 갑작스레 작은 폭풍이 찾아온다면, “그래 나 불안하다”라고 잽싸게 인정해 버린다. 불안을 없앨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아니까.
그렇다면 불안과 나는 어떻게 같이 동행할 수 있을까?
불안은 나를 성장하게 해.
인정하고 나면, 생각보다 빠르게 마음의 파도가 진정된다. 불안이 막연히 감정으로 남아있을 때는 형체도 알 수 없는 부정적인 소용돌이일 뿐이지만, 인정하고 나서는 나에게 보내는 작은 자극제가 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난 사실 꼼꼼한 스타일은 아니다. 회사에 있을 때도 오타나 사소한 실수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완전히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롯이 나 혼자 작업 관리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은 나로 하여금 작업물을 한 번 더, 또 한 번 보게 만든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이것도 나름의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아주 조금씩 더 성장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 중 전시 디자인이 있다. 이 프로젝트가 너무 재미있으면서도, 나에게 이런 기회가 또 울까 불안해했다. 다른 전시 디자이너의 작업을 보면 뛰어난 게 너무나 많다. 세상에 이렇게 뛰어난 디자이너가 많은데 또 이런 기회가 올까 하는 불안 속에서 지원할 만한 다른 전시관을 쫙 찾아놔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틀에 걸쳐 대한민국의 지원할 만한 전시관 리스트를 다 찾아놓았다. 그런데 세상에, 이 좁은 땅에 전시관이 그렇게도 많더라. 불안이 알려준 세계는 너무나 크고, 잘하는 사람들 투성이지만 동시에 기회로 넘쳐나는 것이다.
불안은 나를 성장하게 하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불안에 적응하는 나의 템포 찾기
이렇게 불안이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요동칠 때 오는 그 부정적인 감정은 정말 별로다. 그렇게 감정이 요동치지 않도록, 내 나름의 기준을 통해 불안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대부분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발생한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만들어낸 갖은 상상들이 불안을 낳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역으로 “괜찮다”라고 미래를 예상해버리면 불안은 사그라든다. 그래서 불안에 적응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원래 이런 거야”라고 담담히 넘겨버리는 것이다.
물론 사람 마음이 바로 잠재워진다면 이 세상 누구도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딱 한 번이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을 토대로 쉽게 미래를 예상하고 불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경험을 통해 불안에서 벗어나는 자신만의 패턴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만의 패턴이 생기면 유사한 상황에서 크게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파리에 있을 때는 이력서를 100장쯤 써서 한 군데 붙었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 이력서 10장 쓰는 것은 불안의 ㅂ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원래 한 100장쯤은 써야 붙는 거야’라는 마음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단순한 예시를 들자면,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때 일주일 전까지 예약이 차지 않아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막 오픈했을 때는 예약이 생각만큼 빨리 차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다. 적자가 나는 것은 아닌가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운영하다 보니, 다른 숙소들이 이미 다 차서 결국 여기까지 게스트가 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전까지 예약이 차지 않아도 ‘곧 찰 것이다’라는 나만의 불안 적응 리듬을 만들 수 있었다.
작업도 그러하다. 내 작업을 처음 받는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은 상당히 걱정된다. 하지만 딱 한 번이라도 클라이언트가 만족하는 완성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진다. 그러니까 나도, 지금은 홀로서기가 완전히 처음이라 불안하지만, 이번 하반기만 딱 보내고 나면 나만의 템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 작업은 원래 이 정도 들어오는 거야.
아, 일은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그냥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기
마지막으로, 내가 너무나 서툰 것이지만, 때로는 그냥 멈출 필요도 있다.
물에 빠졌을 때 허우적거리면 되레 깊이 빠지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몸이 자연스레 두둥실 떠오르게 된다. 불안도 그렇다. 불안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나만의 템포를 찾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일정량 해소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불안이 너무 거세거나, 한꺼번에 많은 것이 몰아칠 때는 억지로 감정을 없애기 위해 이 행동, 저 행동 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러한 경험이 없지 않다. 한때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이것저것 일을 벌여놓곤 했다. 이 일에도 확신이 없고, 저 일에도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뛰어도 나의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되레 그 불안감이 해소된 순간은, 내가 모든 걸 멈추고 차분하게 나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허우적거림을 멈추고 나를 들여다보면, 곧이어 정리된 생각이 두둥실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그 떠오른 생각을 행할 때 나의 불안은 고요히 잠재워졌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고 얘기하는 친구들에게, 역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불안에 잠겼을 때, 가만히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의 정리된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오늘도 불안하다
지난주에는 꿈을 많이 꿨는데, 불안하다고 인정을 해버려서인지 이번 주는 평온하게 잤다. 어느 정도 불안의 파도는 잠잠해진 것 같지만, 아예 잦아든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도 불안할 것이고, 내일도 불안할 것이고, 먼 훗날 내가 원하던 많은 것을 이룬 날에도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내게 불안은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만은 아니다. 이건 애초에 나의 발전을 꿈꾸는 무의식의 신호이고 자극제이다. 시간과 경험이 쌓여 나만의 불안 적응 패턴이 다양하게 생기면 나는 더 많은 일을 용기 내어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불안 속의 누군가는 너무 큰 걱정 하지 말고, 불안과 함께 걸어가길 바란다. 이 글을 읽고 갑자기 나에 대해 걱정이 생긴 분들도, 내 나름의 방식대로 불안과 함께 성장하니 지켜봐 주길 바란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