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자원봉사 후기: 1. 체육관의 처절한 기다림에서 이어집니다. (단비뉴스 박세라, 김선기, 조창훈 기자)
지난 23일 새벽 3시 무렵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팽목항. 세월호 사고현장인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25킬로미터(km)쯤 떨어진 이곳은 인양된 시신이 해양경찰의 경비정에 실려 맨 처음 도착하는 곳이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섬들에 가려 육안으로 사고현장을 볼 순 없지만 수색작업을 위해 조명탄을 터뜨리는 장면 등을 멀리서 관찰할 수 있다.
실종자가족을 무료로 실어 나르는 개인택시 10여대와 구조대, 언론사 차를 빼고 모든 차량이 항구 500미터(m)밖에서 통제됐기 때문에, 자원봉사를 나온 <단비뉴스>팀은 주차장에서 팽목항까지 걸어 들어갔다. 해안을 따라 약 1km 정도 길게 이어진 팽목항 거리는 춥고 어두웠다.
해경 경비정이 드나드는 선착장 근처에는 천막으로 가설된 신원확인실이 있고 119구조·구급대가 대기 중이었다. 팽목터미널 근처에는 상황실과 자원봉사단체들의 부스, 가족대기소, 언론사 텐트 등이 설치돼 있었다. 몇몇 실종자 가족들은 선착장 부근에서 24시간 뉴스를 방송 중인 대형차량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벽 시간인데도 신원확인실 주변에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단비뉴스>팀은 잠시 열린 신원확인실 문틈으로 맨발에 검은색 체육복 바지를 입은 남학생의 주검을 우연히 보게 됐다. 옷은 모두 젖어있었고 가지런히 모인 발은 유난히 희게 보였다. 아들을 확인한 어머니는 구급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천막을 나오다 다시 오열하며 주저앉았다. 멀리 바다에서는 주황빛의 조명탄이 한 번에 2~3발씩 쉼 없이 터지고 있었다. 조명탄을 중심으로 수색현장을 밝히는 어선의 하얀 불빛들이 처연했다.
상황실 천막 부근에는 여고생으로 보이는 세 명이 실종자 가족들에게 지급된 회색 운동복차림으로 어깨에 담요를 걸친 채 사망자 현황이 정리된 대형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을 그 이름들을 보고 또 본 뒤 가족대기실 천막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돌렸다.
상황실 옆 방파제에는 네 명의 중년 여성이 콘크리트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 연신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절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를 하는 것 같기도 한 동작에 표현하기 어려운 아픔과 간절함이 묻어났다.
사망자 수습 119대원들 “밥 안 넘어가”
오전 8시30분. 팽목항을 오가는 사람들은 함구령이라도 받은 듯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과 수십명의 취재진, 경찰, 실종자 가족들이 오갔지만 표정은 무거웠고 말이 없었다. 새누리당 남경필, 새정치민주연합 김상곤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등 정치인들도 실종자 가족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등 티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분위기였다. 팽목항 2차선 도로를 따라 설치된 30여개의 자원봉사 천막들만 아침식사 준비 등으로 조용한 활기를 보이고 있었다.
아침 10시 무렵 <단비뉴스>팀은 전라남도 자원봉사센터가 배정해 준 씨제이(CJ)도너스캠프 천막에서 배식봉사를 시작했다. CJ의 사회공헌사업인 CJ도너스캠프는 선착장 근처에서 119대원들의 아침, 점심, 저녁을 책임지고 있었다. 한 자원봉사자는 “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119대원들에게 밥을 줘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날 점심 메뉴는 코다리찜과 부대찌개였다. 음식은 전남 광주에서 실어왔고, <단비뉴스>팀을 포함한 6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천막설치와 배식 등을 분담했다. CJ도너스캠프 곽대석 사무국장은 “식사하는 119대원은 250여명이고 한 끼에 약 300인분을 준비한다”고 설명했다. 점심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119대원들의 유동적인 활동시간에 맞춰 넉넉하게 잡은 듯했다.
낮 12시가 지나자 대원들이 본격적으로 급식소를 찾기 시작했다. 경기ㆍ전남ㆍ인천ㆍ서울 등 전국에서 파견된 대원들이라고 했다. 6인용 테이블이 대여섯 개밖에 없어서 대원들은 빨리 식사를 하고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음식을 받아가던 한 119대원은 “일주일 동안 이곳에 있다 보니 밥이 안 넘어간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엔 희생자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도 급식소를 찾았다.
배식을 준비하던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 경비정들이 잇달아 선착장에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얀 천을 덮은 시신이 연이어 배에서 육지로 옮겨졌다. 점심시간 이후 상황게시판에는 오전에 비해 사망자 명단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물살이 약해지는 소조기였던 이날 하루 동안 인양된 시신은 총 36구였다.
119구급대원들은 인양된 시신을 신원확인실로 옮긴 뒤 유전자(DNA)와 지문 검사 등이 이뤄지도록 돕는다. 이후 진도실내체육관과 팽목항에 대기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해 신원을 확인하도록 하고, 모든 절차를 마친 시신은 목포나 안산 등에 위치한 병원에 옮겨 장례절차를 진행한다. 대략의 인상착의 정보만 보고 달려왔다가 가족이 아닌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 부축하며 가족대기실로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전국에서 달려온 봉사자들
<단비뉴스>팀과 배식봉사를 함께 했던 신재찬(40) 씨는 대구의 한 자동차부품업체에 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듣고 일주일 간 연차를 냈다고 한다.
“도저히 텔레비전을 못 보겠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진도로 나섰죠. 일단 뭐라도 돕고 싶었어요.”
신씨는 대구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목포로, 목포에서 진도읍내, 그리고 팽목항까지 여러번 버스를 갈아타고 7시간이나 걸려 지난 22일 저녁에 도착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진도실내체육관 2층에서 잠을 잘 수 있지만 그는 첫날밤 체육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잠을 잘 수 없더라고 했다.
팽목항에서 30분 거리인 진도읍의 한 여인숙에서 1만5000원을 주고 하룻밤을 묵은 뒤 아침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진도읍의 숙박업소들은 한꺼번에 몰려 온 취재진과 공무원, 봉사자 등으로 만원이라고 한다. 전북 군산에 사는 한철희(23)씨는 지난해 군대를 제대한 후 휴학 중인데 언론보도를 보고 답답해서 지난 21일 달려왔다고 말했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찾아온 사람, 민간 봉사단체 등 자원봉사 인력이 많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이는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부정확하고 자극적인 보도에 수색요원도 상처
이날 배식봉사는 저녁 8시 무렵 끝났다. 자원봉사자들끼리 저녁을 먹으려다 한국해양구조협회 관계자와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연구원, 해군 특수전전단(UDT) 출신 구조협회원등과 합석하게 됐다. 이들은 언론보도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언론들은 ‘어’를 ‘아’라고 써요. 그런데 이게 자극적이지 않으면 ‘아’를 ‘가’로 쓰더라고요. 과학전문기자라면 로봇ㆍ잠수장비 등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텐데, 모든 기자를 투입하니 정치부 기자가 와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보를 내보내죠. 특종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더 주목받을 기사를 원해요. 그러다보면 필요 이상의 국민적 기대를 낳고, 결과적으로 희생자 가족은 실망을 반복하는 거죠.”
한국해양구조협회 관계자는 “구조 작업이 계속되는데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구조대원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또 언론이 수색작업에 대해 앞뒤를 생략하고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 등으로 자극적인 보도를 하다 보니 실종자 가족들이 상처를 받는다고 걱정했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의 연구원은 해저탐사용 다관절 로봇인 ‘크랩스터’ 얘기로 언론의 부정확한 보도를 비판했다. 크랩스터는 이 연구소에서 4년 전부터 개발 중인 수중촬영로봇인데, 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현장을 촬영한다. 바닷물이 혼탁해 눈앞이 보이지 않을 경우 크랩스터를 통해 얻는 정보가 구조와 인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원래 이 장비의 1차 개발 완료시기는 5월 12일이었지만 세월호 사고로 앞당겨 긴급 투입하게 됐다고 한다.
“크랩스터는 지금 실전 투입을 준비 중이에요. 그런데 벌써 언론에는 크랩스터가 작전에 2번 실패했다고 보도됐어요. 실은 미국산 무인잠수정(ROV)이 2번 실패했죠. 미국산 ROV는 그 물살에 견디지 못할 장비였어요. 그런데 언론은 벌써 ‘크랩스터 선체 진입 실패’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러니 섣불리 언론에 정보를 줄 수 있겠어요?”
저녁 8시 30분, 대기 중이던 크랩스터가 처음으로 세월호 좌초 현장에 투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용돌이 등이 생기면 작업에 혼선이 발생하기 때문에 잠수사를 철수시킨 뒤였다. 언론에는 크랩스터가 당일 투입됐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연구원은 <단비뉴스>팀에게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크랩스터 진행 상황 문자를 보여줬다. ‘현장 500m 밖에서 대기’, ‘20시 30분 크랩스터 입수’라고 적힌 문자가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중계하고 있었다.
UDT출신의 구조협회원은 동료들이 경험한 시신 수색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세월호 선내에서 발견된 사망자들은 숨지기 전 체온을 유지하려한 듯 서로 팔짱을 낀 상태로 발견된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
“집단적으로 사고를 당할 경우 서로 강하게 붙잡아서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구조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이럴 때 구조대원은 ‘추운 데서 뭐하십니까, 빨리 가입시다, 어서 가입시다’라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듯 대하며 수습하는데, 이번에 동료들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검은 바다 향해 나부끼는 노란 리본의 염원
2시간 정도 이어진 대화를 마무리하고 진도체육관으로 향하는 마지막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팽목항 상황실 앞 게시판에 붙어있는 색색의 종이들이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왔다. 전국 각지에서 구호품과 함께 보내온 편지였다. 희생자들과 비슷한 또래인 중고등학생들이 보낸 손편지가 많았고 외국에서 온 롤링페이퍼(여러 사람이 함께 쓴 편지)도 있었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기적처럼 태어났으니 기적처럼 돌아오세요.”
“하늘고등학교 학생들입니다. 저희가 비록 그 친구들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지금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그 학생들이 저희의 후배, 선배, 친구들이기에 조금이나마 힘이되고자 너무 부족하지만 전교생 600명의 손길을 모아 보냅니다…”
선착장 다리 난간에는 노란 리본 세 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낮에 실종자 가족인 듯한 중년 여성 한 명과 여학생 두 명이 매달고 간 리본이었다. 신원확인실 옆에 있는 선착장 다리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만 그들은 답답한 마음에 바다가 가장 가까운 그곳에 오른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염원을 담은 노란 리본은 검은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하염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원문: 단비뉴스 박세라, 김선기, 조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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