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후반 동문 선배가 이 직장에서 그간 정말 존경할 만큼 특출나게 똑똑한 사람을 딱 두 명 만나 보았다는 얘기를 했다. 한 명은 잘 나가는 전무였는데, 새로 온 CEO가 데려온 다른 전무에게 파워 게임에서 밀려 아예 나가게 된 경우였고, 또 다른 한 분은 오래전부터 사내의 주요 핵심부서 팀장으로 돌면서 전사적으로 촉망받는 임원 0순위 부장님이었던 분이라고 한다.
이 부장님의 스토리는 좀 슬픈데, 본인의 직속 라인이었던 임원이 일찌감치 밀려 나가게 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심지어 아래 직원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면팀장이 된 채로 어리고 훨씬 덜 똑똑한 팀장들 밑에서 팀원인 채 여기저기 도는 경우였다. 결론은 어느 정도 올라가는 데까지는 개인의 실력이 분명 도움이 되지만, 어느 단계 이상이 되면 정치력, 라인의 운명 등 그 외의 요소가 몹시 큰 변수가 되어버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뒷방 늙은이들의 선택
팀장급의 풀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판명된 경우, 혹은 아무리 잘 나가던 팀장이었어도 그 이상 올라가는 데 실패해 면팀장이 되고 일반 팀원으로 강등된 경우 대부분 업무 의욕을 급속도로 잃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으면서 월급 플러스 자녀 학비까지 따박따박 제일 많이 받아 가며 일 안 하고 TO만 축내는 민폐 팀원으로 전락한다.
그래도 본인의 후배 격인 팀장도, 인사팀장도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하기에 그들은 뻔뻔하게 어린 후배 팀원들에게 일을 다 미루고 출근해서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죽이다 퇴근하는 것을 반복한다. 공식적으로 명문화된 퇴직 연한까지 주어진 인생의 특권적인 방학처럼 놀며 월급 받으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이 부분이 사실 오늘날 대기업의 가장 큰 병폐인데, 우리나라 정서상 지금 이 영역은 쉽게 건들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어제 들은 이야기가 충격적이면서 또 많은 깨달음을 준 이유는 내가 봐왔던 그 무수한 뒷방 늙은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멋진 어른의 모습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전략기획부터 상품팀까지 두루 다양한 분야의 핵심 팀장을 일찌기부터 맡을 정도로 실력이 있고 인정을 받으며 회사를 위해 상당한 세월 고생을 많이 해온 사람이라면 그 어떤 부장들보다 그 좌절감과 배신감이 훨씬 더 크고 비뚤어질(?) 이유도 충분할 텐데, 그분은 지금도 본인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그 어떤 팀원보다 기여하시고 어린 후배 팀장 및 다른 후배 팀원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두루 존경받으면서 회사를 보람 있게 다니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팀장, 임원이 되었어도 월급은 더 많이 받을지 모르나 존경은커녕 원성만 듣는 리더가 대부분인데, 실제로는 누가 더 진정한 리더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플랜 A, 그 외의 삶
동시에, 대부분 성취 지향적인 한국인들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만 그 목표 외의 것은 잘 생각해보지 않아서 많은 부작용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당연히 언젠가는 팀장은 하겠지, 열심히 해서 언젠가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도 해야지” 그렇게 달려오다 그것이 좌절될 경우를 딱히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목표가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는 경우 뒷방 늙은이를 자처하는 것 같다.
그 순간부터 그간 고생한 나를 위한 여유로운 가성비 높은(최소한의 에너지를 투여해 최대한의 소득을 창출하는) 삶을 잘 때우다 회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큰 준비 없이 막연하게 “더욱 여유로운 은퇴 이후의 삶”을 누리려다, 기존의 든든한 ‘사회적 타이틀’과 ‘주어진 주요 업무’라는 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신에게 더 이상 같은 급의 마음의 여유라는 것을 누리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급속히 늙는 것을 많이 본다.
나도 언젠가는 회사에서 성공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 이후 은퇴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을 시작할 것인지 플랜 A에 대한 계획은 줄줄이 세워 놓았다. 하지만 그 베스트 시나리오가 생각보다 일찍 실패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거나, 그에 대비한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다. 전사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손꼽히게 인정받던 분도 저렇게 안 풀리기도 하는데, 내가 플랜 A라고 짜 놓은 탄탄대로를 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인가?
운칠기삼이라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최선을 다한들 70%는 결국 운이 좌우한다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확률이 더 높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의 플랜 B는 현재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 외에,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스킬과 평판을 별도로 구축해서, 한 조직에서 운이 없다고 판명되면 바로 다른 조직으로 갈아탈 수 있는 민첩함을 키우는 것이다. 또 나의 가치를 제대로 쳐주는 조직의 피고용인이 될 수 없다면, 스스로 그 가치를 입증하는 방법도 끝없이 고민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식의 삶이 어느 시기 응당 쉬이 누릴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삶 대비 훨씬 고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너무도 길지 않은가. 젊은 날 수년이 편하면 남은 수십 년이 괴롭고, 수년만 좀 더 고생하면 수십 년이 더 의미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하기에 늙은 때란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나이에 대한 강박이 심해, 언제까지는 뭘 해야 하고, 무얼 하려면 언제까지는 해야 했고 이런 것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크다. 우리가 친근한 할아버지로 잘 아는, KFC의 실제 모델이자 창업주인 커넬 샌더스는 매우 가난한 집에 태어나 평생 손대는 사업, 장사마다 망해왔으며, 60대에는 발명한 닭 조리법을 판매하기 위해 영업을 뛰고 1008번이나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62세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KFC를 세우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이후에도 직접 발로 뛰며 미국 전역 세일즈를 다니면서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의 기반을 다져 현재 50년 넘도록 존속하는 기업이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오래도록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이는 돈만 있으면 일찌감치 은퇴해 여행이나 다니면서 남은 평생을 놀고먹는 게 꿈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남은’ 인생을 언제부터로 볼 것인가? 60세에 은퇴한다고 한다면 평생 일을 한 것보다 어쩌면 더 많은 삶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갈고닦은 노하우와 스킬을 은퇴했다고 그 순간부터 없었던 양 썩히긴 허무하지 않은가?
어떤 80대 노인이 현재 여러 개의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본인이 60대에 은퇴하던 당시에는 이제 앞으로 뭘 배우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한동안 허비했다. 본인이 만약 그때부터 외국어를 했더라면 지금 수십 개는 더 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70대에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 여러 개의 외국어를 하는 기쁨이 매우 쏠쏠하다는 인터뷰를 보면서 훈훈했다.
사람마다 본인을 기쁘게 하는 게 무엇인지는 매우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배움의 기쁨이 있다면, 어떤 이는 본인이 가진 것을 나누는 기쁨, 또 다른 이는 종일 딱히 하는 것 없이 여유 부리는 삶을 기쁨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주어진 주요 업무(직업뿐 아니라 자녀 양육 등 어떤 것도 될 수 있다)에서 본격 은퇴를 하기 전에 남은 인생의 먹고사니즘뿐 아니라, 본인을 기쁘게 하는 게 무엇인지, 보람 느낄 일이 어떤 것일지 미리미리 고민해둘 필요는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은퇴 직후 갑자기 시간이 많다고 일순간 깨달아지기보다는 오랜 세월과 다양한 환경에서의 본인에 대한 성찰에서 조금씩 쌓이는 정보가 더 정확할 확률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투명물고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