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생기기 전에 많이 놀아.
신혼 때 참으로 자주 듣는 말이다.
애 나오기 전에 놀아야지.
임신한 여자들이 흔히 하고 듣는 말이다.
그러고 마치 인생의 황금 여행 기회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비장함까지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만삭의 배를 부여잡고 태교 여행을 떠나는 모습도 종종 본다. 나 역시 무자식과 유자식의 옵션 사이에서 그간 심적으로 수백만 번쯤 와따리 가따리 하는 동안 제일 큰 마음의 허들은 역시, “아 난 아직도 인생에서 재미있는 게 이리 많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어쩌지?”였다.
물론 육아는 나의 그 ‘재미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을’ 것 같은 리스트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에 따옴표 속 발화의 공통점은 ‘육아=내 인생 즐기기의 무덤’이라는 기본적인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불확실한 보람과 확실한 행복 사이
마치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교 가고 고등학교 가는 것처럼, 어른 되면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시대는 이제 더 이상 아니지 않은가. 이젠 결혼부터가 옵션인데 하물며 그 이후에 자식 여부는 말할 것도 없다. 선택지가 있다면 당연히 옵션별 비교를 하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에게 육아란, 각종 직간접 경험담을 참고해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을 신중히 비교해본 결과 아이가 주는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아 나는 잘 모르겠는 ‘불확실’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상대적으로 너무도 ‘확실’하게도,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한정 자원인 물리적 시간과 육체/정신적 에너지의 희생이다.
지금의 삶이 딱히 불행해서 ‘혹시 모르는 행복’이라는 복권이라도 응모하는 기분으로 불확실성에 베팅할 필요가 없이, 확실하고 통제 가능한 짧은 내 인생 안에서의 행복을 찾겠다는 사람들을 누구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주변에 자발적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족이 상당히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부족함이 없는 커플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어릴 때 부모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와 괜찮은 대학 나와서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당당하게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종종 자기 계발과 취미활동도 잊지 않고 스스로 라이프 밸런스를 잘 맞춰나가며, 함께 여행도 자주 다니고 인생을 즐기는 “금슬이 좋은” 부부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둘 사이가 평등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에다 불평등하고 집중적인 육아로 인한 불합리함, 가내에서 폭발적으로 집적된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이 많았다.
어쩌다 육아가 인생의 선물보다 짐처럼 되었을까
육아라는 단어의 제1 연관 검색어가 스트레스일 정도로(실제로 구글에서 ‘육아’까지만 쳐 보면 제일 먼저 뜨는 단어가 ‘육아 스트레스’이다)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극심한 과업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에만 집중되는 쏠림의 정도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에도 20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 흠칫 놀라는 일이 종종 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초등학교 공개 수업 행사에서 휴가를 내고 참여한 지인이, 참가한 부모 중 남자는 본인뿐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중계를 해주었다. 이것이 육아를 요즘은 남자’도’ 상당히 많이 ‘도와주는’ 트렌드라는 현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같은 직장에서 여자는 애 핑계 대고 뻔뻔히 휴가 낼 수 있고 남자는 눈치 보여 휴가 못 낸다는 것인가?
결국은 그 뻔뻔해 보이는 속사정 뒤의 수군거림과, 버거운 2인분을 하면서도 결국 지속적으로 양쪽에서 욕만 먹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 여자들이 비자발적으로 퇴사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경단녀라는 생소한 단어 앞에서, 그 이전 그때 본인의 덜 뻔뻔한 선택을 몹시 후회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아이는 정말 이쁘고 사랑스럽지만, 지금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사실 그런 거 평생 모르고 살아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
솔직한 얘기를 해준 친구들이 몇 있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 삶의 일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말을 진솔하게 얘기해주는 것이 참 고마웠다. 얻게 되는 기쁨과 그를 위한 희생 사이에서 우리는 결코 겪어보기 전에는 그 둘의 무게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보다는 훨씬 더한 느낌일 것이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할 뿐이다. 상상력이나 마음의 준비가 덜했다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더 세게 다가올 확률도 높다.
집중적인 육아를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수월해 보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분석해보니, 그들은 기본적으로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에 문제의식을 가지기보다 애초부터 ‘원래 그냥 다 내 일이려니’ 처음부터 받아들이고 시작한 사회 순응적인 성향이었다. 타고난 기본 성격이 그다지 센서티브하지 않고 둥글둥글 적당히 둔한 면도 있는, 낙천적인 성격의 사람이 뭘 하든 상대적으로 더 수월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 않을까.
하지만! 모두가 그런 성격일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그렇게 성격 좋은 사람은 학창 시절 한 반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안 되지 않았던가. 즉,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전에 자식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느냐 여부와 무관히, 육아의 시작과 동시에 상당히 힘듦을 토로하게 되더라.
육아는 꼭 그리 힘들어야만 하는 걸까?
옆에서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한국 육아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아이 중심이 되고, 그때부터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 부모의 크고 작은 희생은 너무도 당연한 공식 같다. 반면 서양의 육아는 계속 이어지는 내 중심의 인생에서 아이라는 하나의 추가 변수를 양립해나가는 과정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는 거의 100일이 될 때까지 신생아에게 직사광선도 안 좋다며 외출도 못 하고 집에 갇혀서도 심지어 블라인드를 치고 사는 경우도 보았는데, 비슷한 시기 출산을 한 프랑스 친구는 세 달도 안 된 핏덩이를 남미까지 데리고 가 알지도 못하는 현지 내니에게 잠시 맡겨두고 거나한 결혼식에서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밤새 춤을 추기도 했다. 물론 거기까지 간 김에 당연히 결혼식 이후에는 유모차를 끌고 여유롭게 남미 여행을 즐기다 돌아왔다. 또 다른 프랑스 친구 역시 50일이나 됐을까 싶은 둘째를 둘러매고, 본인의 신념을 지키러 파리의 기후 대책 촉구 가두 행진을 나서기도 했다.
뉴욕에서 MBA를 하는 동안 갓난아기를 둔 러시아 여자애는 몇 달 되지 않은 애를 센트럴파크의 피크닉에 데려와서도 마구 풀어놓는 것이었다. 그녀가 각종 상황에서 유모차를 대동하고 등장한 일이 종종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아이에게 압도당하거나 애 때문에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초짜 아기 엄마의 짠 한 모습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들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여유가 있었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비롯된 것일까 꽤 오래 고민해보았다. 내가 본 바로는 우리 사회에는 딱히 도움도 안 되고 정작 상관도 없으면서 훈수 두는 사람도 너무 많은데, 그조차도 잘 생각해보면 육아에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는 강박적인 원칙’이 너무도 많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개념조차 없는 그러한 원칙들은 대부분 주 양육자의 희생적인 노고를 전제로 하는 것들이고, 게다가 주 양육자의 업무분담 쏠림 현상이 서양에 비해 훨씬 크다는 데서 이 문제는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미국에서 애를 키우던 맘이 한국 들어와 생수에 흔들어 분유를 타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경악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국에서 분유란 팔팔 끓인 물에 타서 다시 한번 특정 온도로 딱 맞게 식혀야만 먹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갓난쟁이 직사광선을 쐬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덩달아 햇빛도 못 보는 우울함에 빠지기 일쑤다. 그런데 똑같은 월령의 아기를 핀란드에서는 일부러 추위에 강해지라고 벗겨서 일정 시간 동안 밖에 내놓는다고 들었고, 미국령에서 애를 낳은 언니의 엄마는 출산한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갓난아기들을 단체로 매일 일정 시간 바깥에 내놓고 햇빛과 바람을 쐬게 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옛 속담처럼 애를 키우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선진국에서처럼 사회적 시스템이 잘 되어있지도 않고, 가정 내 가사 분담률도 여전히 많이 기울어진 한국 사회에서는 그 어려움이 훨씬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나 남을 바꾸는 것은 분명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쉽지 않은 문제이니, 그 외에 그나마 (상대적으로) 가장 통제하기 쉬운 요소인 육아에 대한 스스로의 강박증을 살짝 좀 내려놓아 보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느끼기에 우리네 사고방식으로는 ‘한없이 약하고 덜 된 미숙한 개체를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육아의 기본 철학인 것 같은데, 프랑스인들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세상에 나왔으니 기존 사회에 본인이 잘 맞춰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물론 어느 쪽이 무조건 맞거나 틀릴 수 없는 부분이고, 각 사회의 환경에 맞게 오랜 시간 발전된 사고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양육자도 피 양육자도 서로 덜 피곤하고 부담보다 행복을 더 느낄 수 있는 쪽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허둥지둥 순간순간이 너무 버겁고 힘들다면, 잠시 놓고 한 번 생각해 보자. 이것이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일인가?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분유를 쌩으로 생수에 타 마시고도 멀쩡히 큰 수많은 인류가 있다면, 여린 피부에 자외선 좀 쐬어도 큰 탈 없이 잘 큰 어른들이 많다면, 그냥 좀 더 자연스럽게 아이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들도 해 가면서 아이를 양육자의 스타일과 기존의 사회에 적응시켜 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혹시 몰라 불안하니 그냥 내가 조금 더 고생하고 말지’하는 소소한 것들이 수십 개 수백 개가 쌓이면 엄청난 에너지의 소모 차이를 만들 것이다. 무조건 아이 중심으로 살아야만 아이가 인간이 되는 것일까? 오히려 어떤 상황이 와도 본인이 그에 맞게 적응하려는 노력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상황이 항상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데 더 익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원문: 투명물고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