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초기 영농 자금과 판로 확보, 투자자는 친환경 먹거리를 시중가보다 20% 저렴하게
빚을 지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 기쁩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 없이 농사짓는 것에 공감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농사펀드는 농사의 패러다임을 바꿀 정말 좋은 도구입니다.
농사펀드 1호의 주인공 조관희 농부 이야기다. 충남 부여에서 쌀농사를 짓는 조관희 씨는 올해 흑향찰이라는 검은 쌀과 홍진주라는 붉은 쌀을 농사지었다. 흑향찰은 2005년 충남농업기술원과 국제벼연구소가 공동 연구해 육성한 품종이다.
농사펀드는 그의 새로운 도전에 ‘커피처럼 밥도 매일매일 반찬에 따라 블렌딩해 먹으면 어떨까?’라는 스토리를 입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관희 농부의 농산물에는 ‘고집스런’ 이란 네 글자가 늘 따라다닌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는 그만의 친환경 농법을 강조해 만든 브랜드다.
농사펀드는 도시 소비자와 농부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소비자가 농부의 농사 계획을 보고 영농자금을 투자하면 수확 후 농산물로 돌려받는 시스템이다. 쌀, 고구마 같은 농산물은 물론 미숫가루, 된장 같은 가공식품도 있다.
지난 2014년 농사펀드 법인이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약 600여 농가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고 여기에 호응하는 소비자는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인증서보다 신뢰가 우선
농사펀드에 참여하는 농부들은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 특이한 점은 친환경 농법을 중요시하지만 인증서보다는 신뢰를 앞세운다는 것이다.
현장을 다니다 보니 인증이란 기준 때문에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농부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효율적인 제초 방법 중 하나가 잡초가 나지 않게 비닐을 깔아두는 건데 다 쓴 비닐을 논두렁에서 태운다면 과연 친환경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인증을 받기 위한 활동에만 몰두하다 보니 왜 인증서가 필요한지를 잊게 된 거죠.
- 박종범 농사펀드 대표
박 대표는 “인증서를 받기 위한 편법도 이뤄진다”면서 “잔류농약 검사에 걸리지 않게 이를 제거하는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반대로 본인은 친환경 방식을 잘 유지해 농사를 지었건만 옆 농가에서 친 농약이 넘어와 피해를 보는 등 여러 사례가 존재합니다. 인증서 하나만으로 친환경 농가라고 규정짓기 힘든 상황이죠.
양보할 수 없는 농사펀드 4원칙
농사펀드에 등록한 농부는 4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 제초제를 사용하면 안 된다.
- 직접 농사를 짓거나 생산에 참여하는 시간이 50% 이상이어야 한다.
- 유전자조작 원료나 불필요한 합성 착향(색)료, 합성보존료가 들어간 가공식품은 안 된다.
- 수산물과 축산물의 경우 동물들이 자라는 환경을 고민하고 위생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이 밖에도 촉진제와 억제제를 쓰지 않고 자연의 시간으로 농사를 짓고 농산물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때 출하하는 농부를 지향한다. 더 나은 먹거리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와 농사 진행 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농사펀드는 이런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매년 농가로부터 자기 점검 차원에서 보고서를 제출받고 해당 지역의 농가끼리 서로 점검 과정도 거친다. 불시 방문을 통해 성실히 약속이 이행되는지도 확인한다.
우리는 농촌 기획자, 목표는 더 나은 먹거리
농사펀드는 농사 환경을 개선해 농부들이 걱정 없이 농사를 짓도록 돕지만 최종 목표는 더 나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일이다.
농부들은 생산 분야에서는 전문가인데 이를 소비자 관점에서 어떻게 잘 팔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이 지점에서 농촌 기획자로서 농사펀드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농사펀드는 작년부터 월간 젤라토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매월 특정 농부의 재료로 특화상품인 젤라토를 만든다. 이달에는 꿀 고구마로 만든 젤라토를 펀딩 중이다. 지금까지 레몬, 땅콩, 복숭아를 비롯해 10가지 종류의 젤라토가 출시됐다.
그 달의 한정 상품으로 판매되는 것으로 매월 기다렸다가 펀딩 하는 고정 고객이 50여 명쯤 됩니다. 젤라토 생산자 입장에선 고정 고객들이 생기고 농부는 자기 생산물을 공급할 판로가 더 생기는 셈이죠.
농사펀드의 매력은 농부들 입장에선 초기 영농자금을 확보하고 판로가 해결돼 자신의 철학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펀딩이 끝나면 농부들은 모인 자금의 50%를 먼저 받고 수확과 배송이 끝나면 나머지를 받는다. 투자자는 농산물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고 유통단계가 줄어듦에 따라 시중가보다 20% 저렴하게 먹거리를 제공받는 것이다.
이 같은 이점 때문에 해마다 펀딩을 재진행하는 농부들의 비율은 70%에 이르며 펀딩 액수도 평균 20%씩 증가한다. 회원 고객들의 재구매율도 65%에 이른다. 하지만 펀딩이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올해 잇단 가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한 무화과 농원은 펀딩 후원자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환불을 해줬다.
자연재해라는 위험요소가 항상 도사려요. 그래서 리스크 관리가 필수입니다. 보통 농가들은 3가지 정도의 작물을 심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로 농사를 망치거나 수확량이 줄면 투자자들에게 이 농부의 다른 농산물로 대체해줍니다. 또는 같은 방법으로 동일한 품목을 재배하는 작목반의 농산물로 대체하기도 하죠. 그도 저도 안 되면 환불해드리거나 후원자들의 동의를 얻어 피해 농가에 기부하기도 합니다.
“‘덕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요.”
농사펀드는 지난해 10억여 원의 매출을 올렸다. 수익 모델은 투자금액의 15%에 이르는 수수료와 지역에 관심 있는 지자체나 기업들과 함께 농사 관련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이다.
박 대표는 최근 푸드테크 시장이 급성장하지만 관심이 새벽 배송이나 총알 배송 같은 물류 서비스에 집중되는 점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농업 분야 스타트업이 주목받지만 먹거리 생산자의 대우나 환경을 향한 관심은 여전히 뒷전입니다. 예를 들어 농업재해보험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 규모가 작은 농부들에겐 언감생심입니다. 대부분 농부는 지역 농협에서 영농자금을 조달하는데, 지원 예산 규모가 날로 줄어들어요. 조건도 까다롭습니다. 자기 땅이 아닌 농부들은 담보물이 없어 대출도 안 되고 농사란 것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자금이 필요하다 보니 융통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농사펀드는 농부들이 좀 더 나은 농사를 짓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들을 조금씩 거둬내는 일에 주안점을 두는 한편 귀농 청년들의 연착륙을 위한 시스템을 구상 중이다.
귀농·귀촌한 청년들이 농사로 자립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농업을 포기하거나 다른 일을 하며 지냅니다. 농사펀드의 주 업무 중 하나가 농부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에디터 기능입니다. 청년들은 미디어를 다루는 툴에 익숙해 지역의 에디터로 활동하면서 특색 있는 농부를 발굴하고 그 이야기를 잘 풀어내 준다면 판매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농부들과 친해지고 농사 노하우도 익히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죠.
농사펀드는 시범적으로 올해 순창에서 청년 에디터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어 춘천, 홍성, 부여 등지에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농부가 걱정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건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소비자 역시 먹거리가 어떻게 길러졌는지 알고 먹는 게 중요하고 그럴수록 먹거리의 품질은 올라간다고 봅니다. 저희가 꿈꾸는 세상은 단순합니다. 농부와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인사를 건네는 문화를 만드는 겁니다. 바로 ‘덕분입니다’라고요.
글. 백선기 이로운넷 책임에디터
사진. 박재하 기자
원문: 이로운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