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대통령 박정희는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비서실장 김계원,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대동하고 술자리를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했고, 18년 동안 이어진 철권통치도 막을 내렸다. 물론 군부독재는 이후에도 8년간 더 지속되기는 하지만.
권력에서 2인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박정희는 왜 김재규에게 암살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 원인을 최고 권력자 박정희를 향한 충성경쟁에서 차지철에게 밀린 김재규 개인에게서 찾는 것은 한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무시한 지나치게 안일한 분석이다. 박정희 암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가 추진한 경제 성장 정책에 기인한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혁명위원회 부위원장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지내며 권력을 오로지한 박정희는 1962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합법적으로 한국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다. 이후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3연임한 후, 1972년 10월 17일, 그의 두 번째 쿠데타인 유신을 통해 한국의 종신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같은 해 가을에 김일성 수령 절대주의로 이동을 하는데, 이 역사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여기서 차치하기로 하자.
이렇게 정권을 잡은 기간 박정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한 정책이 한국의 경제 성장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시작되었고,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사실상 박정희가 암살당한 1979년 종료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한국은 아프리카 가나와 비슷한 수준의 1인당 국내총생산을 기록하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서 성공적인 개발도상국으로 도약했다.
박정희 경제 성장 정책의 딜레마
박정희의 경제 성장 정책은 성공한 듯했다. 아니, 성공했다. 그런데 이런 경제 성장 정책은 박정희에게 동시에 하나의 딜레마도 안겨주었다. 경제 성장에 있어 우수한 노동력은 필수적이다. 그런 까닭에 박정희는 의무교육으로 초등교육을 실시했고, 동 기간 중등교육(중고등학교) 및 고등교육(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의 숫자도 크게 증가했다.
이처럼 교육을 받은 우수한 노동력은 한국이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저렴한 임금으로 우수한 노동력을 활용해 수출 지향 정책을 펼쳐 경제 성장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박정희 정권의 문제 역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은 이 우수한 노동력에서 야기되었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우수한 인적 자원의 확충을 위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확대실시는 그들이 교육받은 교과서대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 일반의 열망을 증대했고, 이런 시민 일반의 열망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터져 나온 부마 항쟁이나 YH 사태 등 여러 시위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의 문제는 이런 시민 일반의 요구와 분노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보부, 대통령 경호실, 국군보안사령부 등 비밀경찰을 동원한 폭력으로 탄압하고 그 과정에서 권력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났다는 데 기인한다.
결국 이런 시민 일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박정희 정권과 그 내부 권력다툼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정적인 경호실장 차지철에 대한 사살로 끝났다. 문제는 이것이 당시 한국이 직면한 정치적, 경제적 측면의 구조적 모순을 제대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결국 이는 전두환이 주축이 된 신군부가 12·12쿠데타부터 5·17 비상계엄전국확대를 통한 광주민주항쟁까지 이어지는 ‘세계 사상 가장 긴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일을 야기했으며,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출범을 촉발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이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한 경제 성장 및 이를 달성하기 위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확대 실시는 역으로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2001년 다론 아제모을루(Daron Acemoğlu)와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은 선거권이 불균등한 상태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해질 경우 권력을 가진 계층은 가난한 계층의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선거권을 확대하거나 혹은 세율의 증가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선택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세율 인상을 통한 부의 재분배는 가난한 계층에 있어 불가역적이고 믿을 수 있는 선택이 아니기 때문에 선거권 확대가 발생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권력의 독점이 심한 정권에서 부의 재분배 혹은 복지정책이 발달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밝혔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이 프레임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유신 이후 선거권은 유명무실했고, 경제 성장은 이루었으되 그 과실이 형평성 있게 분배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암살되었으나, 이는 상술한 것처럼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득세를 야기했다. 이 신군부는 ‘세계사상 가장 긴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다. 경제 성장을 통해 표출된 시민 일반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실질적으로 개헌을 통해 실현되는 데는 이후에도 8년이 더 소요되었다.
권력의 공백에 검찰이 등장하다
정확한 문헌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분야의 전문가에게 들은 적 있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주의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 정권을 뒷받침한 세 기둥이 무너진다. 바로 군대, 정보기관, 경찰이다.
실제로 한국 역시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충실하게 기능했던 저 셋이 민주화로의 이행기에 모두 그 기능이 약화했다. 근대는 대통령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을 통해, 정보기관은 국내 사찰 기능의 지속적인 약화를 통해, 대공분실로 대표되는 인권 탄압의 상징인 경찰 역시 대공 기능의 약화로.
하지만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권력의 공백을 틈타 검찰이 무소불위의 비선출 권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검찰이 지닌 수사권과 기소권 독점은 권위주의 정권을 지탱하는 삼각 축이 건재할 때는 그저 그 손발에 지나지 않았지만, 권위주의 정권이 붕괴하고 삼각 축이 약화하자 감독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이 조직은 선출된 권력이 자신들의 기호에 맞을 때는 협력하고, 기호에 맞지 않을 때는 견제를 넘어 아예 비토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왔다. 결국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상흔은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현재진행형이다.
원문: 정재웅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