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는 소문난 ‘프로 자학러’가 한 명 있다. 내가 느낀 M은 세상 만물에 대한 관심도 많고, 통찰력도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인가 M을 만날 때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M과의 대화 끝에는 늘 스스로를 향한 자학의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을 무능하고, 소극적인 인간이라고 단정 짓고 깎아내리는 게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심각한 문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라 생각했다. 나를 비롯한 지인들은 반사적으로 어떻게든 M을 치켜세우기 바빴다. 사랑하는 M을 어떻게 해서든 수렁에서 꺼내 주려고 애썼다. M을 위로하며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그럴 때면 M은 말했다.
“얘기해봤자 내 말, 안 먹힐 거야.”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 얘길 누가 귀 기울여 들어?” “썸은 무슨! 나 같은 사람을 누가 거들떠봐?” “내가 이 수준이니까 이런 사람들이랑 일하지 ㅜㅠ” “변변치 않은 경력에 변변치 않은 실력… 내가 인사 담당자라도 나 안 뽑는다.” […]
이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또 자학 모드 스위치가 올라갔군!
덜 친할 때는 ‘겸손’인 줄 알았다. 겸손과 자학은 그 결이 분명 다르다. 게다가 M의 자학은 습관성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스스로를 자학하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M의 자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학창 시절에는 성적은 좋았지만 소극적인 성격에 외모 콤플렉스까지 있어서 늘 먼지처럼 존재감 없는 아이로 살았다. 그 후 살인적인 다이어트와 외모 꾸미는 방법을 익히면서 외모 자신감이 살아나고 사회성 역시 조금씩 자랐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사수였던 선배에게 일을 배우며 혹독한 시련기를 겪었다. 오피스물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는 악덕 사수의 모든 덕목을 갖춘 선배의 존재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정도였다. 죽도록 힘든 시간을 견딘 덕에 어느새 모두가 인정하는 커리어도 쌓았지만 M의 자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M이 습관성 자학을 한다고 느끼면서부터 그의 행동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린 경험 때문인지 스스로 만족할 만큼 제대로 꾸미지 않고서는 결코 바깥 외출을 하지 않았다. 악덕 선배한테 시달린 경험 때문인지 일에 있어서 혹독하게 자신을 다그쳤고, 후배들도 그 기준에 맞춰 채찍질했다. M의 말로는 연차가 쌓이면서 트라우마를 안겨준 선배의 행동을 어느새 그대로 자신도 한다는 걸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M은 스스로가 말하는 대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일까?
그동안 내가 본 M은 그 누구보다 자신을, 그리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꾸미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외면뿐 아니라 내면을 가꾸는 데도 소홀함이 없다. 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 공연을 섭렵하며 영감을 얻고 다양한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주변 사람들을 부지런하게 챙기고, 그들과 만나며 따뜻한 말을 건넨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에 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우리가 아는 동종업계 사람 중 탑이다. 그 자부심은 고스란히 결과로 나타난다.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열정을 쏟는다. 곁에서 보기에는 그 기준이 너무 높아 저러다 몸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M이 존재한다
나도 한때, 무수한 M 중 한 명이었던 적이 있다. 어쩌면 지금도 알게 모르게 습관적 자학을 할지 모르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M은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실제의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자학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남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
상대방이 할 말을 사전에 차단해야 내상이 덜하다. 자존감 부족한 사람에게 타인의 인정은 낙인과 같다. 나의 모자람을 패도 내가 패야지 남들이 패는 것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도 의심하는 스스로의 능력을 타인도 확인하고 내뱉는 순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만다.
가장 큰 문제는 습관성 자학이 자신을 서서히 갉아먹는다는 걸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친하고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다고 해도 그 사람의 내면까지 샅샅이 알기는 어렵다. 타인들은 세상을 향해 스스로가 열어둔 딱 문의 폭만큼만 당신을 보게 마련이다. 사람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세상의 모든 M. 어느새 M들은 자신이 말하는 그 이미지 그대로의 사람으로 세상에 인식되었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자학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사람들은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벽을 쳤다. 우울, 부정, 실패, 불평, 불만, 무기력 등등 부정적인 단어가 세상의 모든 M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다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적당히 숨기고 또 부풀리며 살아간다. 혹독한 평가가 난무하는 세상에 굳이 나까지 숟가락을 얹을 필요가 없다. 자학은 나를 파괴하는 ‘괴물’이고, 건강한 관계를 해치는 ‘독’이다. 습관적으로 자학하던 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M에게 말하고 싶다.
자학으로 도망치지 마세요. 그곳은 결코 도피처가 될 수 없어요. 자학은 그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에요.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