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가
2006년에 영화 〈타짜〉가 개봉했다. 그때도 재미있었고 지금 다시 봐도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비롯한 일련의 여성들에게 굉장한 빅엿을 먹인 영화이기도 하다. 〈타짜〉로 인해 거의 10년간을 똑같은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대학생일 때, “올~~~ 이대 나온 여자네!!!”
졸업식에서, “올~~~ 이대 나온 여자네!!!”
소개팅에서, “올~~~ 이대 나온 여자네!!!”
취직했더니, “올~~~ 이대 나온 여자네!!!”
이대 사태 포탈 뉴스 기사 댓글, “올~~~~~ 이대 나온 여자들!!!”
심지어 신입사원일 때 선배 중의 하나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어우… 나 이대생 진짜 싫어하는데. 난 여대 다니는 애들은 다 싸이코 같더라.
쓰레기 성격파탄자가 한 이야기가 아니다. 업무적으로도 훌륭한 평가를 받고, 선후배들에게 참 괜찮은 사람이라며 두터운 인망을 자랑하던 이가 25살의 신입사원에게 인사 혹은 농담이랍시고 했던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뭐 타짜 속 김혜수 캐릭터가 싫었을 수도 있고, 대학 때 열혈 운동권이었다는데, 이대생과 운동하다가 다퉜던 안 좋은 기억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이대생한테 차였을 수도 있고, 그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그 뒤부터 나는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이대생’ 같지 않기 위해서, ‘이대생’ 같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면전에서 이대생이 정말 싫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하하 웃으며 넘기고, 이후로는 술을 열심히 마시고, 털털한 척 노력하고, 남자 친구랑 데이트할 때 더치페이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남자 선배들에게 싹싹하게 굴고, 친근하게 행동하고, 한편으로는 ‘헤프지 않게’ 행동하고. 그 결과는 꽤 나쁘지 않았는데, 그들로부터 드디어 인정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야, 승혜 씨는 이대생 같지가 않네! 나 원래 이대생 싫어하지만 승혜 씨는 참 좋아!
‘이대생’ 같은 것은 무엇이고 ‘이대생 같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여태까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것은 칭찬이었다. 더치페이한다는 것으로 이대생 같지 않음을 인정받다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하여간 이후로 ‘된장녀’와 ‘이대생 같지 않음’이 증명된 여자 신입사원의 회사생활은 나름 편해졌다. 비굴과 굴종의 대가는 달콤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강렬했던 경험인데, 그러면서 그때 나는 낙인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이대생이라는 것이 엄청난 핍박이나 압박 혹은 모욕을 당할 정도의 ‘낙인’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어떠한 집단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집단의 구성원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낙인은 어떻게 벗을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대상자의 심리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나 자신이 생생하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낙인을 벗으려다 보면 내적 정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면서 차별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신건강에 썩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것은 그런 경험들 속에서도 나를 비하하고 모욕하던 그 선배에 대하여 ‘아오, 서울대 출신들 다 X 같네 진짜. 서울대 새끼들은 왜 한결같이 인성이 저따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의식이 똑바로 박힌 선량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낙인이 그런 방식으로는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낙인은 소수자, 약자, 마이너에게만 작용한다. 물론 강자의 집단 역시 어떤 집단적 특성으로 묶이는 경우는 많지만, 그것이 낙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강자와 다수자 집단의 구성원이 하는 어느 행동은 그냥 그 사람 개인의 특성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 때 같은 버스를 탄 백인 관광객들이 너무나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본 경험이 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미국인이나 캐나다인이었을 텐데, 누구도 그들을 보고 미국인은 역시 시끄럽고 무례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만약 당시 그들이 중국인들이었다면 아마도 중국인을 욕하는 의견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낙인과 차별이란 그런 것이다. 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힘이자 권력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자주 접할 수 있는 차별과 낙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국가,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지역, 계급, 신체적 조건, 그 외 무수한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차별들을 다룬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에 많은 책들이 젠더나 계급 같은 단일한 조건만 두고 강자와 약자를 구분했던 것과 다르게, 차별의 층위는 매우 복합적인 요소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페이스북에서 기득권 테스트라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직업이 무엇인지, 성별이 무엇인지, 몇 살인지, 강남에 아파트가 있는지, 특목고 출신인지 등으로 기득권 여부를 체크했는데, 사실 그 질문지는 굉장히 정교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50대 남성이자 전문직인 사람도 장애인이자 퀴어일 경우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 있고, 강남에 살지 않는 비 특목고 출신 여성이라도 재벌가의 자제라면 상대적으로 ‘덜’ 약자일 수 있는 것이다.
워낙 좋다는 평이 많았지만, 소재가 소재인지라 꽤나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하면서도 의외로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을 콤팩트하게 아주 잘 정리해 놓은 훌륭한 책이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차별과 낙인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그렇기에 “그간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에 관한 메시지가 매우 설득력 있다.
사실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존재하는 차별과 편견을 마주하고 종종 깜짝 놀라곤 하는데,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장 역시 훌륭하여 물 흐르듯이 잘 읽힌다.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 29쪽
물고기에 비유해 생각해보자. 흐르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물결을 가로지르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보다 편하다. 하지만 물결을 따라가며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그저 편하다고만 할 수 없다.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기회가 주어지는 만큼 과업이 따르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법이다.
그러니 누구의 삶이 더 힘드냐 하는 논쟁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는 말도 맞지 않다. 그보다는 서로 다르게 힘들다고 봐야 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고 그래서 다르게 힘들다.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그렇기에 불평등에 관한 대화가 “나는 힘들고 너는 편하다”는 싸움이 되어서는 해결점을 찾기 어렵다. “너와 나를 다르게 힘들게 만드는 이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공통의 주제로 이어져야 한다.
- 33쪽
만일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지고 있어 현 체계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평등으로의 진보가 그냥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옳지 않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설문에, 백인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고, 흑인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응답하는 경향이 꾸준히 나타난다.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전망이론을 통해, 사람들이 손실의 가능성과 이익의 가능성 가운데 손실의 가능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손실회피편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을 반영하듯,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개선은 특권을 잃는 백인의 입장에서 흑인보다 더욱 크게 체감한다.
기존에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의 이익이 곧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성 평등을 둘러싼 논쟁에서 비슷한 긴장이 감지된다.
- 34–35쪽
‘정치적 올바름’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차별에 관한 논의가 과도하고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평등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변화에 불편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 정말 평등을 위해 감당해야 할 변화가 현재의 불평등보다 더 부담스럽고 불편한 걸까? 다른 말로, 현재의 불평등은 우리에게 편안한가?
- 186쪽
차별과 억압이 일상에서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인 습관, 농담, 감정, 용어 사용, 고정관념 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리스 영의 말처럼, 무작정 사람들을 비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말한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 189쪽
원문: 한승혜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