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원을 다니는 아는 동생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무심코 형제가 무엇을 하는지 물었더니 취업준비생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괜히 물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 그저 ‘참 힘들겠네’ 하고 말했는데 동생은 진심을 담아 정말 그렇다면서, 취업준비생이 누구보다 힘든 것 같다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잠시 들은 이야기였지만 나도 취업 준비하던 시절의 기억과 그 시절 만났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취업준비생이 가장 힘든 점은 아마 소속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자신을 붙잡아줄 수 없는 대지에 황망히 놓여 있다. 길을 걸을 때,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소속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학생이고, 회사원이고, 아니면 어떤 가족에 속해 있고, 자기만의 가게를 가졌다. 그들 모두 어쨌든 각자의 삶에서 자신이 살아갈 곳을 얻었고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나가는 것만 같다.
그러나 소속이 없는 입장에서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서 나만이 이 도시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처럼 느껴지곤 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은 그 외에 달리 설명할 길 없는 감각으로 뼛속을 스며든다. 어느덧 임시적인 소속이나마 갖게 된 나는, 그 시절의 감각이라는 걸 문득 잊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절, 그나마 의지가 되었던 건 자신을 견뎌내던 글쓰기 정도를 제외한다면 아마 같은 처지의 사람이 모이던 스터디 정도였을 것이다. 스터디를 하러 가면 임시대피소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나마 홀로 세상을 견디는 게 아닌, 동료들과 한배를 타고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느낌에 잠시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 사람은 각자의 자리랄 것을 찾아간 것처럼 보인다. 개중에는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직장이나 직업, 가정에 불만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략 30대 초중반쯤 되어서는 대부분 자기의 소속이라는 걸 갖게 되고, 또 그 소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듯하다. 만족스럽든 불만족스럽든, 어디로든, 동굴이든 움집이든 들어가는 때가 오고, 그 바깥으로 더 이상 함부로 나갈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런데 또 그렇게 얻은 소속 혹은 구속을 무척이나 버거워하거나 불만스러워 해 바깥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자주 보게 된다. 어쩌면 내 주변에는 이제 소속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사람보다는, 지금의 소속이 싫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 것 같다. 삶이란 무엇인지, 그렇게 끝도 없는 불만, 견딜 수 없음, 괴로움 따위와 맞서면서 빙글빙글 도는 무엇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화 〈툴리〉를 보면 어딘가로 떠나어 자기 자리를 찾고 싶어 하는 젊은 시절과 그 어딘가에 도착해 가정을 꾸리고 사는 중년 시절의 대비가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젊은 그녀는 미래의 어느 고장에 도착하고 싶어 하고, 어느 고장에 도착한 중년의 그녀는 다시 자유롭게 떠나는 과거를 꿈꾼다. 삶이란 정말로 그런 반복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삶이 어째서 이런 사이클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이 인간은 옭아매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이가 아마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그러므로 누구에게든 조금은 더 다정한 마음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실 조금만 마음을 기울여보면 이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 길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힘겨움이 묻어나 그들 모두를 연민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아마도 가장 걱정해야 할 건 또 나 자신이겠지, 싶고 이런 어려운 마음들을 다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며, 가득해지는 마음들을 그저 짊어지고, 놓아두고, 끌고 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듯하다. 그저 마음을 이고 간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삶들을 지켜보고, 또 나의 삶에서도 무수히 존재하는 그런 곤란하고 어려운 마음들을 짊어지는 법을 알게 된다. 그저 그렇게 들고 가는 삶을 이해하게 된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