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시 교육과 공정성에 대한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는 거듭 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공정성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모든 사람의 무기가 될 수 있다. 한편 그 사람이 무엇을 ‘공정’이라고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이 속한 위치를 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대개 불공정성의 문제를 주장할 때는 자기가 선 위치가 공정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 사는 누군가에게는 지역이나 지방에 혜택을 주는 모든 것들이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공기업 취업이나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사람은 전국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달리 지역 인재에 고정된 할당을 주는 일은 서울에 있는 이들에게 실력에 따라 공정하게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실력 없는 이들에게 불공정한 혜택을 주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수능제도야말로 가장 공정한 실력 위주의 입시제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수능으로 인한 불공정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오랫동안 이야기되었다. 대체로 수능 시험을 잘 칠 수 있는 능력은 공교육에서 해결되기 어려웠고, 결과적으로는 사교육의 접근 가능성에 따라 수능 점수와 입시가 결정되는 현상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EBS에 유명 강사들을 초청한다든지, EBS 교재 내에서 수능을 출제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효과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사교육에 접근이 용이한 사람들에게는 수능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제도였겠지만, 공교육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당수의 학생에게 수능은 결코 공정한 제도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재수, 삼수의 문제로 가면 입시는 명백히 돈 문제가 되었다. 거기에서 공정성이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타인의 어떤 행위가 나에게 불공정한 일이 될 때, 내가 누려왔던 것들이 다른 타인에게 불공정한 일이 아닌지가 언제나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 대한 고민 없이 말하는 공정성이란 사실 공허한 것이고, 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공정성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공정해야 하는가? 어디부터는 공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예를 들어, 부모와 가정의 영향이란 어디까지 제한되어야 하는가?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할 수밖에 없는 학생에게 이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불공정할 텐데, 그런 불공정함은 용인되어도 되는가? 용인되지 말아야 할 것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이 느끼는 불공정함인가?
사회에서 중요한 특정인의 윤리의식을 엄격하게 다루는 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과연 우리가 진실로 합의해야만 하는 공정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거나, 적어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것이 단순히 출세, 성공, 입신양명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 관련된 문제라면, 진정한 교육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가장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차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관련된 공정성이 이토록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교육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신분 상승이나 출세와 결정적인 관련을 맺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와 관련된 문제가 전국민적인 관심이 되고 수많은 사람의 분노나 절망이 뒤엉킨 전쟁터가 되는 이유는, 그처럼 교육이 이미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욕망의 각축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는 온갖 중상모략, 편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투와 생존의 욕망이 꿈틀대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교육 자체, 그런 교육에 대한 공정성의 요구 자체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이 교육과 공정성이라는 문제가 적당히 내버려 두기에는 우리 사회 전체에서, 이 사회 구성원이 살아가는 인생 전체에서, 너무도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부동산이니 저출산이니 하는 문제마저 교육과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논란은 결국 우리 사회가 가장 시급하게 직시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셈이다.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교육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교육의 위상도, 역할도, 교육을 둘러싼 공정함이라는 것도 달라져야만 한다. 이 사회에 그보다 긴급한 문제는 별로 없을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