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집회와 서초동 집회에 대한 통신 데이터와 지하철 사용 내역을 통한 통계가 나온 기사를 보았다. 광화문 집회의 경우 60대 이상이 75% 정도였고 50대가 15% 정도이니 합쳐서 90% 정도가 된다. 서초동 집회는 40대가 30% 정도고 50대는 27%, 60대는 20%라고 하니 합쳐서 80% 정도가 된다. 30대 이하 세대, 특히 10대와 20대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 대통령의 탄핵 집회 때와 비교하면 사뭇 다른 모습이다.
탄핵 집회 때는 서울 시내 수많은 대학교들이 행렬을 이루어 광화문까지 행진을 했다. 10대들은 지방에서 단체로 올라와 시위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은 이 집회 어디에서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라고 해서 세상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행동력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실 탄핵 집회의 포문을 연 것도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었으며, 실제로도 광화문에 가면 청년들이 거의 절반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많았고 새벽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온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다고 하는 요즘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탄핵 집회나 혜화동 집회 등만 생각하더라도, 청년들이 사회의 정의나 현실 문제에 관심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청년들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일은 ‘그들의 일’이라고 느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40대 이상은 이 일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한 ‘자기의 일’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이 간극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충분히 더 이야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청년들에게 사회의 문제란 아마도 계급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청년들은 세대 간의 격차 속에서 앞으로 사회 속 자기 지분을 쟁취해내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이미 자본과 권력은 모두 기성세대에 의해 점유되었고, 어떻게든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서 자기 몫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공정성은 청년들이 유일하게 그런 계급적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길로 여겨지고 있다. 공정함이 없는 사회에, 청년들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정유라 사건의 촉발도 그런 ‘공정함’과 직결되었다. 탄핵 사태 당시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부패한 카르텔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는지 알게 되었고,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당연히 정의도, 공정성도, 자신들의 미래도 없다고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청년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확실히 그런 계급적 문제와 공정성의 문제가 결합해, 자기의 문제가 곧 사회의 문제가 될 때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사회를 분리해 생각하지 않고 연결된 곳에서만 진지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 비해 현재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진 정치적 문제는 계급 자체와 뚜렷한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광화문에 모인 장노년층과 서초동에 모인 중장년층 중 누가 더 계급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집단인지 구별하는 건 힘들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각자가 믿는 ‘정의’ 아래 그런 거대한 신념을 추구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을 것이다. 그것이 빨갱이 퇴치의 신념이든, 좌파가 나라를 베네수엘라로 만들 것을 막고자 하는 열망이든, 검찰개혁이나 사법개혁을 통한 애국이든, 정의로운 인물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든, 그런 신념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온도 차는 너무나 극심해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는 거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기성세대들은 정의에 투신하지 않는 청년세대들이 이기적이라 매도하기 바쁘고, 청년세대는 기성세대들이 자기들끼리의 진영적 이익에 빠져서 그들끼리 싸우기 바쁘다고 환멸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그들에게 사회의 문제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그것은 자기가 믿는 사회의 정의이자, 자기 정체성, 자기 신념과 자기 존재의 문제라면, 청년세대에게는 자기의 생존이자 사다리의 문제이고, 달려야 할 레이스가 공정한지, 사회가 공평한 게임의 룰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광화문과 서초동이 들썩일 때, 서울에서는 16개 학생단체와 대학 총학생회 등이 ‘자취생 총궐기’를 열었다. 그들은 자취하는 대학생들이 생활비 절반이 넘는 주거비를 내거나 최저 주거기준에 미달한 환경에 산다면서 OECD가 권고한 월 소득 대비 주거비 비율 20%를 보장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 시점 학자금 대출을 미납한 청년들과 신용불량자는 수만 명이 되었고, 빚에 부담을 느낀 30대의 연금 가입률도 대폭 떨어졌다.
그들의 풍경은 그러하다. 그들 또한 사회 문제에 누구보다 절실히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다만 그 방식도, 시야도, 풍경도 저 거대한 대립과는 빗겨나간 곳에 비스듬히 존재할 뿐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