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은 학생운동이 주도했다
당시 학생운동의 이념적 자양분은 NL/PD였다. 민족해방파와 민중민주혁명파였다. NL은 이념적으로 반미-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고, 북한식 체제를 대안으로 생각했다. PD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이 강했고, 소련식 체제를 대안으로 생각했다. NL/PD 이념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목표로 했다. 즉 반체제 운동이었다. 동시에 NL/PD는 북한식 모델이냐, 소련식 모델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양자 모두 공산주의 모델을 대안으로 생각했다.
왜 1980년대 학생운동은 반체제-공산주의 이념을 대안으로 생각했을까? 그것은 1980년 광주학살이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이 학살자인 것을 알았을 때, 그러나 모든 제도권 언론과 국가기구들은 총체적 은폐에 활용될 때, 고문 및 구속을 각오하고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은 ‘국가의 총체적 부정’을 전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운동권 노래 중에 박종화의 ‘바쳐야 한다’가 있다. 그 노래에는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라는 대사가 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치열한 사람일수록, 활동가일수록, 자신의 생을 걸고 하려는 사람일수록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 정도의 결기가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 독재정권 치하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끈질기게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승리할 수 있었다.
1980년의 충격적인 사건, 학살자가 대통령인 상황, 국가 기구의 총체적인 타락과 은폐, 이런 총체적인 부조리에 대한 반발로서 반체제-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주류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근본주의적 성향은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 학생운동 세력, 민주당, 진보정당의 핵심 활동가와 지지층에서도 어느 정도 이어진다.)
그런데 1989년 동독이 무너지고, 1990년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순차적으로 무너지고, 1991년 급기야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소련)마저 붕괴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는 NL/PD 이념 운동의 확산을 불러왔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6월 항쟁의 승리 이후, NL/PD 운동은 더욱 번성했다.
국내에서 대안체제라고 생각되어 공감대가 확산될 때, 세계사적으로는 대안체제가 아님이 확인되었다. 한국의 진보/좌파 세력이 그렇게 중시여기던 민중들이 봉기를 통해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90년대는 한국의 운동권들에게 멘붕의 시대였다.
1990년대 공산주의 붕괴 이후
한국의 운동권은 몇 가지 갈래로 분화되었다.
첫째 부류는 멘붕파다. 이들에게 1990년대는 멘붕의 시대였다. 이들은 공부와 예술에 빠졌다. 철학책을 파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의 유행은 이때 시작된다.
둘째 부류는 현장파다. 1987년 이후, 정치 영역에서 민주화 공간이 열리자, 대중운동이 활발해졌다. 전대협을 시작으로, 전국 글자가 들어가는 각종 대중조직이 만들어진다. 전노협, 전농, 전빈련, 전철연 등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대중조직 활동가로 활동한다.
시민운동 성향의 현장파인 경실련, 참여연대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이들은 이념적 거대 담론은 내려놓고 당면한 대중 투쟁에 몰두했다. 당장 눈앞에서 전개되는 싸움이 있었기에 이들은 이념적 좌표가 붕괴됐음에도 하루하루를 지치지 않고 투쟁할 수 있었다.
셋째 부류는 뺏지 진입파였다. 1980–1990년대 공개 공간에서 노출되어 활동했던 총학생회장 출신이 가장 유리했다. 이들은 국회의원 뺏지를 위해 돌격 앞으로 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넷째 부류는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파였다. 이들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했다. 대신 이들은 유럽의 복지국가가 만들어진 원동력을 이념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찾았고, 물리적으로는 ‘노동운동과 결합된 진보정치 운동’에서 찾았다.
1980년대 인민노련에서 활동했던 주대환, 노회찬, 황광우 등이 주도해서 만든 한국사회주의 노동자당(한사노당)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후 ‘한국노동당’ 그리고 민중당으로 바뀌고, 다시 민주노동당을 주도하는 그룹이 된다. (이후 민노당은 NL 계열이 장악한다.)
1990년대적인 맥락에서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 진보정치는 같은 본질의 다른 표현들이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진보정치 세력의 실천적 결과물이 복지국가였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념, 하나는 실천 방식, 하나는 제도적 결과물이었다.
- 첫째 멘붕파는 이후 한국의 사회과학+인문학 발전에 기여한다.
- 둘째 현장파는 민주노총, 경실련, 참여연대 등으로 흘러들어가 대중운동 발전에 기여한다.
- 셋째 뺏지 진입파는 민주당에 흘러 들어가 20–30대 나이에 국회의원 뺏지를 다는, 소년 급제를 한다.
- 넷째 복지국가, 사민주의파는 1990년대 시련의 시기를 견딘 이후, 2004년 꿈에 그리던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에 성공한다.
이후 뺏지 진입파의 행보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극적으로 당선되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 속에서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한다. 299석 중 152석을 석권했다. 민주노동당 10석, 민주당 9석이 된다. 세 정당은 299석 중 171석이 된다. 2004년 총선 이후 원내 과반이 된 열린우리당은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잡았지만 한국 사회가 당면한 주요 문제의 ‘솔루션’을 갖고 있지 못했다.
‘뺏지 진입파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원내 과반이 되자 학생운동 때 주요 관심사였던 이슈를 정치 이슈 전면에 내세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보안법 폐지’였다. 국민들은 관심이 없거나 혹은 폐지까지는 원하지 않았지만 운동권들끼리는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국가보안법 폐지를 ‘원내 과반이 된, 첫 번째 정기국회’ 메인 이슈로 띄웠다.
그해 가을과 겨울, 격렬한 원내 갈등을 겪고, 그리고 국민 다수의 반대로 인해 국가보안법 폐지 원내 투쟁은 결국 좌절됐다. 그리고 2006년 지방선거를 포함해서 마치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처럼, 열린우리당은 모든 보궐선거에서 23전 23패를 하는 전무후무한 신기록을 세운다. 이후 2007년 대선에서 500만 표가 넘는 차이로 패배한다. 2008년 총선도 참패한다.
그동안 ‘반독재 민주화’로 먹고 살았던 민주당에게도 새로운 대안적 노선이 필요해졌다. 마침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미국에서도 진보적인 성향의 젊은 대통령, 오바마가 집권한다. 민주당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파’의 아젠다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대중운동에 기반한, 현장파’에서 최대지분을 가진 민주노총 등과 화해를 시도한다. 그 결과물이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을 쟁점화한 것이다.
2010년 무상급식 이슈는 대중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민주당의 거의 모든 세력은 (평소에는 별로 관심 없었던) 복지국가 이슈를 경쟁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무상교육,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자신들의 아젠다로 채택하기 시작했다.
17대 국회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이 10명이었다. 비율로 치면 3%였다. 3% 세력이었기에 튀기 위해 자극적인 구호성 정책들도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 그런데 ‘수권정당’을 지향해야 할 민주당은 구호성 정책들도 마구마구 채택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의 핵심 활동가들도 “우리가 주장하는 정책을 다 실현하려면 우리가 집권해도 불가능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한번 툭 던져보는 수준의 정책들도 마구마구 채택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내부에서는 민주당의 변신이 너무나 과감했기에 저것은 노선 전환이 아니라 일시적 쇼에 불과하다는 입장이 다수일 정도였다. 2004년 원내 진입 이후 진보정당이 제기하던 이슈들은 ‘민주당화’되기 시작했다. 부분적으로는 어설프게 구호 수준의 것 그대로, 부분적으로는 약간 세련되게 마모되며 도입되었다.
1990–2010년대 세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1990년대 한국의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세력이 ‘유럽의 복지국가’에 관해 공부했던 것들은, 이념적으로는 1880–1940년대 혁명적 공산주의 노선과 다른 선택을 했던, ‘민주주의를 수용했던 사회주의 세력’의 이행 과정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지점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을 비롯, 상대적으로 정치사상에 가까운 내용들이다.
‘복지국가’에 관해서는 1960–1970년대를 절정으로 하는 제도들을 공부했다. 노사(정) 협의구조인 코포라티즘, 공공 교육, 공공 임대주택, 공공 의료, 강력한 노동 3권, 공동결정법, 연대임금제, 산업별 노동조합, 사민당과 중앙 노총의 연계 구조 등이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주장했던 ‘부유세,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은 유럽의 역사에서 길게 잡으면 1910년대 구호성 정책, 짧게 잡으면 1960년대 유럽 사민당-노동당류의 정책들을 채택한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해 현재 한국의 진보정당, 민주당 다수,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다수, 한국의 진보언론 다수가 아는 ‘복지국가 이슈’ 역시도 1960–1970년대를 전성기로 하는 것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90–2010년대 세계 경제는, 세계 자본주의는, 국제분업구조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변화의 핵심은 3가지이다.
첫째,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이다. 1990년 시점 전 세계 인구 60억 중에서 자본주의에 해당하는 나라는 얼마 되지 않았다. 동유럽을 제외한, 서유럽-북유럽-남유럽 국가들이 해당됐다. 나머지는 북미(미국, 캐나다) 국가였고 호주-뉴질랜드 국가였다. 일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몇 국가만 ‘자본주의 산업 국가’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공산주의 국가였거나, 또 나머지는 사실상 농업 국가였다. 아프리카와 동남아, 남미 대다수 나라는 농업국가에 속했다.
1990년 시점 전 세계 노동자의 숫자는 약 15억 명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이들 나라들도 ‘자본주의 산업화’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중국, 인도가 최선두에 섰다. 그렇게 ‘새로 유입된 노동자’ 숫자만 15억 명이었다. 1990년 이전 세계 자본주의 노동자의 총수는 15억 명이었는데 ‘추가로 합류한 노동자 숫자’가 역시 15억 명이 됐다. 그래서 노동자 숫자는 갑자기 30억 명으로, 두 배로 늘어났다. 리처드 프리먼이라는 학자는 이를 ‘거대한 두 배(Great Doubling)’라고 표현한다.
둘째, ‘ICT, 정보-통신-기술 혁명’이다. ICT 혁명은 생산의 국제화를 가속했다. 하나의 제품을 만들 때 1990년대 이전에는 한 나라에서 대부분의 공정을 소화해야 했다. 『거대한 수렴(Great Convergence)』의 저자 리처드 볼드윈 표현에 의하면 생산은 소비와 번들링(=연결) 되어 있었다.
또한 ICT 혁명으로 인해 생각의 이동 역시 용이해졌다(그전에는 상품의 이동만 용이했다). 예컨대 설계는 미국에서, 생산은 중국에서, 디자인은 프랑스에서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99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는 ‘GDP 성장률보다 더 높은 교역량 확대’를 경험한다. 이를 두고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세계자본주의의 ‘제2의 황금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셋째, ‘서비스화’다. 제조업은 교역재 성격이 강하고, 서비스업은 비교역재 성격이 강하다. 서비스업은 산업의 속성상 사람이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의 이동은 제약되어 있기에 제조업이 어느 정도 발달하면 그다음 ‘서비스업’의 비중이 확대되는 추세는 선진 자본주의에서 예외가 없다. 선진국 자본주의 중 모든 나라는 서비스업의 취업자 비중이 70%를 넘는다.
서비스업의 확대’는 ‘계급 관계’를 변화시켰다. 제조업은 큰 공장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다. ‘대규모의 인력, 공간적으로 결집된’ 상태였다. 노동의 성격은 상대적으로 균질적이었다. 노동의 조직화와 자본에 맞서는 협상력 발휘가 용이했다.
그러나 서비스업은 달랐다. ICT 혁명,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과 맞물려 ‘세계화와 연결된’ 서비스업은 슈퍼 울트라 고액연봉을 받았고, (음식-숙박-도소매업과 같은) ‘세계화와 단절된’ 서비스업은 과당경쟁에 시달렸다. 서비스업 노동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절’이 가능했다. 근본 이유는 ICT 혁명, 항공비용의 하락, 고속철도의 발달, 통신비용의 하락, 컴퓨터, 정보-통신-교통 비용의 하락, 반도체 비용의 하락 등이 맞물린 결과다.
1990년대 이후 벌어진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화 3가지(ICT 혁명,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 서비스화 경향)는 ‘자본의 음모’나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반격’ 때문이 아니었다. 변화의 근본 원인은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때문이었고(ICT 혁명의 경우), 고르바초프와 등소평, 그리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서 있었던 민중봉기 때문이었고(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의 경우), 서비스화의 경우에는 특정인을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기술적, 사회정치적, 인구 사회학적 결합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왜 마크롱에게 몰표를 주었을까
지금까지 떠든 이야기들은 ‘마크롱의 개혁’을 이해하기 위한 전사(前史)에 해당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왜 마크롱 같은 인간에게 몰표를 주었을까? 왜 의석이 0석이었던 신생 정당 앙마르슈(전진, En Marche)에게 ⅔에 달하는 압승을 선사했을까?
왜 같은 선거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 좌파를 상징하는 사회당에 대해서는 8%라는 참혹한 득표율을 선사했을까? 북유럽의 나라들보다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이 더 많은 프랑스의 청년실업률은 왜 25% 수준에 달했던 것일까? 이 모든 게, 프랑스 국민 대부분이 극우 꼴통 우경화가 되어서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 유럽의 사민주의, 복지국가는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위기의 본질은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다. 한 마디로 ‘경쟁 격화’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슈퍼 울트라, 경쟁격화’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두 배’로 집약한, 15억 명의 노동자가 30억 명으로 늘어났다는 말의 의미는 ‘경쟁이 두 배로 격화된 것’을 의미한다.
누구의 경쟁이 2배로 격화된 것일까? 모든 경제주체가 해당한다. 국가, 산업, 기업, 지역, 개인 모두 해당한다. 국가끼리 경쟁도 2배가 됐고, 산업끼리 경쟁도 2배가 됐고, 기업끼리 경쟁도 2배가 됐고, 지역끼리 경쟁도 2배가 됐고, 개인끼리 경쟁도 2배가 됐다.
세계화가 좋건 싫건, ICT 혁명이 좋건 싫건, 서비스화 경향이 좋건 싫건, ‘고립된 자급자족 경제’로 살지 않으려면, 회피하고 싶어도 회피할 수 없는 ‘객관적, 구조적 환경변화’이다. 경제학 용어를 빌리면, 세계화, ICT 혁명, 서비스화 경향은 ‘객관적 외생변수’이다. 이런 경우 정치 지도자의 대응 방향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정신 승리’다. 현실의 변화를 외면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민족주의, 민중주의, 포퓰리즘, 인종주의, 종교적 갈등을 선동해서 (실재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가상의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 ‘객관적 환경변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객관적 환경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개혁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을 설득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국민적 설득과정은, 우리가 ‘가야 할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우리가 치러야 할 ‘희생의 내용’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희생을 부담해달라고’ 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위대한 정치가’가 갖춰야 하는 리더십의 본질은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설득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왜?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현재 세계에서 존재하는 정치 지도자의 대부분은 ‘정신승리 노선’을 걷는 중이다. 이는 과거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노선을 걸었던 나라들도 예외가 아니다. 혹은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는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변화된 환경변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나마 트럼프는 ‘변화한 환경변화’의 부분적인 측면을 가장 먼저 캐치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인간은 진화생물학적·뇌과학적으로 ‘손실에 민감하고 이익에 둔감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조직된 소수는 손실에 민감하고, 분산된 다수는 이익에 둔감하다. 우리 귀에 들리는 여론은 항상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조직된 소수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되고, 분산된 다수의 목소리는 과소대표된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동서고금을 막론한,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정치’가 ‘변화의 선두’에 서는 것은 마치 10억 명 중에 1명 꼴로 발굴된다는, 고대 인류의 화석을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통해 “단단한 널빤지를 아무리 개고생해서 뚫으려고 해도, 성과가 전혀 나오지 않아도 전혀 좌절하지 말고, 그럼에도 계속 뚫으려고 시도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미련 곰탱이 같은 인간들만 정치를 하라”고 조언했을까 싶다.
언젠가, 누군가, 마크롱과 유사한 선택을 할
물론 마크롱의 개혁이 성공할지 여부는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승리 정치 노선’이 대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거대한 근대의 변화’로 무장한 서구 세력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을 침략해왔을 때 ‘척화비’를 세워서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대원군, 고종, 성리학 세력들의 정치 노선과 일치한다. 조선이 몰락한 근본 원인은 ‘정신승리’를 통해, ‘근대적 제국주의 세력’의 공세에 맞서려 했던 것이다.
물론 마크롱 개혁의 디테일한 모든 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과한 것도 있고, 부족한 것도 있다. 그러나 ‘큰 방향’은 대체로 마크롱 노선이 옳다. 마크롱의 개혁노선은 부분적으로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와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변화된 환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019년은 1960–1970년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진보의 사회-경제 노선이 ‘대안적 노선’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1990년대 뒤늦게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노선을 ‘모방하기 시작한’ 정책적 대상은 1960–1970년대를 전성기로 하던 ‘옛날, 그때 그 시절의’ 복지국가에 불과하다.
한국은 유럽이 아니고, 2019년은 1960년대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안은 ICT 혁명, 세계화, 서비스화를 ‘객관적 외생 조건’으로 수용하되, 한국의 역사적 경로 의존성과 한국의 지리적-지경학적-지정학적 조건을 충분히 인정한, ‘2019년 한국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이어야만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실패할 확률이 높다.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가능성이 제일 높다. 심지어는 시도조차 안 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 ‘한국에서 성공하는 개혁’을 이뤄내는 위대한 정치인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마크롱과 유사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