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혼자 만들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 학계의 지배적인 학설이라지만, 그걸 혼자서 만들었다는 게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이 땅에는 김연아처럼 이상한 사람들이 간혹 튀어나옵니다.
1. 7급 공무원이 1급까지 급속 상승했던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은 정말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겪었습니다. 기껏 중앙관청에서 근무하는데 30대 후반에 상사를 인사 비리로 고발하지 않나, 지방으로 쫓겨갔는데 역시 상사를 군수품 횡령으로 고발하는 일을 저질러서 조직에서 찍히기 딱 좋은 내부고발자였습니다. 왕인 선조가 살려줬기 때문입니다. 2번이나.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승경도 놀이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분에게는 승진이나 파직이 ‘게임처럼’ 너무 드라마틱해서… 임진왜란이 가까워 오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승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승진이 너무 빨라 임지에 부임하러 가던 중에 승진을 또 시키니 삼사(감사원)에서 지적했을 정도.
하지만 그분의 승진이 받아들여진 건… ‘군인은 무식하다’라고 알려진 시대에 나름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문민 통제에 너무 목을 매다 보니 무식한 ‘원균도 용맹하다’라고 표현하니까).
그냥 장군인데 배도 만들고, 돈도 벌어오고, 보급로 구축도 할 줄 알고, 조선 왕조가 처음으로 만든 세계 최초의 제식화된 전투용 선박 판옥선이라든지 화약 무기를 이용한 학익진 같은 전투 교리도 만들 줄 알고, 훈련도 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전투도 잘한다는 건 죽기 몇 년 전에나 알려진 사실이고. 그분에게 충분한 병력이 주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전쟁의 신이 아닐까 싶었죠.
그래서 일본군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던 이순신이 어떤 일을 벌였냐면… 무지막지한 훈련을 통해 해전에서 ‘움직이기 힘든 배’를 가지고 학익진, 아니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일본군은 보자마자 도망쳐야 하는 게 맞습니다. 7년 기간의 전투 중 죽은 사람 약 200명보다 이순신 장군이 군기 위반으로 처형한 사람이 더 많으니까.
내 배에서는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잘 싸워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오전부터 오후 1시까지 4시간 넘게 1 대 133으로 혼자 싸웠고, 이순신이 탄 대장선에서 사망자 2명이란 사실을 이름 포함해서 일기에도 적었는데도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그 때문에 21세기 영화 〈명량〉마저 ‘조선 수군이 전투로 너무 많이 죽어’ 고증 오류(?)가 됩니다.
노량해전에선 레이더도 없고 노 젓고 바람 타느라 배의 위치 잡는 게 까다로운 시절 500여 척의 배를 가지고, 그것도 조명 연합군이니 말도 안 통하는 애들 데리고 야간 전투, 매복&기습&몰아가기 전투하느라… 아침 8시(!)에 돌아가셨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어이가 없을 정도.
먼치킨은 있습니다. 믿기 힘들지만 그런 건 존재합니다…
2. 세종어제훈민정음
책 첫문장에 대놓고 ‘나 혼자 만들었어’라고 이야기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다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달 착륙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 착륙의 증거 중 하나가 ‘사이가 끔찍하게 안 좋던 소련이 미국의 달착륙이 가짜라고 안 했다’라는 방법으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누가 만들었는지 추측하기 위해서는, 훈민정음의 정당성에 대해 세종대왕이 누구와 ‘아가리 파이팅’했는지 아셔야 합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오늘날로 치면 정년 보장되는 2급 공무원(정규직)이니 ‘늘 공무원’입니다. 집현전 대제학은 오늘날로 치면 1급 공무원(비정규직)인지라 오늘날 장관처럼 ‘어쩌다 공무원’입니다.
늘공이었던 최만리가 집현전 실질 업무를 책임지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살던 ‘세종대왕’ 시절은 은퇴 연령 지난 공직자, 대토지를 지닌 금수저 집안이라 일 안 해도 먹고살 만한 사람들을…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범죄를 저질러도, 비리를 저질러도 일할 능력이 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세종대왕 시절입니다.
전분육등(田分六等)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조세제도를 만들고 17만 호주들에게 투표하게 해서 과세한 건 이들을 갈아서 만든 조선 전기 행정력의 걸작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 그 때문에 이 시절의 집현전 부제학은 실무 능력이나 업무 장악력이 없었다기보단 ‘세종대왕이 인정한 당대 최고의 학자‘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에 이 사람 최만리, 조선 519년 동안 218명 나왔다는 정부인증 공식 ‘청백리’입니다. 중앙에 근무하는 2급 공무원인데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캐도 비리를 저지른 흔적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전례를 따지는 조선왕조에서 이런 신하하고 ‘논리’로 싸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냥 이 시절의 집현전은 불가침 지역(UNTOUCHABLE)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밑의 직원들은 꼬장꼬장한 아저씨(40대에 죽었으니…) 밑에서 머리 하얗게 되도록 시달리는 겁니다.
3. 그런 최만리가 훈민정음 프로젝트를 알고서 한 말?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 『조선왕조실록』
왕 앞에서 이런 말을 쓰는 건 정말 용감한 겁니다. 이 사람 목이 안 달아난 건 정말로 유능한 신하 및 공식 청백리라 가능한 겁니다. 이 말의 강도가 정말 궁금하면 회사 다니는 분들이 ~노프신~ 분께서 휴일에 등산하자고 할 때 사장실 찾아가서 “이런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일을 하냐”고 말해보시면 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왕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마 자신이 조선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텐데, 그런 세종대왕이 10년 넘게 직접 개발했음이 분명한 프로젝트를 아랫사람이 이렇게 깐다고 생각해보세요. 해고로 끝났다는 건 정말 많이 참은 겁니다… 이런 성깔 가진 책임자가 있는 집현전이라면, 공식적으로 훈민정음 개발에 참여한 인원은 없다고 여겨도 좋을 겁니다.
4. 세종대왕은 직접 개발했을까
실록은 참 좋은 게, 이런 의혹을 방대한 대사를 통해 알려줍니다.
설총이나 나나 백성을 편하게 하자는 것인데, 너는 감히 설총은 옳고 임금은 그르다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들이 운서(韻書: 어문학)를 알기나 하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 개더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그리고 새 문자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요약: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내 앞에서 아는 척하냐? 물론 세종대왕이 까는 대상이 조선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조직의 실무 책임자라는 건(대학교수 앞에서 ‘니가 뭘 알아’ 소리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최만리 죽고서, 정부 공식 인증 청백리에게 왕이 글 한 줄 안 써줬다는 게… 얼마나 삐졌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세종대왕은 언어학 덕후, 덕질 대상을 비판하면 죽을 때까지 원수진다.
5. 그럼 집현전 학사들은 뭘 했을까
이런 부하 데리고서 비밀 프로젝트 벌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했다고 봐도 됩니다. 5개 국어 하는 신숙주를 요동에 사는 언어학자에게 질의 문답하려고 보내는 등, 집현전 학자를 동원했다고 여겨지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외국어 발음 교정.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 입장에서 이건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게… 어떤 면에서는 표준어 제정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지역마다 지명을 읽는 법 같은 게 다른 건, 역사학자는 좋아할 변천사일지 몰라도 당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짜증 그 자체니까. 학문 기관인 집현전 입장에선 하는 게 당연한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굉장히 짧은 시간에 조선의 글말을 통일했습니다. 선비들, 아니 한국의 식자들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문어(文語)는 완성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도 한국 한자음은 99.9% 1자 1음입니다.
6. 훈민정음 창제 때, 언어학 덕후 느낌이 스며들어 벌어진 일
훈민정음 해례본은 각 글자의 발음 방법 및 음가를 기록해놓은 책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훈민정음을 높이 사거나 다른 언어를 표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음성기호로 쓰는 것이 세종대왕 개인적인 개발 목적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을 동원해서 동국정운을 만들었다는 건, 다음과 같은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 한반도 한정으로 지역/시대마다 다른 한자어 발음 멸종. (일본 DQN 네임이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몰라서 명함 돌리는 걸 보면…)
- 중세 동아시아 언어의 음가 추정 가능.
두 번째가 나름 재미있는데… 세종대왕은 덕후였고, 그 덕후스러운 집착으로 ’15세기 동아시아 지역 언어’의 음가를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다양한 버전의 외국어 교육서적이자 중세 한국어/일본어/중국어/몽골어 음가 추정을 돕는 자료, ‘조선의 외국어 교본’인 노걸대 언해본입니다.
해외 언어학자들이 알아서 한글날 기리는 이유가 바로 훈민정음과 한자 발음을 기록한 동국정운, 그리고 노걸대 때문입니다. 언어학/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하는데 누가 혓바닥 어디 굴리고, 입술 어떻게 움직이라고 발음 방법까지 기록해놓은 정석 책 던져줬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너무 형식주의에 매몰되어서 당대 학자들이 ‘이거 실제 발음하고 안 맞잖아’라고 열심히 까대기 시작했지만, 후대 학자들에게는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무시무시한 데이터일 뿐이라, 그냥 감사할 따름입니다.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노걸대 없었으면 알파벳도 아닌 ‘상형문자’가 유행인 이 동네 글자 발음 변화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을까. 일일이 문헌 뒤져가면서 ‘이 글자는 이 발음과 비슷하다더라’는 노가다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더 놀랄 일은 노걸대는 조선 역관들이 사용하는 외국어 학습 실무 교재였기 때문에, 시대별로 다른 판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만주어와 중국어의 발음 방법을 아는 데 정말 중요합니다. 명청 교체기에 4,000만 명이 죽어나면서 서로 발음 방법이 심각하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한국 한자음이 옛 한자 발음을 더 간직하니까.
그 때문에 2007년에 몽골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몽어 노걸대를 보고 갔습니다. 중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가 어떤 발음이었는지 파악하려면 노걸대를 안 보고 넘어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론
훈민정음 혼자 만든 거 맞습니다. 믿기 힘들지만 믿으셔야 합니다.
원문: 경민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