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이 글은 “고발뉴스 이상호의 도박, 그 사회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행됐으나, 필자의 요청으로 제목을 변경했습니다.
선의와 명예, 금전이 얽힌 이종인의 도박
논란에 빠져있던 다이빙 벨이 철수했다. 이종인 씨와 알파공사는 다이빙 벨의 성공이라는 것은 언론이 창작한 것이라 인터뷰했다. 그 와중에 이종인 씨의 발언이 논란이 되는 중이다. 이종인 씨가 인터뷰를 하던 와중, ‘사업하는 사람의 입장’ 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사실 상당한 실언이지만, 나는 이종인 씨의 의식의 흐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종인 씨는 도박을 한 것이다. 천안함 사건에서 이종인 씨의 주장은 내가 생각하기에 틀렸지만, 그것과는 전혀 별개로 말이다.
세월호가 침몰한 직후, 이종인 씨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경험과 장비가 이 사고에 활용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장비와 내 경험, 내 기술로 저 사람들을 구하겠다. 이 기회에 내가 저 실종자들을 구출하는 데 어필을 하자. 분명 나라면, 내 장비라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기회를 통해 전국민에게 내 능력을 알릴 수 있을 것이고, 정부기관과 업계 역시 내 진정한 가치를 알아줄 것이다. 그러니 이 일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라는 식이다.
만약 이종인 씨가 노후 대비 자금까지 털어서 이 일에 끼어들었다고 한다면, 그 행동의 반은 아마 이종인 씨의 비극에 대한 선의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고, 반은 이종인 씨의 표현을 빌리면 ‘사업하는 사람 입장으로서’ 찾아온 기회를 노리기 위한 일종의 투자금이다.
실패로 끝난 프로젝트 다이빙 벨
사실 이종인 씨는 내가 보기엔, 악의를 갖고 행동한 건 아니다. 단지 이 사고가 요구하는 일에 이종인 씨의 능력이 부족한데도 이종인 씨는 그것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약간의 공명심과 금전욕도 함께 존재했을 뿐이다. 사실 이런 대형 사고에서 최소한 여론의 중심에 선 이후라면 단순한 선의만 가지고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도박을 하듯이 무리하게 다이빙 벨의 유용성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이종인 씨가 이 도박에서 승리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종인 씨의 패인 역시 명확하다. 이종인 씨는 다이빙 벨이라는 유속에 취약하고 다른 전문가들이 가치를 회의적으로 본 다이빙 벨이라는 장비의 유용성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너무 높게 평가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여러 노하우를 이용하면 도박에서 이길 수 있다는 섣부른 확신을 가졌고, 세월호 사건에 집중된 언론의 관심을 이용해 판을 키웠다.
또한 해경이 그를 방해했다는 여러 주장들이 사실일 경우, 그에게는 그런 방해로 인해 낮아질 자신의 승률을 무시한 부분도 패인이 될 것이다. 해경과 언딘이 그를 방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두 집단의 추태 목록은 이미 길지만 거기에 또 커다란 추태가 추가될 일이다.
선의가 우선되는지 공명심과 명예욕이 우선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종인 씨의 행동을 단순히 전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보려다 망한 행위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종인 씨가 순수한 악의를 가진 사기꾼이었다면,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낮은 이 다이빙 벨을 통한 도박에 애초에 참여하지 않거나 아니면 적당히 출구전략을 선택했지 전국민 앞에서 실언을 하는 실수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종인 씨의 패인 역시 명확하다. 이종인 씨는 다이빙 벨이라는 유속에 취약하고 다른 전문가들이 가치를 회의적으로 본 다이빙 벨이라는 장비의 유용성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너무 높게 평가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여러 노하우를 이용하면 도박에서 이길 수 있다는 섣부른 확신을 가졌고, 세월호 사건에 집중된 언론의 관심을 이용해 판을 키웠다.
또한 해경이 그를 방해했다는 여러 주장들이 사실일 경우, 그에게는 그런 방해로 인해 낮아질 자신의 승률을 무시한 부분도 패인이 될 것이다. 해경과 언딘이 그를 방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두 집단의 추태 목록은 이미 길지만 거기에 또 커다란 추태가 추가될 일이다.
정치적 지향성을 건 대중의 도박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고 그는 도박에서 패배했다. 도박의 패자가 그랬듯이 이종인 씨는 허풍선이가 되었다. 또한 이종인 씨는 또다른 면에서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런 자신의 심리를 언론의 인터뷰에서 너무 ‘날것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종인 씨는 빨리 발을 빼든지, 아니면 최소한 언론에게 자신이 일정 부분 사업적인 계산을 가지고 참여했다는 코멘트를 따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이종인 씨가 선의로 했든 악의로 했든 그는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물론 이종인 씨는 이 도박을 위해 정부와 업계에 제대로 척을 졌으니, 현실적인 비즈니스에서 타격을 입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내 관점에서 자격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이종인 씨의 책임을 크게 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이종인 씨의 자신의 명예와 경력, ‘1억 5천만원’을 다이빙 벨에 건 도박이 단순히 이종인 씨 개인이 금전과 명예를 얻기 위해 슬롯머신을 돌린 것과 같은 도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종인 씨의 도박에는 해경으로 대표되는 정부가 반대편 참가자로 위치해 있으며, 정부는 이종인 씨가 패배하면 그쪽으로 관심을 집중시키고 태세를 정비할 수 있게 된다.
대중 역시 마찬가지다. 이종인 씨와 정부는 서로의 신뢰성과 명예, 약간의 돈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다. 각각을 지지하는 대중 역시 이 도박의 관전자가 아니라, 분명한 참가자이다. 단지 대중은 다른 걸 걸었다. 바로 정치적 자존심, 또는 자부심이다.
사실 정치는 원래 스포츠와 유사한 성질이 있으며, 다양한 이슈에서 ‘다이빙 벨’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소재는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다. 그러나 근본 이 다이빙 벨을 통해 펼쳐지는 정치적 도박의 세계, 특히 대중의 정치적 도박은 전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사실 추하기까지 하다.
애초에 중요 의제로 등장할 이유가 없는 다이빙 벨
다이빙 벨이라는 소재를 통해 얻고 싶어하는 결론은 다이빙 벨을 세월호가 침몰하고 얼마 안 되어서, 즉 생존자가 있었을 때 그것을 투입했으면 유용했느냐 아니냐에 관한 답이다. 절대로 다이빙 벨은 지금 쓸모가 있어서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다이빙 벨 자체는 시신을 수습하기에 유용한 장비이지만, 그것 자체가 현재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대중이 원하는 답은 1주일도 전에 이 장비를 투입하는 것이 옳았는지 아닌지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재로서는 얻을 수 없다. 그 시점에 해보지 못했는데 답이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단지 간접적으로 ‘유용했을 수도 있을 가능성’을 이종인 씨를 지지하는 대중이 정부를 더 지지하는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주장이 옳았고 정부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여주고, 상대방의 주장이 틀렸고 내가 옳았다는 자신의 정치적 자부심을 합리화하는 것이 이 다이빙 벨이 현 시점에 갖는 기본적인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자존심 내지 자부심은 누군가와 거래할 수 없으니 도박의 ‘칩’으로서는 부적절하다. 그것은 단지 스스로 만들어질 뿐이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이 다이빙 벨이라는 정치적 소망을 대리하는 도구를 통해 벌어진 포커의 결말이 어떻게 나든 승자는 패자에게서 뭔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승자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더 확신하게 되며, 패자라고 자존심을 잃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존심에 상처가 난다고 자존심을 버릴 수 없다. 오히려 온갖 종류의 이유를 통한 합리화로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옳지 못한 정보가 범람해서 큰일이라는 피해자 행세, 정부가 무능하고 해경이 부패하고 언딘이 악랄한 집단이라서(나는 이 말 자체는 맞다고 생각한다) 이종인 같은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책임 회피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오히려 상처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합리화 기제가 동원된다. 패자는 절대로 이 도박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초등학생의 판치기가 그렇듯, 돈을 들고 도망치거나 판을 엎는다. 사실상 이종인 씨와 그를 지지하던 대중이 패배했지만, 딱히 정부가 패배했다고 해서 이런 합리화가 패자에게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극단적으로 ‘일베충’이 다이빙 벨이 아주 쓸모있었다는 것이 반박의 여지없이 확인된다고 한들 대통령을 비판하기라도 할 것인가? 결국 패자라고 해서 뭔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회적 불신만을 낳은 다이빙 벨 논란
어차피 패배자가 패배를 인정할 건 아니었으니, 결국 남는 것은 더욱 강력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다.
이미 패한, 이상호 기자와 이종인 씨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경과 언딘을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와 비호하는 사람들을 더 크게 비난하고 있다. ‘다이빙 벨은 사실 본질이 아니다’ 같은 주장으로. 물론 그것 자체는 사실이나, 문제는 다이빙 벨이 진짜로 본질처럼 다루어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도박을 위한 카드로서 소모되었고, 거기서 사실상 패배한 일부 대중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이런 식의 회피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다이빙 벨이 상황에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이 도박에서 이종인 씨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마치 ‘선동에 속지 않고’ 승리한 듯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승리한 건 아무것도 없고 이 사건에서 뭔가가 진전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 사람들의 언행은 더욱 패자를 배려하지 않게 되며, 다이빙 벨을 떠나 다른 많은 정치화된, 또는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은 더더욱 강해지고 다른 문제에서 반대의 상황이 닥쳤을 경우 사리판단이 안 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결국 이 다이빙 벨을 통한 대중의 도박에서 아무도 이긴 사람은 없다. 단지 이긴 듯한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고, 진 기분을 다른 여러 이유로 벗어나려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사회적 불신과 적의의 총량만 더욱 커졌다.
이상한 구도: 다이빙 벨에 찬성하면 반정부 vs 반대하면 친정부
어차피 이 도박에서 대중은 이종인 씨와 같이 뭔가를 확고하게 얻거나 잃지 않는다. 단지 대중이 얻고 싶었던 건 상대방의 틀림에 대한 확증과 자신의 옳음에 대한 확신뿐이다. 비단 다이빙 벨 뿐만이 아니라 매우 많은 소재들이 정치화되고, 이런 식의 정치적 도박을 위한 카드로서 소모된다. 단지 다이빙 벨의 경우 애초에 구해야 할 사람은 전부 죽어있다는 점이 그 비극성을 증폭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 언론과 이상호다. 그들은 이를테면 게임의 딜러다. (물론 이상호는 여러 면에서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이종인이라는 도박꾼에게 베팅한 도박꾼인 셈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종인 씨와 정부의 생각을 전하고, 돌아가는 흐름을 기사화한다. 대중은 그 흐름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들이 뭔가 소식을 내는 순간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하고 갑론을박을 한다. 마치 카드를 분배하는 딜러처럼 그들은 소식을 분배한다.
다이빙 벨이라는 소재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적절한가 아닌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의 차원에서 벗어나 정치적 소망을 대리하는 포커 카드가 된다. 다이빙 벨에 찬성하면 정부에 부정적이며, 정부에 긍정적이면 다이빙 벨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룰이 세워진다. 언론과 이상호는 사실상 대립 관계이지만 이런 도박판에서 그들은 쌍방을 각각 맡아 딜러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청해진해운과 세월호에 존재했던 많은 잠재적인 사고의 가능성과 정부의 무능력함, 해경의 몰염치함, 대통령의 무책임함은 언론과 이상호에 의해 대중이 이 정치적 도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에너지로 변한다. 다이빙 벨이라는 소재를 통한 이종인 씨의 정치적 도박은 어느새 대중과 대중의 대결로 발전한다.
언론이 도박판을 흥하게 하는 법: 일단 다이빙 벨을 언급하기
언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누가 이기든, 언론은 이 게임이 진행되고 흥행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딜러는 게임을 관리해 돈을 버니까. 이종인 씨는 도박에 패배해 뭔가를 잃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다. 그들이 무슨 오보를 내든, 무슨 틀린 말을 하든.
물론 이종인 씨의 도박은 사기로도, 실패한 선의로도 비춰질 수 있다. 미묘한 문제다. 그러나 언론과 이상호는 이 딜러로서, 너무나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이 도박의 의미를 왜곡했다.
YTN은 이종인 씨가 마치 생존자 구출 자체를 전혀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저 자신을 PR하기 위해 나타났던 천하의 사기꾼인 것처럼 좋지 않은 면을 과장해 그가 유가족들을 배신한 것처럼 보도했으며, 이상호는 역으로 이종인 씨가 마치 아무런 공명심이 없었던 것처럼, 자신이 성공했을 경우의 해군과 해경의 체면을 생각해 공을 포기하고 물러난 성자인 것처럼 뻔뻔스럽게 묘사했다.
그들은 각각의 대중을 추동해 이 도박판을 흥하게 한다. 아무도 옳은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들의 행동은 명백한 기만이며, 사회에 해악을 끼쳤다. 언론은 늘상 있었던 것처럼, 이상호는 구당 김남수의 침술에 관한 보도와 국군의 방탄헬멧과 관련된 보도에서 그랬듯 태연하게 이번 일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왜곡을 저질렀다. 그리고 모두 진실과 정론을 전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다이빙 벨, 정작 중요한 이슈들을 가리다
다시 말하지만, 이종인 씨는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천안함 사태의 그의 의견과는 별개로 그는 이 사건에서 대단한 책임을 갖는다. 당사자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종인 씨가 거기에 적절한 대가를 치를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니 이종인 씨의 책임을 졸필로 물을 생각이 별로 없다.
오히려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이종인 씨의 다이빙 벨이 정치적 도박의 소재로 변질되면서 정부, 해경, 대통령, 언론 등 이 사회의 주요한 구성원들이 가진 문제가 편리하게 가려지는 것이다. 이종인 씨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종인 씨 개인이 아니라 ‘이종인 씨와 같은 사람’으로서 모든 이슈에서 저지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크게는 사회의 신뢰가 붕괴되고 담당 전문가가 가져야 할 권위가 무너진 데 있으며, 작게는 정부와 대통령, 이종인 씨의 공명심과 금전욕, 언론의 흥행을 찾는 배고픔이 벌인 것이다.이와 같은 정치적 도박이 가진 문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이 이슈를 도박으로서 다루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이종인 씨와 같은, 능력과 식견이 부족한 사람을 미리 걸러낼 수 있는 강력한 시스템이 존재해야 하며, 그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신뢰가 역시 같이 존재해야 한다.
동시에 언론이 특종을 찾아내는 것에 있어서도 정도가 있어야 할 것이며, 모든 종류의 보도에서 모든 종류의 기만은 단호히 척결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헛소리를 하고 그것을 퍼나르는 사람들도 문제의식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정치적 도박으로 사회적 비용만을 낳는 이상호
그러나 이 모두는 그저 말로 써놓으면 쉬운 일일 뿐, 현실에서는 너무나 어렵다. 이종인 씨의 도박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집단의 무능함과 무책임, 비도덕성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결국 다이빙 벨이 건져낸 건 생존자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무능력함과 추태 더미에 불과했다. 다이빙 벨은 구조에 도움이 되냐 안 되냐가 기본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비는 어느새 신뢰가 부족한 정부를 둘러싼 국민들의 도박 도구가 되어 있었고, 세월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대중의 대부분이 그 도박에 휩쓸려 있다. 나 역시 이 도박에 참여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재난을 해결하는 방식인가?
과연 대통령의 무책임함과 정부의 무능력함, 해경의 뻔뻔스러움, YTN을 포함한 언론의 끝없는 견강부회와 그 반동으로 탄생한 ‘이상호’는 이종인 씨 만큼이라도 뭔가를 잃을 것인가? 오히려 내가 보기엔 다이빙 벨을 대체할 또다른 소재가 우리를 아무런 의미없는 정치적 도박에 다시 끌어들일 것이다. 당장 지방선거와 재보선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결론을 낼 수는 없으나, 이런 현실에 대해서 사회 구성원이 생각을 해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이런 정치적 도박에 휩쓸리면서 언딘과 해경은 태연하게 자신들에게 제기되는 비판과 의혹제기로부터 빠져나왔고, 언론과 이상호는 그저 이 이슈를 너무나 잘 써먹었다.
그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 이종인 씨와 같은 자신의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과신해 도박을 하려는 사람을 걸러내는 일, 정부와 대통령이 재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일, 나아가 이 사회에서 신뢰를 되살리는 일은 모두 어렵고 추상적이며 지난한 일들이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이 무의미한 흐름에서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원문: 잉간 블로그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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