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을 좀 더 성숙한 신자,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은 핵심적 교회 리더로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제자훈련’이라고 한다. 명칭은 다양해서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제자훈련’이 교인들을 성숙하게 하는 필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서 지금도 많은 교회가 시행하고 있다. 대개 그런 제자훈련은 일반교인들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정교하고 빡빡한’ 훈련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제자훈련’의 효과가 과연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
정교하고 빡빡한 프로그램을 가진 제자훈련이 교인의 성숙과 훌륭한 제자들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대형교회에서 증명해 낼 수 있다.
제자훈련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랑의 교회’가 저 모양으로 굴러가는 데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훈련된 제자가 있나? 출판사 대표가 자기 맘대로 돈을 펑펑 써댄 ‘예수전도단’은? 목사가 성범죄를 저질러 다수의 여성도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삼일교회’는? 교회이름부터 ‘제자교회’라 표방한 교회는 수십억을 목사가 횡령해서 실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물론 대부분 담임목사 개인의 문제로 간단히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저런 교회에 성숙한 제자가 정말 많았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뭔가 내부적 자정 작용과 조치가 있지 않았을까? 한국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사고를 친 거의 모든 대형교회가 빡빡하고 정교한 제자훈련 프로그램과 선교와 양육 프로그램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좀 더 정교하고 실증적인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교회에서 운영되던 기존의 ‘제자훈련’에는 이런 약점들이 있는 것 같다.
제자를 단기간에 길러내겠다는 철학의 위험성
일정시간 단위로 짜여져 있는 정교하고 빡빡한 제자훈련 프로그램 자체에 ‘인간이 일정 시간 안에 이런 프로그램을 주입하고 훈련시키면 그대로 변하거나 성숙될 수 있다’는 아주 순진하기 짝이없고 어쩌면 무섭기까지한 기계적 인간관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다. 영화 ‘본’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을 길러내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그토록 단순한 존재인가?
하나님은 그걸 아시기에 성경을 주의 깊게 보면 한 사람을 인도하실 때 평생을 걸쳐 여러 가지 인생의 여정을 통해 사람을 다듬어 가셨던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결국 교회가 다양하고 정교해 보이는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단기간에 사람을 제자화 시키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어쩌면 하나님보다 더한 능력을 부릴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이 아닐까?
일상의 삶에서 제자로 살아가기, 그 지난한 과정
내 생각에는 차라리 지금보다 교회 프로그램이 훨씬 느슨해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정말 교회가 본질적으로 해야만 하는 아주 기본적인 활동(바른 말씀 선포, 건강한 교리와 신학교육, ‘교인 사랑’이 아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제와 나눔 등)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람의 성장과 변화는 인생 전체에 걸친 과정’이라는 철학 하에 ‘교회생활에 대한 충성이 곧 신앙성장’이라는 성도들의 착각을 깨뜨려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느슨하고 널널하나 분명한 철학을 갖고 그들이 일주일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과 가정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일까?
교회는 우선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이 총체적으로 ‘제자다운 인격과 삶’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교인 수 늘리는 것이 목적’이거나 ‘교회 행사에 열심히 헌신할 일군들 기르는 프로그램’으로 변질된 기존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 제자훈련의 바른 철학과 목적부터 정립해야 할 것이다. 순진하게 생각하듯이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거라면 전 국민의 1/4 가까이가 교회에 다니는 데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삶의 질’로 증명하는 존재들이지, ‘머릿수’로 증명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고 포기한다는 것이 교회에서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변화와 성장이 더딘 ‘일상적인 삶의 변화’보다는 캠퍼스나 외국에 나가서 ‘단기간에 화끈하게’ 한 사람이라도 더 꼬셔(?) 오는 걸 하나님 나라 확장이요 선교라고 생각하니까. 게다가 그렇게 널널하게 성도들을 내버려두면 각종 교회 프로그램 돌릴 사람이 없어지고 단기선교나 전도에 나갈 인원이 없어지니까.
삶으로 증명하기보다 제자훈련 이수로 증명하는 제자의 삶
그리고 무엇보다 단기 양육식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없애면 교인들한테도 인기가 없을 것이다. 교인들은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죄책감과 부채감을 ‘단기간에 화끈하게’ 헌신하는 걸로 ‘탕감’ 받기를 원하니까. 교인들은 구구절절 설명해주지 않아도 삶 전체가 제자답게 변하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고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것보단 6개월 DTS받거나 일주일 동안만 ‘선교지’에 선교 갔다 오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게다가 ‘무슨 무슨 DTS’ 받았다고 하면 삶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성숙한 제자로 다들 인정해주니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인정받기도 어려운 ‘진짜 삶으로 살아내는 것’보다 얼마나 쉽고 매력적인가?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기존 제자훈련의 약점을 극복할 대안은 무엇일까? 사실 기존의 제자훈련의 약점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신앙생활의 영역’을 ‘교회생활’로 축소시키며, 복음이 삶의 전 영역에 걸친 변화와 혁명을 가져온다는 통전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내세 지향적 영혼구원의 문제로만 복음을 왜곡시킨 영향이 가장 크다 하겠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번 글을 참조하시길: 오직 내세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과 윌리엄 윌버포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교회의 존재목적’이 건강한 신앙적 가치관을 가진 교인들을 ‘삶의 전 영역과 인생의 전 여정’에 걸쳐 얼마나 성숙하게 양성하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단기간에 교인수의 급격한 양적 증가가 곧 ‘교회다움의 과시요, 신앙적 승리’라는 잘못된 기준이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의식에 팽배한 점 또한 큰 원인인 것 같다. 그래서 교회의 양적 팽창에 헌신적인 일군들을 얼마나 단기간에 길러낼 수 있는지가 ‘목적’이 된 제자훈련 코스가 남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안과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제자훈련’의 목적부터 다시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점검하며 깊이 사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 중 중요한 개념들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한가지는 ‘신앙생활’이 곧 ‘교회생활’ 즉, ‘교회에서의 봉사생활’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 권사, 집사, 간사, 순장, 리더 할 것 없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가 곧 그 사람의 신앙적 성숙도와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장 여러분 주위에 어떤 직분을 맡고 있는 교인이 있다면 일주일에 교회를 얼마나 자주 나가는지 물어보라. 장담하건대 최소3일이상 나가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직장에서 뭔가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 사회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해야 하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3일이상 교회를 나간다면 그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가능성은? 물론 소수의 탁월한 절제력과 의지력이 있는 사람은 초인적인 의지와 능력을 발휘하고 밤잠 안 자가며 직장과 교회생활 모두를 탁월하게 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뿐더러 만일 그렇게 사는 것만이 올바른 제자로서의 삶이라고 한다면 교인 중 과연 몇%만이 제자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보수적이고 헌신적인 선교단체나 교회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렇게 어렵더라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부 그런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서 일상의 삶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고 교회에서도 일주일 내내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신화화된 제자의 삶은 결국 삶의 일상성이 휘발되어 버리고, 교회에 맹목적으로 헌신된 극소수의 사람들의 그릇된 자부심만을 키워주며, 결국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이 아니라 교회 안의 ‘슈퍼 히어로’들만 양성되는 교회문화를 낳고 있다.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모든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직장생활,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에서 ‘기독교인답게’사는 것이다. 이 당연하고 쉬운 진실을 기존의 ‘제자훈련’에 함몰된 사람들은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기존의 제자훈련 코스가 ‘교회생활에 헌신된 일군을 길러내는 것’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면 새로운 대안적 제자훈련은 ‘교인들의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것’에 포커스가 맞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초점을 변화시키는 것은 기존의 제자훈련보다 몇배나 더 어렵고 까다롭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신된 교회일군을 길러내는 것보다 더욱 성경을 깊이 있게 알아가며 복음의 통전적인 의미를 회복하고, 여러 가지 첨예한 가치판단이 요구되는 삶의 현장에서의 기준을 세워나가기 위해 훨씬 더 지성적으로도 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헌신된 교회일군을 길러내려면 상명하복의 순종의 미덕만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반지성적 기독교’가 도움이 되지만(가르치기도 훨씬 쉽고), 각자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려면 교인 각자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통전성과 가치관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만 하는 ‘지성적이고 깊이 있는 기독교’와 그런 기준에 부합하여 삶에서 실천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실천적이고 용기있는 기독교’가 모두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다. 일단 이런 걸 가르칠만한 목회자들의 수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목회자들 스스로 이런 교인들을 양성하는걸 좋아하지 않는다. 헌신되고 충성된 교인들을 길러내야 교회 운영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도움이 될뿐더러, 사사건건 따지지 않고 딴지 걸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반지성적 기독교인들을 길러내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쉬우니까.
게다가 교인들도 이런 지성적으로도 까다롭고 실천적으로도 어려운 제자훈련을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성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도 어렵고, 실천적으로 행하기도 매우 어려우니까. 이런 제자훈련을 받으면 룸살롱 접대도 받지 말아야 하고 관행적으로 주고받는 under table money도 받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비즈니스에 방해가 될 원칙을 배우고 행하느니 6개월 코스의 제자훈련을 받고 말지…
제자 된 삶은 단기간이 아니라 인생에 걸친 여정이다
‘제자훈련’이라는 말 자체에 왠지 ‘단기간에 훈련 받는 코스’를 의미하는 뉘앙스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부터 모순이 발생하는 것 같다. 제자로서의 삶은 단기간에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대안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단기간의 훈련이 유효할 수 없는 이유는 신앙인들 각자가 처한 상황도 다르고, 회심 이후의 신앙기간도 다를 뿐더러, 설사 같은 수준의 신앙인들을 모아 놓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배우는 속도가 각자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대안적 제자훈련은 신앙연차가 동일한 사람들을 그룹별로 모아놓고 (실존하지도 않는 가상의 피교육대상 표준 모델을 상정하여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표준 교육 모델’의 적용을 받아서는 안된다. 현재 전세계 교육현장에서 그 부작용을 인정받고 있는 표준 교육 모델이라는 것도 사실,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에 국민을 산업화에 동원하기 쉬운 유순한 노동자로 만들려는 획일화된 교육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대안적 제자훈련은 전인적인 교육이어야 하고, 각 사람의 수준에 맞는 교육이어야 하며, 무엇보다 장기간 곁에서 함께하고 교제하며 따를 수 있는 신앙모델을 본받는 도제식 교육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제도화되고 프로그램화된 커리큘럼은 최소화 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또한 신앙 연차 1년, 2년, 또는 간사나 리더가 되면 교육받아야 하는 이수과정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골라서 들을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와 훈련을 본인의 수준에 맞게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은 교회 자체적으로 모두 소화할 필요도 없다. 기독교 세계관이나 신앙이슈들을 가지고 외부인들을 적극적으로 균형있게 교육하고 있는 다양한 기독교 아카데미 기관들을 활용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전인적 교육, 수준에 맞는 교육, 도제식 교육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신앙선배의 삶을 곁에서 배우는 ‘전인적 교육’과 ‘도제식 교육’이다. 즉,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기독교인 선배들이 교회 내에 많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진행중인 제자훈련의 실제적인 삶의 모델을 누구로 상정하고 있는지 교인들에게 물어보라. 그럼 아마 대부분 그 모델은 제자훈련을 담당하는 목사거나 교회 내에서 존경하는 담임목사님 처럼 살고 싶다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어떻게 일반교인(평신도)의 삶의 모델이 ‘목사’가 될 수 있나? 자기 삶의 99%를 ‘기독교인만 상대하는’ 종교 전문직인 목사가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99%는 비신앙인들과 부딪치며 살고 있는 일반교인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순환논리에 빠지게 되는데 현장에서 제대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길러내지 못하면, 교회 내의 제자훈련 또한 ‘교회일군 양성소’로 전락할 뿐 삶의 현장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교회 중심 주의’의 블랙홀을 벗어나 교인들을 ‘삶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인들의 발길을 자꾸 교회로 향하게 하지 말고, 삶의 현장에 머무르며 일상적 삶의 영성을 회복하게 교회가 도와 주워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교인들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의 결핍과 초라한 모습을 위로해주고 보상해주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과 직분의 잔치상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목사들은 교인들을 자꾸 교회로 불러내서 장악력을 높이며 충성도를 끌어올려서 교인수 증가와 교회 프로그램 운영위원으로 자꾸 활용하려 한다.
교회가 주중에 좀 교인들의 왕래가 적더라도 (기도하러 교회에 오는 것을 제외하면) 삶의 현장에서 고민하고 부딪치며 대안을 모색하고 연구모임을 만들며 최대한 삶의 현장에 머물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교회 만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들을 대폭 줄일 필요가 있다.
매 절기마다 있는 각종 전도, 선교 프로그램, 제자양육 프로그램, 훈련 프로그램~ 더 나아가 주일날 저녁예배까지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온전한 주일 성수가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폭력적 주일성수’에 이르기까지 일반 교인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는 각종 잘못된 관행과 프로그램을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인들 또한 그런 풍성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교회 프로그램 중독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원래 친한 교인들끼리 주일마다 만나서 밤늦게까지 같이 예배 드리며 각종 행사를 진행하면 묘한 쾌감과 기쁨, 중독성까지 있다. 그리고 마치 내가 그렇게 교회 일에 열심을 부리는 순간만큼은 나의 허접한 신앙이 뜨겁게 헌신하는 신앙으로 거듭난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의 신앙을 불태우고 증명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당신이 속한 삶의 현장이다. 그러기 위해선 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점검하는 ‘고독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진정한 안식일의 회복’과 고독의 미덕
온종일 예배 드리고 찬양 드리고 친한 교우들과 웃고 떠든다고 신앙이 자라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건 그냥 어쩌면 어릴 적 소꿉놀이와 같은 ‘교회놀이’에 빠져있는 것이다. 당신은 교회놀이에 빠져있는 ‘교회 안에서만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삶의 현장에서 인정받는 진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진짜 신앙이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려면 개인의 영혼과 마음을 단련하는 ‘광야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분주한 프로그램을 빠져 나와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한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말은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명언이다.
‘목사들과 회중의 지도자들은 보통 주일을, 위원회, 회의, 프로젝트, 선교 그리고 사회 활동 등, 온갖 일로 채운다. 안식일의 고요함과 잠잠함을, 많이 일하기(much-doing) 와 많이 말하기(much-talking)로 대체시켜 버린다. 전형적으로 회중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이 사람들을 온전히 장악하는 때가 일주일에 단 하루, 그 중에서도 몇 시간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들의 영혼에도 좋고 교회에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 그들을 동원하고자 모의한다.
의도는 좋으나 완전히 잘못되었다. 이러한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회중이 주님을 위해서 너무 바쁜 나머지 주님을 위한 시간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게 할 뿐이고, 회중에게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준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기회를 뺏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잘 사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선 주일의 소란을 해치우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 위한 공동의 방법을 취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
고독을 일구어라. 침묵을 일구어라.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조언은 지난 20세기 동안 순종적이고 신실한 사명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 사람들이 말하는 조언의 핵심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내가 새롭게 할 말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긴급하게 말하고, 모세의 권위가 뒷받침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안식일을 지키라. 창조에 주의를 기울이라. 창조주를 흠모하라.’ [현실, 하나님의 세계] –(IVP, 유진 피터슨)- 중에서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아닌 ‘목수 예수’의 삶을 닮아가는 삶
더디고 힘들어도 일상의 삶에서 인격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참된 제자의 삶을 보는 것이 참 드물고 그리운 요즘이다. 진짜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그만큼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제자는 언제나 소수였고, 앞으로도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숫자로는 적은 사람들일지라도 교회는 ‘교회일군 기르기가 제자’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참된 제자들을 길러내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 열매의 혜택을 자신의 교회가 직접 누릴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한국 기독교가 진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많은 기독교인이 짧고 굵게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신 ‘메시아 예수님’의 삶보다 30년 동안 목수로 살아가신 평범한 ‘목수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야 할지 모른다.
wandtattooThere IS a Baltimore Fashion Sc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