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의 비밀’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이야기의 소재다. ‘당신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어!’, ‘결혼은 반대한다 왜냐면 저 아이는 병원에서 잃어버린 너의 친동생…’, ‘아임 유얼 파더’, ‘내가 3개월째 못살게 굴었던 신입이 회장님의 아들이었다니!’까지. 한 줄 한 줄이 충격과 공포다.
‘맥주에도 이런 출생의 비밀이 있다’고 말하면 나 같은 드라마 애호가들은 시나리오가 딱 그려진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맥주가 다른 환경에서 자라다가 적이 되어 만나게 되는…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렇다. 문제는 이 맥주가 미국을 대표하는 맥주 ‘버드와이저(Budweisser)’라는 것이겠지.
오늘 마시즘은 역사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두 맥주의 이야기를 전한다. 두 맥주 모두 이름은 ‘버드와이저’고 한 치의 양보도 해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미국을 대표하는 맥주, 버드와이저의 탄생
미국이 ‘아이폰’보다 ‘카우보이’가 더 떠오를 시절. 이곳은 원래 ‘맥주’보다는 ‘위스키’를 즐겨 마시는 나라였다. 위스키에서 ‘샷(Shot)’이라는 말 또한 카우보이들이 돈 대신에 총알 하나로 술값을 치른 데서 유래했다. 강한 술을 즐겨 마시는 이들에게 맥주는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 딱 한 무리, ‘독일계 이민자’들 빼고.
1857년, 미국 세인트루이스(독일계 미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로 이민을 온 ‘아돌프 부시(Adolphus Busch)’는 맥주 양조 설비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 나중엔 장인어른이 된 그의 고객 ‘애버하르트 앤호이저(Eberhard Anheuser)’를 만나 본격적인 맥주 사업을 시작했다. 버드와이저 이야기는 안 하고 딴소리냐고? 바로 이 둘이 버드와이저의 회사 ‘앤호이저-부시(둘의 앞글자를 따서 ‘AB인베브’)’를 만든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국 사람의 입맛을 공략할 맥주는 나오지 않았다. 1870년대 부시는 친구이자 주류 수입업자인 ‘카를 콘래드(Carl Conrad)’와 함께 유럽의 선진 맥주를 경험하러 떠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맥주는 체코의 보헤미아주 ‘체스케 부데요비체(České Budějovice)’라는 곳에서 만났다. 독일어로 말하면 부드와이스(Budweis). 부시는 이곳의 맥주 레시피를 가져와서 새로운 공법의 맥주를 만든다. 이름하여 ‘버드와이저(Budweiser)’다.
1876년 버드와이저가 생산 판매된다. 당시 미국 맥주들이 상할 것을 염려해 지역 안에서만 판매가 되었다면, 버드와이저는 맥주 운송을 위한 전용 기차와 지역별 얼음창고를 갖춰놓은 전국구 맥주였다. 또한 미국 주류의 암흑기인 금주법마저도 견뎌내니(무알코올 맥주를 팔았다고) 경쟁자들이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승승장구. 버드와이저는 코카콜라, 말보로와 함께 미국을 상징하는 3대 기호식품 반열에 오른다. 미국 시장은 이제 버드와이저가 통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맥주의 왕(King of beer)’이라는 별명을 얻은 버드와이저. 이제 남은 것은 해외진출뿐인가!
… 는 무슨, 체코에 600년 전부터 버드와이저가 있었는데
미국을 대표하는 맥주의 이름이 체코의 지방도시 이름이라니. 당사자인 ‘체스케 부데요비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 새로운 술 열풍이 일어났는데 그 이름이 ‘장수막걸리’인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실제 체스케 부데요비체에는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Budejovicky Budvar)’라는 양조장이 있다. 독일어로는 ‘부드바이저 부드바르(Budweiser Budvar)’. 단순히 동네 이름을 붙인 맥주가 아니라 체코 내 맥주 판매량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유명한 맥주(체코는 1인당 술 소비량이 가장 많은 국가다)이다.
그 역사로 따지면 13세기 ‘보헤미아 왕국(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로 분리)’시대부터였다. 체스케 부데요비체 지역은 맥주로 유명한 곳이고, 1351년에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실 양조장으로 쓰이기까지 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생산된 맥주는 신성 로마제국에서 ‘부드바이저’라고 불려 왔다.
1795년에는 독일어를 하는 시민들이 모여 ‘시민 양조장’이라고 불리는 ‘부드바이저 비어 버거브로이(Budweiser Bier Bürgerbräu)’를 설립했다. 1895년에는 ‘시민 양조장’과 ‘합동 양조장’이 합쳐져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라는 국영기업으로 변한다. 많은 체코 맥주가 글로벌 대기업의 자본에 넘어갔지만,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만은 시민이 만들었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자존심 같은 맥주였다.
무려 600년이 넘는 맥주 경력!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세계화 시대에 맞춰 체코를 넘어 유럽을 정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웬 빨간색 디자인의 맥주가 우리 동네 이름을 쓰는 거지?
버드와이저 vs. 버드와이저, 도플갱어 같은 맥주의 소송전
미국과 체코, 각자의 동네에서 잘 나가던 두 맥주는 1990년대부터 삐끗거리기 시작한다. 바로 ‘수출’ 때문이다. 버드와이저를 만드는 ‘앤호이저 부시’는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와 상표권과 관련해서 협약을 맺으려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거절이었다.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장 맥주 레시피를 가져간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쓰는 버드와이저가 탐탁지 않았거든.
결국 두 맥주는 유럽 곳곳에서 부딪혔다. 1996년 앤호이저 부시가 ‘버드와이저’라는 이름을 유럽위원회에 등록했는데,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때문에 논쟁이 일어났다. 특히 체코와 가까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버드와이저’는 오직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뿐이었다.
이러니 독일에서 ‘버드와이저’를 달라고 하면 체코 맥주가 나오고, 아일랜드에서 ‘버드와이저’를 달라고 하면 미국 맥주가 나오는 수순이었다(반대로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미국에서 ‘체크바르’라고 판매된다).
‘버드와이저’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셈이다. 생산량이 자신들의 1%도 안 되는 맥주 때문에 유럽의 몇몇 국가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Bud’로 개명을 당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체코가 EU 회원국이 되면서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의 쪽에 손을 드는 국가들이 많아졌다.
2007년 기준으로 20여 개국에서 86건의 상표권 분쟁을 분석했을 때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가 69번, 앤호이저 부시가 12번 승소했다. 5번은 무승부였다. 그리고 여전히 40여 건의 상표권 분쟁이 진행 중이다.
월드컵을 후원하는데 왜 버드와이저를 말하지 못하니
물론 이런 분쟁에도 ‘버드와이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다. 1986년부터는 월드컵 스폰서로 참가하였고, 1998년에는 8,000만 달러를 내고 2002년 월드컵과 2006년 월드컵의 독점적 맥주 판매권을 얻기도 했다. 문제는 2006년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린다는 것이고, 이곳은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가 ‘버드와이저’란 이름으로 팔리는 곳이라는 것이다.
앤호이저 부시는 ‘버드와이저’란 이름을 독일에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처럼 ‘버드(Bud)’라는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다. 문제는 독일의 대중맥주 중 하나인 ‘비트부르거(Bitburger)’의 별칭이 ‘비트(bit)’라는 것이다. 독일 법원 역시 ‘비트’와 ‘버드’가 너무 비슷하다며 독일에서 버드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문제제기를 피해 지어진 이름은 ‘앤호이저 부시 버드(Anheuser-Busch Bud)’.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맥주 이름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버드와이저가 아니다. 앤호이저 부시는 월드컵 독점 판매권한을 포기하고 비트부르거와 함께 맥주를 판매할 것을 제안했다. 대신 경기장 광고판에 ‘버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비트부르거는 승낙했다. 아니, 이름 텃세(?)를 부린 덕분에 월드컵에서 판매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버드와이저에게도 좋은 선택이었다. 맥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독일인들에게 경기장에서 버드와이저만 마시게 하는 것보다는, 월드컵을 즐기는 전 세계 팬들에게 버드와이저의 브랜드를 알리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버드와이저와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한국에서는 사이좋게 지내렴
수입맥주의 메카(?) 한국에서는 이 두 맥주를 모두 만날 수 있다. 버드와이저는 어떤 매장을 가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고,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마트의 수입맥주 코너나 미니스톱 등의 편의점에서 만날 수 있다.
아돌프 부시가 ‘버드와이저’를 만든지도 130년이 지났다. 이제 두 맥주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맥주라고 볼 수 있다. 버드와이저는 쌀이나 옥수수를 넣는 미국식 부산물 라거(American Adjunct Lager) 스타일을 만들었다. 시원하고, 연하고, 달달하다. 반면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시큼한 듯 씁쓸한 필스너(Czech Pilsener)의 느낌을 간직했다.
여전히 두 버드와이저는 치열한 이름 전쟁을 벌인다. 사실 마시는 입장(특히 두 맥주를 모두 판매하는 한국)에서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 다만 우리가 마실 것들의 이름 하나에도 많은 출생의 비밀과 생존전략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 정도랄까? 오늘은 마트에 들러 버드와이저를 사야겠다. 물론 나는 버드와이저,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둘 다.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독일 월드컵은 ‘맥주 전쟁’, 임지수, 머니투데이, 2006.4.24
- [지재권] 버드와이저 상표분쟁 관련 유럽사법재판소 판결, 주EU대사간, 2011.9.28
- 버드와이저-부드바 ‘100년 브랜드 전쟁’ 막 내리나, 이향휘, 매일경제, 2003.12.2
- ‘맥주의 황제, 앤호이저 부쉬’, 신동욱, 한국경제, 2000.5.29
- 버드와이저 100년 전쟁, Designmap
- 체코맥주에서 배운다-(2)버드와이저 부드바르, 고대로, 한라일보, 2013.7.22
- “우리가 원조 버드와이저”, 강승민, 중앙일보, 2005.5.10
- 버드와이저의 아버지 아돌푸스 부시, Maclaude, 맥아당, 2018.3.27
- 버드와이저의 원조, 체코의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날마다 좋은 하루, 2019.1.6
- Where a Budweiser Isn’t Allowed to Be a Budweiser, Benjamin Cunningham, TIME, 2014.1.27
- Budvar wins out against US brewer over Budweiser name, Arthur Beesley 2010.6.30, THE IRISH TIMES
- A Timeline of the Epic Budweiser Trademark Dispute, Namewarden, 2016.11.17
- Budweiser is battling to be called Budweiser in more than 20 countries, Roberto A. Ferdman, 2013.10.9, QUAR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