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리 피사노와 윌리 시의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지식노마드)를 봤다. 제조업의 중요성, 쇠퇴 원인, 대안을 다룬다. 약 200페이지 분량의 얇은 책이다. 내용도 쉬운 편이다. ‘지식노마드’는 이정동 교수의 『축적의 시간』과 『축적의 길』을 낸 출판사다. ‘제조업 정책 담론’의 활성화를 위해 출판한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전체를 통틀어 ‘독창적인’ 논지라고 생각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① 산업공유지 개념, ② 설계와 제조의 분리 여부에 관한 판단기준으로 제시하는 모듈화×성숙도 사분면 매트릭스다. 총평을 하자면 분석과 대안이 만족스럽진 않았다. 미국 제조업 쇠퇴의 분석도 다소 미흡했고, 대안 제시도 ‘소박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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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공유지는 상호의존성 + 지리적 근접성 개념이 결합한 것이다. 상호의존성은 흔히 전후방 연관 효과 혹은 (레온티에프가 만든) 산업연관표에서 이야기하는 ‘산업유발계수’와 사실상 같은 개념이다. 다만 ‘지역적 인접성’(집적효과, 클러스터 효과)가 결합한 것이다.
20세기 자본주의에서 전후방 연관 효과가 큰 대표적인 산업은 자동차 산업이다. 이 말은 거꾸로, 특정 지역의 자동차 산업이 망하게 되면 전후방 소멸 효과가 크게 작동한다는 말과 같다. 결국 산업공유지는 ‘지역과 링크되어 작동하는’ 전후방연관 효과(=전후방 소멸 효과)와 같은 말이다.
책 전체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설계와 제조의 분리 기준이다. 저자들은 모듈화와 성숙도의 사분면 매트릭스를 제시한다. 모듈화 수준의 높음/낮음, 성숙도 수준의 높음/낮음을 결합한 것이다. 즉 ① 모듈화 높고+성숙도 높은 경우, ② 모듈화 높고+성숙도 낮은 경우, ③ 모듈화 낮고+성숙도 높은 경우, ④모듈화 낮고+성숙도 낮은 경우다.
저자들은 설계와 제조를 무조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경우에 떨어져도 되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 해외이전이 정당화될까? 위 구분법에 의하면 ①과 ②는 ‘거리’가 떨어져도 무방하다. 해외이전도 무방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듈화 수준이다.
‘모듈화’는 생산 공정에서 암묵지(暗黙知)를 형식지(形式知)로 바꾸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듈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현대자동차’다. 현대자동차는 모듈화 수준을 높여, 해외 이전을 통한 글로벌 생산체계를 효과적으로 만든 대표적인 사례다.
개리 피사노와 윌리 시의 모듈화×성숙도 사분면 매트릭스는 리처드 볼드윈이 『거대한 수렴』에서 제시한 긍정적 확산 효과×이동성, 사분면 매트릭스와도 비교할만하다. 확산 효과와 이동성의 사분면 매트릭스는 경쟁 우위와 부가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지표였다.
모듈화×성숙도 매트릭스을 보며 추가로 생각해볼 지점은 낙수효과 부분이다. 낙수효과가 사라졌다는 표현은 부적절하고, 일국적 낙수효과로 작동하는지 글로벌 낙수효과로 작동하는지로 봐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한국 자동차 산업의 경우 상대적으로 일국적 낙수효과가 작동되는 편이다(물론 모듈화 수준이 높아져서 해외에서 생산되는 비중이 더 크다). 반면 반도체 산업의 경우 상대적으로 글로벌 낙수효과가 작동한다. 여기서 유의할 부분은 ‘일국적 낙수효과’가 바람직할지, ‘글로벌 낙수효과’가 바람직할지를 논의하는 것은 공허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왜? 시장 구조의 제약조건에서 선택한 최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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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미국 산업공유지의 흥망’은 미국 제조업의 쇠퇴 과정을 다룬다. 책 전체에서 본론에 해당한다.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다고 강조하며 3가지가 작동했다고 분석한다. ① 정부 정책, ② 기업 경영 차원의 선택, ③ 외부적 상황이다.
정부 정책의 경우 R&D 예산의 축소, 응용과학 분야 예산 감소, 물리학-공학 분야 예산 감소 등을 사례로 든다. 기업 차원의 선택은 ‘아웃소싱’과 ‘해외이전’이다. 그러니까 저자들은 정부 정책, 기업 경영 행태, 외부 요인을 미국 제조업 쇠퇴의 3대 요인으로 짚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현상-결과적’ 측면에 불과하다. 진짜 원인을 비껴간다.
미국 제조업의 쇠퇴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핵심은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가세하면서 15억 명의 추가적인 노동력이 세계시장에 편입된 것이다.
리처드 프리먼은 거대한 2배(Great Doubling), 리처드 볼드윈은 거대한 수렴(Great Convergence),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코끼리 곡선’으로 표현했다. 세 가지는 같은 사건을 각각 다른 지점에서 표현했을 뿐이다. 실제로는 1990년대 발생한 3가지 사건이 미국 제조업 쇠퇴에 영향을 미친다.
- 첫째,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로 인해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을 포함한 15억 명의 노동력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추가로 편입된다. 선진국 제조업은 이들과 추가로 경쟁하게 됐다. 동시에 세계 교역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된다.
- 둘째, ICT 혁명이 일어났다. 이 부분은 리처드 볼드윈이 『거대한 수렴』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공산주의 붕괴로 인해 15억 명의 노동자가 추가로 편입된 것이 ‘필요조건’이었다면, ICT 기술 혁명은 ‘충분조건’으로 작동한다. 미국에서는 R&D하고 해외에서는 제조하는 설계/제조 분리는 ICT 기술의 뒷받침이 있기에 가능했다.
- 셋째, 체제 경쟁의 승리와 냉전의 해체로 인해, 미국에서는 ‘우주항공-물리학 분야’의 지원을 감소하라는 사회적-정치적 압박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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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의 저자들은 과학기술 지원 축소에 ‘정부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비판이 다소 비겁하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정부가 과학기술, 응용과학, 물리학-공학 분야에 엄청난 예산지원을 했던 이유는 냉전시기 소련과의 체제 경쟁 때문이었다. 미국의 항공산업, 우주산업, 기초과학, 인터넷, 통신은 모두 ‘전쟁’을 계기로 발전한 산업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항공 산업’이,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비행기, 레이더, 통신, 헬리콥터, 원자폭탄, 물리학 등이 발달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소련과 냉전적 체제경쟁 때문에 과학 분야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는다. 1957년에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하고, 1961년에 소련이 유리 가가린이 탑승한 유인 우주선을 최초로 성공한다. 두 가지 사건은 미국에게 충격, 당혹감, 두려움을 준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과정을 다룬 영화 〈퍼스트맨〉에 잘 나와 있다.)
루스슈워치 코완의 『미국 기술의 사회사』(궁리)는 미국 기술사-산업사를 다루는 책이다. “12장. 납세자, 장군, 항공술” 파트는 미국의 냉전기 군산‘학’ 복합체를 다룬다. 1964년의 경우, 미국의 ‘모든 과학자와 엔지니어’ 중 3/5은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1990년대 한국의 진보 운동권들이 미국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던 ‘군산복합체’는 소련과의 체제경쟁 때문에 지출되던 재정-예산 지원을 ‘과장한’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한다.
미국 사회운동과 냉전의 해체가 미국 과학기술 예산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지, 『미국 기술의 사회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다양하게 나타난 반전운동,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경제를 쇠약하게 만든 인플레이션, 냉전의 종식 등은 모두 이런저런 방식으로 NASA에 불던 순풍을 앗아갔다. NASA의 예산은 여러 차례 되풀이해 삭감되었고, 미국의 연구 노력 중 많은 부분은 항공학에서 의학 쪽으로 이전되었다. 군산학복합체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미국 경제와 과학기술 공동체 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많은 부분 상실했다.
- 『미국 기술의 사회사』, 451쪽
즉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의 저자들이 응용과학 지원예산의 감소, 물리학-공학 지원예산의 감소라고 지적한 것들은 모두 정부 정책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냉전의 해체로 인한 시민사회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기술의 사회사』, 43–44쪽, 121–124쪽)
①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인해 15억 명 노동력의 추가, ② ICT 기술혁명으로 인한 설계/제조 공간적 분리의 용이함, ③ 냉전의 해체로 인한 항공우주-물리학-응용 지원의 사회적 정당성 약화가 맞물려서, 미국 정부의 ‘과학기술 지원예산’이 줄어든 것으로 봐야 한다.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을 포함해서 15억 명 노동력의 추가 편입은 어떤 환경변화를 초래하게 되는가? 저자들은 3가지를 꼽는다.
- 첫째, 경쟁 격화다. 역량 강화 정책은 과거보다 더 중요해졌다.
- 둘째, 미국이 가졌던 시장 규모의 독보성이 위협받게 되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무릎’을 치게 만들었던 부분이다. 미국의 독보적인 장점 중 하나는 ‘독보적인 마켓 사이즈’다. 그런데 특히 중국은 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 셋째, 원래도 독일, 일본, 한국, 대만은 R&D 투자를 활발하게 하는데, 중국 역시 가세한다. 기술개발을 위해 투자하는 금액이 미국보다 많아지는 분야가 늘어났다.
저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① 인프라 투자, ② 인적 자원 투자다.
- 인프라 투자의 일환으로 강조하는 것은 응용과학 및 물리학-공학 분야의 정부 지원 확대, 저축과 투자를 장려하는 세제 개혁과 정부의 효과적인 계획 수립이다.
- 인적 자원 투자의 일환으로 강조하는 것은 K-12 교육 대폭 개선,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의 학부 및 대학원 장학금 확대다.
인프라 투자, 인적 자원 투자 모두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대안의 정합성도 타당하다.
정리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는 ‘한국 제조업 위기’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역과 링크된) 산업공유지 개념으로 문제 제기를 해놓고, 대안은 (지역과 무관한) 재정지원 확대로 끝나버린 감이 있다.
한국 제조업의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추격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서울대 경제학과 이근 교수의 『경제추격론의 재창조』(오래)에 의하면 ① 저소득 국가에서 중소득 국가로 이행하는 경제 정책, ② 중소득 국가에서 고소득 국가로 이행하는 경제 정책을 구분한다.
②의 경우 가장 중요한 정책은 고등교육과 R&D다. 고등교육은 대학 및 대학원, 즉 석사와 박사들의 경쟁력 강화를 의미한다. 한편 산업공유지 개념을 고려해 ‘지역과 링크된’ 집적의 경제학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결국 제조업 활성화 전략의 핵심은 제조업 ‘도시’ 활성화 전략이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정책수단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초광역 행정도시(=MEGA 시티)가 중요하다. 예컨대, 부산-울산-경남의 ‘단일 행정도시’를 만들 수 있도록 법제를 개편해야 한다.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조세권의 일부, 입법권의 일부를 광역지자체에 양도 가능한 방식으로 ‘유도’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의 취지 중 하나로 말했던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자치’의 취지에도 맞는다. (헌법 개정과 무관하게 법률로 추진 가능하다.)
둘째, 부울경 초광역 행정도시가 만들어질 경우 인구는 약 1,000만 명이 된다. 거제-창원-부산-울산-포항(거창부울포)가 광역단위, 클러스터로 작동할 수 있도록 거창부울포 GTX를 만들 필요가 있다.
양승훈 교수는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오월의봄)에서 거제를 ‘젊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도시라고 했는데, 시야를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젊은 여성들을 거제로 보내는 방법이 아니라, ‘거제에 살든, 창원에 살든’ 젊은 여성이 다른 지역 생활권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 된다. 그 방법 중 하나는 공간을 압축하는 것이고, 공간을 압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창부울포 GTX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균형 발전’ 관점에서도 바람직하다. 균형 발전은 전국을 1/N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서울집중을 막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집중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울에 버금가는’ 지역 클러스터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그에 가장 근접한 동네는 ‘부울경’이다.
셋째, 부울경 대학, 대학원을 대폭 지원해야 한다. ‘제조’의 경쟁력은 ‘설계-연구 역량’과 결합하는 것이다. 현장경험 있는 사람들은 이론을 배우고, 이론을 아는 사람들은 현장을 접하도록 해줘야 한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밀집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즉 ‘집적의 경제학’ 혹은 ‘지역 클러스터’다.
거제-창원-부산-울산-포항이 동일한 생활권의 산업 클러스터가 될 수 있도록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그러자면 ① 초광역 행정도시가 용이하도록 법제를 정비하고, ② ‘거제-창원-부산-울산-포항’을 잇는 GTX를 추진하고, ③ 부울경 지역에 있는 대학/대학원의 경쟁력이 강화될 수 있도록 포항공대, 부산대, 울산대, 경상대 등의 지원을 파격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