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승훈 교수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드디어 봤다. 320쪽,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체감 분량은 250쪽 정도에 가깝다. 판형이 작고 주간지-월간지처럼 르포형 서술이기에 쉽게 읽힌다. 내용을 볼 때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업에 관한 문화 사회학에 가까운 책이다. 저자 생각인지 편집자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공업 가족’ 및 ‘산업도시 거제’를 부각한 출판 전략은 매우 적절했다.
양승훈 교수는 거제 대우조선에서 5년간 근무했고, 학부는 정치학, 대학원은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 책 내용에도 ① 거제, ② 대우조선(조선업), ③ 정치(사회학), ④ 문화인류학이 녹아 있다. 양승훈 교수의 인문-사회과학적 이력 덕택에 우리는 조선업-거제-중공업 가족에 대한 ‘인문학적 관점’의 책을 접하게 됐다. 혹자의 말처럼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책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제조업과 산업도시 거제를 다룬다. 2장은 작업장 엔지니어와 랩실 엔지니어의 이질성을 매개로 ‘해양 플랜트’ 분야의 실패를 주로 다룬다. 3장은 조선업의 미래를 다룬다. 3장은 약간 중복되는 감이 있다. 책 자체는 문화적-사회학적인 내용 중심이다.
큰 틀로 보면 산업도시 거제의 포용과 배제를 비중 있게 다룬다. 포용은 ‘민주노조’로 대표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배제는 사내하청(비정규직), 여성들, 하청 노동자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유익했던 부분은 일본 조선업의 오판 및 쇠락, 한국 조선업의 성장, 그리고 한국 조선업이 위기에 봉착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한마디로 글로벌 경기 변동과 한국 조선업의 흥망성쇠에 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책에서 집중적으로,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책 전반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고 내가 원래 알던 내용을 덧붙여, 조선업의 세계적인 주도권 변화, 글로벌 경기 변동과 한국 조선업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책 내용을 정리해본다.
2.
초기 조선업의 강자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강선 건조에서 특히 강했다. 이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북유럽 3국이 ‘상대적 저임금’을 기반으로 영국과 경쟁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이 (유럽에 비해) 상대적 저임금과 기술혁신을 통해 주도권을 가져왔다. 일본의 기술혁신은 크게 3가지로 집약된다.
- 영국을 포함해서 유럽의 경우, ‘리벳’이라는 나사를 통해 강판을 조였다. 일본은 용접을 통해 강판을 조립하는 기술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 일본은 대형 도크장에서 크레인을 사용해서 탑재하는 방식을 썼다. 공정 속도가 빨라지고 효율성이 높아졌다.
- 미세 작업 분류를 도입하여, 도요타 생산방식으로 불리는 적기납기 방식(JIT, Just-in-Time)을 도입했다.
3.
1970–1990년대 초반까지, 조선 산업은 장기적인 침체 국면을 맞는다.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985년 미국-일본의 엔화 환율을 조정한 플라자 합의도 일본 조선업의 ‘수출 경쟁력’에 타격을 줬을 것이다.
일본 조선업 입장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오르고, 젊은 엔지니어들은 점차 ‘지방’에서 일하는 것을 꺼린다. 예컨대 도쿄대학교 조선공학과 지원율은 급감하고, 조선공학과 자체가 폐지되는 대학이 늘어난다. 교역량은 늘어나지 않고, 신규 선박 발주는 20년 수명을 채운 기존 선박들을 해체할 때 발생하는 생기는 ‘기본 수요’에 불과했다.
1970년 약 20%에서 1980년 초까지 교역량이 약 35% 수준까지 증가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다시 27% 수준으로 감소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 별다른 변화가 없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세계교역량이 정체기였기에, 일본은 조선업을 점진적 사양산업으로 판단하고, 2가지 대응을 한다.
- 중소형 선박의 ‘표준화’를 통해 비용 절감을 시도한다.
- 조선업체들을 통폐합한다.
일본이 조선업 다이어트를 시작할 때 한국은 정반대 선택을 한다. 엄청난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다. 책에서도 간략히 언급하지만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화 전략이 추진된다.
한국 조선업을 대표하는 빅3 회사의 설립연도가 흥미롭다. 현대중공업 1972년, 대우조선 1973년(당시는 대한조선공사), 1974년 삼성중공업(고려조선소 인수)이다. 흥미로운 것은 1973년에 만들어진 대한조선공사는 당시에 세계 최대 규모였다는 점이다. 마치 포항제철을 만들 때부터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들었던 것처럼, 조선업에서도 당장 수요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먼 미래를 내다보고,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들었다.
여기서 일본 조선업계는 왜 대규모 투자를 못 했고, 한국 조선업은 왜 대규모 투자가 가능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조선업계는 건설하는데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큰 도크를 지었다가 일감이 줄어들면 산업을 지탱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285쪽). 일본 조선업의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 합리적 판단이었다.
반면 한국은 ‘비합리적’ 판단을 했다. 이 지점에서 한국 조선업을 대표하는 빅3 회사의 설립 연도가 1972년(현대중공업), 1973년(대우조선), 1974년(삼성중공업)으로 몰려 있는지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발표한다. 그리고 1973년 1월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한다.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것은 1960년대 말–1970년 초반 ‘안보위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하고 유럽에서는 68혁명, 미국 본토에서는 베트남 반전운동, 급진주의 학생운동, 흑인 민권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베트남 철수’와 ‘군비축소’를 주요 공약으로 당선되고, 그 연장에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중국과 핑퐁 외교를 추진한다. 한국에서는 그 연장에서 실제로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한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까지 주한미군의 전면철수를 시사한다.
1960–1970년대 초반 동남아시아는 공산화 도미노가 일고, 전 세계적으로는 ‘좌파’의 기운이 강해지고, 여전히 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막강한데, 주한미군은 전면철수할 조짐을 보이던 시절이다.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도, 유신도 그 연장에서 추진된다. 박정희는 안보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자주국방을 추진했고, 자주국방의 연장에서 방위산업을 추진했고, 방위산업의 연장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다.
즉, 주한미군 전면 철수 가능성 → 안보위기 → 자주국방(핵 개발 포함) → 방위산업 육성 → 중화학 공업화 추진 →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초강력 ‘관치금융’ 동원 → 조선업의 공격적-대규모 설비투자 실시의 메커니즘이었다.
4.
1970–1980년대까지 대규모 설비투자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한국 조선업은 일본과 다른 기술혁신을 한다. 기술혁신의 내용은 ① 세계 최대 규모의 도크를 짓고, ② 공법 차원에서 블록 대형화와 모듈화를 추진하고, ③ 자동화와 기계화를 통해 도크 회전율을 높이고, ④ 플로팅 도크(Floating Dock, 부유식 도크) 개발에도 성공한다. 플로팅 도크는 바다의 선대(도크)에서 배를 건조하고, 선대를 바다로 가라앉혀 배를 진수시키는 방법이다(278–286쪽).
일본 조선업은 ‘수익성’이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대형화 추진을 거부하고, 중소형 선박의 표준화를 추진했다. 반면 한국 조선업은 ‘극단적 수준’의, 즉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를 추진했다. 한국 조선업의 투자는 분명 ‘비합리적인, 과잉투자’의 성격으로 볼 여지가 많았다. 그런데 한국 조선업에게는 행운(幸運)이 따랐다. 1989–1991년에 걸쳐 동독, 동유럽, 소련이 연이어 붕괴하고, 중국은 등소평의 1992년 남순강화를 기점으로 ‘개혁개방 노선’이 확고한 주도권을 잡는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는 반복적으로 1990–2000년대 후반까지 ‘조선산업의 세계적인 호황’을 언급한다. 1989–1991년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중국을 포함해서 이들 나라들이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 결과 세계 교역량이 급증한다.
이때 합류한 추가적인 노동력이 15억 명이다. 1990년경 기존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임금노동자 숫자는 15억 명이었다. 그런데 약 15억 명이 ‘추가된’ 것이다. 노동자 숫자는 30억 명으로 늘어난다. 리처드 프리먼이라는 학자는 이를 ‘거대한 2배(Great Doubling)’라고 표현한다.
글로벌 차원에서 볼 때 노동자 숫자는 15억 명에서 30억 명으로 늘어나고, 경제성장률도 급성장하고, 세계교역량도 급증하고, 동시에 ‘선진국 내부의 불평등’도 확대되기 시작한다(중국과 인도, 그리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로 인해). 1990–2000년대 후반까지 약 20년에 걸친 ‘조선업 호황의 슈퍼 사이클’에 힘입어 한국 조선업은 일본 조선업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는다.
한국 조선업이 일본 조선업을 앞서는 과정에서, 박정희식 발전국가, 재벌, 관치금융이 수행했던 역할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가와 재벌, 그리고 관치금융의 힘을 통해 ‘불도저식’ 도크 대형화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게 된다. […] 물론 이러한 설비투자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조선 산업의 세계적인 호황’ 덕택이다. […] 일본의 표준선 역시 별로 쓸모가 없었는데, 도크 대형화와 메가 블록 건조 공법을 만들어내는 ‘규모의 효율성’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283–286쪽
양승훈 교수의 표현 그대로, “국가와 재벌, 그리고 관치금융의 힘을 통해 ‘불도저식’ 도크 대형화를 성공적으로”(285쪽) 진행했기에, 한국 조선업이 일본 조선업을 제칠 수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1997년 한국은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진다. 원화 가치가 하락한다. 원화 가치 하락은 조선업 입장에서는 거꾸로 가격 경쟁력 강화를 의미한다. 한국 조선업은 ‘물량’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주에서 대박을 친다. 책에 나오는 “거제도에서는 개가 1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재밌는 표현은 이때 등장했을 것이다.
5.
동시에 바로 이때부터 ‘물량팀’으로 상징되는 호황형, 사내하청 비정규직이 급증한다. 사내하청은 1990년대 초반부터 늘어난다. 1987–1991년 사이에 잦은 파업과 민주노조 설립으로 인해 ‘노동비용’이 급증했고, 자본은 이에 대한 비용부담을 ‘노동의 외주화’를 통해 대응했다. 이 시기 사내하청 비율은 정규직의 약 25% 내외였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1999년경부터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비율이 급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그리고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파견제 등 노동법 개정 영향으로 추정된다.
조선업 역시 한국의 다른 중화학 공업처럼 가격경쟁력에 기반한 수출경쟁력, 과감한 설비투자가 경쟁우위 요소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에 의한 임금 비용 급증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때 파견법 등 노동법 개정이라는 ‘탈출구’가 생긴다. 조선업 자본은 (그리고 민주노조도) 탈출구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다.
조선업 자본은 경기 변동에 대한 버퍼 차원에서 호황형, 사내하청 비정규직을 적극 활용한다. 특히 해양 플랜트 분야에서는 사내하청(물량팀) 비중이 90%에 달한다. 조선업의 ‘정규직 노동’ 역시 위험한 업무를 맡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내하청 비정규직에 소극적으로 동조했다. 결국 ‘위험의 외주화’와 ‘해고의 외주화’는 자본과 정규직 노동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측면이 있다.
양승훈 교수는 사내하청, 물량팀의 확대되는 과정을 3개 시기로 구분한다. 추가로 아래 그래프를 보면 사내하청 확대 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1기-초기. 노무관리 편의를 위해 도입되는 1990년대 초반이다. 1987–1991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인데, 1990년 기준 사내하청 비율은 (정규직 대비) 21.2%이다.
- 2기-중기. LNG 물량 확대, 원하청 비율이 1대 1로 되는 시기.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1999년 기준 51.39%인데, 2002년 (정규직 대비) 111.7%까지 급증한다.
- 3기-후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해양 플랜트 물량 폭증 시기이다. 위험한 공정 증가를 담당하게 되고, 사내하청이 급증한다. 2015년 (정규직 대비) 379%까지 급증한다.
6.
글로벌 경기 변동과 한국 조선업(거제)의 흥망성쇠 역사를 되짚어보면, 조선업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도 개략적인 정리가 가능하다. 2014–2017년 기간 동안, 한국의 조선업 위기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 ‘장기적인’ 글로벌 경기 변동 차원에서 보면 1990–2008년 세계금융위기 기간에 작동되었던 세계교역량 급증의 시기가 ‘장기 하강기’에 접어들었다. 세계 교역량은 2010년을 기점으로 줄어드는 중이다. 조선업의 ‘슈퍼 사이클’은 더 이상 없다.
- 중기적으로는 해양 플랜트 분야에 섣불리 진입한 것이 조선업 위기의 최대 원인이었다. 한국 조선업 경쟁력의 ‘펀더멘탈’ 자체가 고갈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국면적인’ 위기로 봐야 한다. (해양 플랜트 수요는 유가 급등의 여파로 상승했는데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로 인해 유가폭등 가능성은 낮아졌고, 해양 플랜트 수요 역시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 한국 조선업의 위기에서 ‘중국의 기술추격’ 요인은 아직 위협적인 수준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글로벌 경기 변동의 하강기와 해양 플랜트 분야의 무모한 진입이라는 국면적 요인이 결합한 것으로 봐야 한다.
- 장기적으로는 중국 등의 ‘기술 추격’을 받게 될 것이다. 양승훈 교수 책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임금인상으로 인해 ‘고부가가치 분야’에 더욱 집중하는 노르웨이 방식의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