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 관한 책과 구한말에 관한 책을 봤다. 장부승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한일관계 변화는 더 큰 차원의 변화와 함께 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김시덕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메디치미디어)도 그중 하나다. 책의 부제는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년사”로 이 책은 실제로 동아시아 오백년사를 다룬다. 저자의 오랜 연구가 집대성된 책임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오백년사를 다루기에 조선, 일본, 중국(명, 청), 대만, 러시아를 다룬다. 이들 나라의 역사도 알아야 하고, 상호작용까지를 알아야만 쓸 수 있는 책이다. 최소 10년 이상은 이 분야만 공부했을 것이다. 독자의 한 명으로서 고마운 일이다(김현종).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반도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었다. 변방의 조그만 반도 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1500년대 후반 일본에서 강력한 통일국가를 수립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여러 나라로 분열한 이탈리아 상황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칭송했던 사람은 체사레 보르자였다. 그런데 1500년대 후반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강력한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일본판 체사레 보르자’가 등장한다. 오다 노부나가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천하통일 직전에 측근에게 암살된다. 그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는다. 알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추구했던 목표가 놀라웠다. 조선, 명나라, 인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런 발상은 이후 대동아 공영권까지 이어진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유
새롭게 안 사실 중 하나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이유다. 한반도 침략은 주로 북쪽, 대륙에서 발생했다. 조선의 정예부대는 모두 여진족과 국경을 마주한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남쪽, 바닷가에는 조선의 정예부대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명나라의 참전이 이뤄지고 1592년 7월, 조-명 연합군이 일본이 점령한 평양성을 공격한다. 일본군은 조선, 중국, 인도까지 점령은커녕 조선의 완전한 점령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일본은 명나라에 협상을 제안한다. 협상안의 골자는 ‘조선(한반도)의 분할 통치’이다. 한반도의 남쪽 4개 지역은 일본이 지배하고, 한반도의 나머지 지역은 명나라가 지배하는 방식이다.
협상안은 최종적으로 기각된다. ‘한반도 분할 통치’가 좌절된 이후, 실력으로 한반도 남쪽을 지배하기 위해 다시 벌인 전쟁이 정유재란(1597년)이다. 만일 당시에 명나라가 일본의 ‘한반도 분할 통치’안을 수용했으면, 한반도 분단은 1948년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1593–1597년 즈음에 이뤄졌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병자호란으로, 명나라가 청나라로
임진왜란이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고,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는 과정의 상호작용 부분도 매우 흥미로웠다. 여진인은 12–13세기 금(金)나라를 세웠다가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인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후 여진인은 몽골, 조선, 명의 견제를 받았다.
16세기경, 여진인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 4부, 명과 조선의 영향을 받는 건주여진 5부,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 4부 등 13개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들은 동질감이 약하고 서로 대립했다. 몽골, 조선, 명은 이들의 대립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즉 강력한 외부세력이 적대를 조장하는 상황이었다(61쪽).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나라와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진인을 감시할 여력이 없었다. 신(新)슘페터주의를 주창하는 이근 교수의 ‘경제추격론의 재창조’ 표현을 빌리면, 여진인들 입장에서는 ‘기회의 창’이 열린 셈이다.
마침 여진인 중에서도 마키아벨리가 높이 평가했던 ‘여진족 버전 체사레 보르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건주여진 출신의 아오신 기오로 누르하치였다. 일본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강력한 외세의 개입’은 없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경우 몽골, 명, 조선이라는 ‘강력한 외부세력’의 견제도 있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보다 더 불리한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이 여진인들에게 ‘기회의 창’으로 작용했다. 여진인의 통일에 뜻이 있던 누르하치는, 심지어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을 도와줄 의향을 타진하기도 했다. 아직 자신들의 힘이 강력하지 않았기에, 조선을 안심시키려던 의도였다. 누르하치는 1580년대부터 13개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분열하고 대립하던 여진인들을 차례 차례 통일했다. 1616년 마침내 후금국을 선포한다.
1618년 1월, 명나라와 전면전을 선포한다. 전면전 선포 후 대규모 전투가 사르후 전투이다. 여진인이 승리한다. 여진인의 통일국가를 만들어낸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던 원숭환 장군과 격돌한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사망한다. 이후 홍타이지가 계승한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발생은 균형외교를 추진하던 광해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으로 교체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27년 정묘호란은 명나라의 금수(禁輸) 조치 해제에 조선의 도움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 정묘호란으로 인해 후금-조선은 형제관계를 맺는다. 1636년 4월에 홍타이지가 후금의 황제로 즉위한다(1636년은 청나라 건국 시점으로 간주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인조 정권은 후금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후금국의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명나라와 한판 붙으려 하는데, ‘후방 교란 가능성’이 있었던 조선을 사전에 진압할 필요가 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한 이유이다. 결국, 1580년대–1640년대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각국의 권력교체가 상호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 → 일본의 통일(1590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1592년) → 명나라의 참전 → 조선-명의 여진 견제 약화 →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인들의 통일국가, 후금국(1616년) 설립 → 명나라의 편들기를 거부한, 광해군의 균형외교 →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 정묘호란(1627년), 후금과 형제관계 수립 → 병자호란(1636년), 황제 지위로 격상하고 국호는 대청(大淸) → 홍타이지 사망(1643년), 숙부였던 도르곤 섭정 체제 → 농민군의 반란이었던 이자성의 난으로 인한 명나라의 몰락(1644년) → 청-조선 연합군에 의한 북경 공격(*소현세자 동참) → 이자성의 몰락, 청나라에 의한 지배체제 공고화 (1644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한 일본의 천하통일 이후 약 100여년의 기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이었던 일본, 조선, 명, 청(후금), 몽골은 국내 정치권력과 국제지형이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했다.
일본은 어떻게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나
일본은 왜 능동적으로 메이지 유신(1868년)을 성공할 수 있었고, 조선은 왜 그렇게 허망하게 망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먼저 일본의 경우, 크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16세기 이후 네덜란드와 꾸준히 교류하며 국제정세 변화에 민감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올 때도 막부는 미리 알았다. 메이지유신 이전에도 막부는 1789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파리꼬뮌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중국에서 아편전쟁(1844년)이 벌어지고, 태평천국의 난(1850–1864년)이 일어났을 때는 정세 파악으로 사람을 보냈을 정도였다.
이후 조슈번에서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는 다카스키 신사쿠를 포함한 51명 규모의 ‘지토세마루 파견단’(1862년)이다. 다카스키 신사쿠를 포함한 파견단은 서구의 압도적 무력을 보면서, 일본 역시 체제 변혁을 하지 않으면 중국의 아편전쟁 패배처럼 몰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치로 내건, 메이지유신(1868년)이 성공하는 동력이 된다.
둘째, 일본은 ‘탈(脫)중국중심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막부 체제의 외교전략은 중국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해양국가적 특성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반(半)식민지가 됐을 때, 일본이 좀 더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셋째, 일본은 서구 세력과의 무력 충돌을 통해 사전에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일본에게 개항을 요구하는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이 일본 에도호에 등장한 시점은 1853년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남북전쟁(1861–1865)이 터진다. 일본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853년 페리호가 등장하기 이전 일본은 러시아와도 무력충돌의 경험이 있었다. 1806–1807년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러시아와 붙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던 웅번(雄藩)들이 서구세력과 무력충돌을 해서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1863년 영국과 사쓰마번이 충돌했고(사쓰에이 전쟁), 1863–1864년에는 서구 4개국 연합군과 조슈번이 충돌했다.(시모노세키 전쟁). 메이지유신의 양대 주력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서구세력과 충돌 및 패배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의 압도적 무력을 실감했다.
3년 뒤인 1866년, 불행하게도 조선은 프랑스에 승리한다(병인양요). 프랑스에 승리한 경험으로 인해 조선은 서구의 압도적 무력을 실감할 기회를 놓쳤다. 김시덕은 일본의 패배로 인한 체제변혁과 조선의 승리로 인한 몰락이라는 역설적 상황에 대해 “잘 진 것은 잘못 이긴 것보다 낫다”는 격언을 인용한다(256쪽).
일본이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 근대화를 위한 선제적인 체제정비인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요인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유럽의 우호세력이었던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한 효과적인 정보전, ② 중국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외교전략(=중국의 몰락에 영향을 받지 않음), ③ 좋은 패배의 경험으로 인한 예방주사 효과와 개혁-개방에 대한 정치 주체의 두터운 공감대 형성.
조선은 왜 허망하게 멸망했는가
조선은 왜 저항다운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멸망했는가? 김시덕은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실력 격차가 워낙 컸기에 작심하고 집요하게 침략하는 (일본 포함) 열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는 조선 정부가 대응을 잘하냐 못하냐와 별개로 실력격차 자체가 워낙 압도적이기에, 상대방이 작심하고 침략하면 몰락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인데 매우 설득력 있다. 김시덕은 이에 대한 논거로 태국 사례를 든다. 아시아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태국밖에 없다. 인도, 베트남, 버마, 중국, 조선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들이 식민지 혹은 반(半)식민지가 된다.
태국이 독립을 유지한 것은 태국 정부의 대응이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보다 유능해서가 아니다. 서구 열강이 태국은 몰락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일본과 태국에 대해서는 점령 의도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점령 의도’(=점령 필요)가 강했다.
둘째, 이 시기 조선은 국가 전체가 ‘민중 수탈체제’에 불과했다. 이 부분은 근대라는 관점에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만도 못하다는 점을 환기시켜 준다. 혹은 민족문제에 가려진 ‘계급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준다. 도면회 교수가 쓴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의 서문에서도 조선의 멸망 관련 유사한 문제의식을 담았다. 김시덕은 도면회 교수의 서문을 인용한다. 약간 길지만, 재인용한다.
한때 2만 명에 달했던 한국군은 어찌하여 총 한방 제대로 쏘지 못한채 권력을 빼앗기거나 무장해제 당했단 말인가? 국가의 멸망을 앞에 두고 어찌하여 양반 유생층 일부만이 의병 투쟁에 나섰을까? 전국적 항쟁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
갑오개혁으로 도입된 근대적 재판제도의 운영상황을 정리한 결과, 식민지화 이전 한국의 재판제도가 조선 후기와 다를바 없이 ‘민중 수탈의 도구’였다는 점,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 부인 후 한국 재판제도의 개혁에 가장 공력을 기울였떤 이유가 ‘한국 민중의 환심’을 사서 종국적으로 한국을 병탄하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독립협회 운동 좌절 이후 1905년경까지의 한국 사회는 중앙 정부와 지방관의 수탈로 인해 민중의 불만이 쌓여 여차하면 정변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민중의 에너지를 새로운 정치권력 수립으로 전환시켜줄 세력은 없었다.
일본의 통감부 설치와 그에 뒤이은 한국 병합은 군사적 강점에 기초한 침략행위지만, 어찌보면 이러한 ‘한국 민중의 고통과 개혁열망에 편승한’ 침략이었다.
갑오개혁기에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조치들이 아관파천 이후 폐기 또는 수정됐으나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이후 다시 복원되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 시행되면서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걸게 했기 때문이다.
- 326–327쪽
구한말 조선인들을 만난 외국사람들의 조선인에 대한 인상에는 게으름이 있다. 그러나 김시덕은 조선인들이 게으른 것처럼 보였던 이유를 다른 것에서 찾는다. 한반도와 연해주에서 다양한 조선인을 만났던 비숍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조선 몰락의 내적 원인’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비숍의 글을 김시덕이 재인용한 것이다.
러시아와 만주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의 활력과 인내를 보고 […] 나는 조선사람의 게으름을 기질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조선에 있는 모든 남자는 ‘가난이 최고의 보신책’이며 가족과 자신을 위한 음식과 옷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탐욕적이고 타락한 관리에 의한 노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327–328쪽(이사벨라 버드 비숍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재인용)
1895년 조선을 탐사한 러시아인 루벤초프도 유사한 글을 남겼다.
많은 이는 조선인이 게으르다고 비난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나 남우수리 지방 근처의 조선인 정착지들의 생기 있는 상황을 보면 […] 조선 주민들의 빈곤은 관할 주민들에게서 가능한 모든 것을 짜내는 수많은 관리의 탐욕과 약탈에 기인한다.
- 328–329쪽
조선인들에게 ‘게으름’은 ‘필요 이상의 생산’을 하지 않기 위한 보신책이었다. ‘부지런함’과 ‘필요 이상의 생산’은 탐욕한 관리들에 의한 ‘약탈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민중의 눈으로 볼 경우, 조선 지배층의 약탈수준은 일본 제국주의보다 ‘더 나쁜 지배체제’에 불과했다. 조선 민중에 의한 전국적 항쟁이 벌어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동시에 이 지점이 내가 식민지 근대화론 주창자들을 싫어하지 않는 이유이다.)
몰락한 것은 조선의 ‘민중 수탈체제’다
1978년 중국에서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이뤄진 이후, 안후이 성(省)에서 한 무리의 농민들이 집단노동 체제를 해체하고 농장을 개인별 대지로 나누는 비밀협약서를 작성한다. 이러한 혁신은 주변으로 재빨리 퍼져나갔다. 이때도 ‘개인적인 작물 경작’은 금지되어 있었다. 즉 불법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안후이성의 중국공산당 서기 완리는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대신 토지를 농민에게 돌리는 농업개혁을 실시한다. 불법이지만 농민의 비밀협약을 옹호한 것이다. 쓰촨성의 당 서기였던 자오쯔양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중국공산당은 불법을 허용해준 짜오즈양과 완리을 처벌하기는커녕 공을 인정해서 1980년에 자오쯔양은 총리, 완리는 농업정책을 총괄하는 부총리가 된다. 중국공산당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오쯔양과 완리는 1982년 농업개혁을 단행한다. 안후이성과 쓰촨성의 결정을 전국화한다. 모든 농업공동체가 사라지고, 각 농가에 개인용 토지 권리를 보장해줬다.
1982년 농업개혁의 효과는 놀라웠다. 1957–1978년 사이 중국 농촌의 실질소득 증가율은 연 1% 가 되지 않았다. 개인용 토지권리를 보장해주는 농업개혁 후, 농가소득은 그야말로 급증한다. 1984년 곡물 생산량은 4억 톤이었는데, 불과 6년 전에 비해 33% 증가했다. 채유종자와 목화 생산도 연간 성장률이 15%를 지속했고, 육류 생산도 1년에 10%씩 증가했다.
1978–1982년 중국 농촌에서 바뀐 것은 오직 ‘인센티브 체계의 변경’이 전부였다. 집단적, 협동농장을 개인 농장으로 바꾼 것이 개혁의 전부였다. 그런데, 연간 1%도 안되던 농업 생산량이 연간 10%–15% 수준으로 증가했다(『127가지 질문으로 알아보는 중국경제』, 53–56쪽).
구한 말 외국인들이 만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일대에서 만난 조선인은 게으르지 않았다. 조선 바깥에는 조선의 관리와 같은 ‘수탈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중국 공산당이 농업개혁을 한 것처럼 ‘수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생산량과 소득이 급증했다. 조선 말의 상황은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 공산주의 수준’만도 못한 것이었다. 199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이 차례 차례 몰락했던 것처럼, 정치-행정-군사 체계 전체가 ‘민중 수탈 시스템’에 불과했던 조선도 몰락했던 것이다.
갑오농민전쟁, 독립협회, 갑오개혁 등이 모두 좌절된 상태에서, 혁명과 반란의 에너지를 소실한 조선 민중들은 ‘총체적 민중 수탈 체제’에 맞서 게으름으로 저항했다. 1990년대 공산주의 몰락이 불가피했던 것처럼 1905–1910년 조선의 ‘민중 수탈체제’도 몰락했다. ‘민족문제’ 역시 언제나 ‘계급문제’와 함께 봐야만 하는 이유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