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소설 수업 시간에는 정용준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다 읽고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하는데, 그중에 한 수강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역시 남성 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뭔가 굵직굵직하고, 이야기도 힘이 있고,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여성 작가들하고 다르게. 여성 작가들은 너무 소심하다고 해야 하나, 작은 이야기만 다루고 그러잖아요. 전 여성 작가보다는 남성 작가가 잘 맞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얼굴은 트럼프를 바라보는 툰베리처럼 구겨졌는데, 아마 맨 뒷자리에 앉아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네 말은 개소리야!’라는 것을 정말 정말 표현하고 싶었건만… 안타까울 따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아니 저 말이 왜요?’ 하고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일단은 수강생 대부분이 여성이고, 말하는 본인도 여성이고, 강사도 여성인 상황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실례인 동시에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물론 의견 자체도 동의할 수 없었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는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쉽게 말하곤 한다. 여성 작가는 어쩌고저쩌고, 남성 작가는 어쩌고저쩌고. 여성 작가들은 너무 섬세해, 예민해, 징징거려, 소심해, 내면세계에만 집중해, 개인적이고 작은 문제만을 다뤄, 사랑 타령만 해, 기타 등등. 그러면서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넓고 다양한 작품을 다루었으면 좋겠다는 건설적인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듣다 보면 궁금해진다. 실제로 여성 작가들이 저런가? 저것이 여성 작가의 특징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대프니 듀 모리에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보고 여성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정유정을 보고 징징댄다거나 소심하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작가들은 ‘여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성 작가의 작품 중에도 스테레오 타입에 부합하는, 섬세하고, 내밀한 세계를 다루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공존함에도 전자의 경우 여성적이라는 딱지가 붙고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모든 공포소설의 원형으로 꼽을 수 있을 만한 작품인데,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너무너무 여성스러운 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없다. 이를 두고 메리 셸리에 대해 ‘역시 여성 작가라서 위대해!’라고 성별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위대한 작품을 쓴 여성 작가들은 작품 앞에서 성별이 소거된다.
어째서일까? 이는 아마도 인간의 기본 모델이 ‘남성’으로 설정된 동시에, 남성이 가진 요소는 긍정적인 면으로 치부되고, 여성이 가진 요소는 부정적인 것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넓고 확장된 세계를 다루는 것, 인간의 본성 같은 심오한 문제를 다루는 것, 기발하고 창의적이며 재미있는 것, 모두 남성의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여성이 이런 문제를 다룰 경우 “여성 작가 같지가 않네.” 혹은 “여성 작가인 줄 몰랐어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성의 긍정적인 특성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여성’이 되는 것이다. 섬세한 내면의 문제와 같이 전형적인 ‘여성의 문제’로 치부되는 것들을 다루는 경우에만 비로소 다시 “여성스럽다”는 칭찬과 비판이 가해진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여성 작가들로서는 작품 활동을 하며 훨씬 강한 장벽을 만난다. 사랑 이야기와 개인의 내면, 일상생활 등의 소재를 남성 작가가 다룰 때는 “남성이 섬세하기까지 하다”며 칭찬을 듣지만, 여성이 그런 글을 쓰면 전형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많은 여성 작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기거나 중성적인 가명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어슐러 르 귄의 『밤의 언어』에는 이와 같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오는 고정관념을 깊게 다룬 이야기가 실려 있다. 르 귄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 『어느 늙은 유인원의 별 노래(Star Songs of an Old Primate)』의 머리말에서 그와의 깊고 돈독한 우정을 이야기하다가, 제임스의 정체는 사실 앨리스라는 것을 밝힌다. 말하자면 오랫동안 남성의 가명을 쓰고, 당연히 남성인 줄 알았던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작가가 실은 여성이라는 것을 안 이후의 소회를 밝힌 글이다.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상당히 인기를 얻었는데, 인기를 얻음에 따라 그의 글쓰기 방식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남성답지 않게 섬세한 면’이 돋보인다면서 실은 팁트리의 정체가 여성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남성이 쓸 수 없고 헤밍웨이의 소설을 여성이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글에서는 “피할 수 없는 남성적인 요소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일부 페미니스트는 팁트리는 여성을 이해하는 척하지만 남성이기에 본질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잘못된 글쓰기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물론 팁트리의 정체가 공개되면서 이러한 모든 추측은 한낱 오류일 뿐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사실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비단 남성들이나 성차별주의자들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여성 중에서도 여성 작가의 작품을 무시하는 이들이 있고, 실제로 굉장히 여성주의적인 작품을 쓰고, 성폭력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글임에도 작가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것만으로 부당한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과 어떤 기대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라는 것이다. 문학이나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건 아닐 것이다.
『밤의 언어』는 이처럼 문체, 젠더, 장르 등에 관한 사유가 담긴 에세이집이다. 앞선 내용은 책이 다루는 많은 주제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꼭지를 가져와서 적은 것이지만, 이외에도 문학, SF, 판타지, 여성적 문체 등 일반적으로 비하되거나 폄하되기 쉬운 것들에 대한 논리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 있다.
르 귄의 다른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결코 읽기 쉽지 않다. 문장마다 배어있는 은유와 몇 겹씩 들어가는 사고는 몇 번씩이고 되새김질하며 읽어야 하기에 작고 얇아 보이지만 읽는 데 상당한 공이 든다.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란 부제를 단 만큼 주로 장르소설과 르 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특화된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읽다 보면 결국 글쓰기와 장르를 뛰어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원문: 한승혜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