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님이 짚어주셔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중 가장 흥미로운 행보를 보이는 앤드루 양(Andrew Yang)이 나온 비디오를 2시간 동안 정주행했다. 그의 핵심 공약은 “4차 산업혁명에서 소외되고 없어지는 일자리를 되살리기 위해 모든 미국인에게 월 1,000달러의 자유 배당금(Freedom Dividend), 즉 기본소득을 제공할 것이고 그 재원은 VAT와 IT기업에 대한 세금으로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앞서가도 너무 앞서가는 공약인 데다, 말할 때마다 숫자와 통계가 튀어나와서 그냥 nerdy한 후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꼼꼼히 뜯어볼수록 재미있다. 무엇보다 지지율 성장세가 엄청나다. 앤드루 양을 응원하는 풀뿌리 유권자들은 스스로를 ‘양 갱'(Yang Gang)이라고 부르고 해시태그 운동을 벌인다. 거물급 정치인 후보인 코리 부커나 에이미 클로버샤와 맞먹을 정도의 지지율(3%)을 기록 중이다.
트럼프에 대한 반발로 민주당 내에서 거세게 확산되는 극 진보 성향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libertarian)에 더 가깝다. 감히 예언하건대 (잘하면) 오바마급의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슬로건이 입에 착착 붙고, 바이럴이 잘되고, 내용이 잘 이해된다.
앤드루 양 캠프 사람들은 MATH라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Make America Think Harder의 준말이다. 그가 아시아인이고 아이비리그 출신이고 각종 통계와 숫자에 능하다는 점을 들어 만들어진 슬로건이며, 물론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인 Make America Great Again의 패러디다.
또, 앤드루 양은 인터뷰에서 “나야말로 트럼프와 정반대 인물이다. 난 아시아인이고 수학을 잘하니까”라며 툭툭 꽂히는 말을 한다. “Freedom Dividend”는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에 대한 일반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 앤드루 양 캠프가 만든 구호다. 유세에서 트럼프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데도 공약 내용, 태도, 아이덴티티 자체가 정확히 트럼프의 대척점에 있다.
2. 누구의 마음을 얻어야 대선에서 이기는지 안다.
트럼프는 “정치인들은 너희를 무시해” “이민자들이 들어와서 너희 일자리를 빼앗고 있어” 등의 말로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처럼 기존 민주당 텃밭이었던 주의 블루칼라 노동자층의 분노와 공포를 자극해 대통령이 됐다. 앤드루 양은 이 지점을 겨냥한다. 트럼프가 그렇게 당선됐지만 실제 이들 노동자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기업들을 협박해 강제로 공장을 유지하려는 게 전략이지만 당연히 이건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이 지역에서 공장들이 문을 닫는 이유는 이민자 때문이 아니라 자동화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그럼 다른 직업을 얻으시오’라며 이들 노동자들에게 코딩을 배우라고 하면? 한 대 얻어맞을 가능성이 크다.” 라고 정곡을 찌른다.
대신 미국에서 가장 자동화에 취약한 핵심 중산층 노동자들에게 ‘월 1,000달러의 기본소득을 주겠다’고 하는 것. 자율주행차로 영향받을 트럭 운전사, 아마존 확장으로 문 닫을 소매점 노동자 등 실제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의 직업군(그리고 최대 유권자층)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3. 분열의 언어가 나올 때 자신의 공약으로 연결해 정쟁에 지친 유권자들의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 호소한다.
그는 대만계다. 이번 민주당 경선에 여성, 라틴계-흑인-혼혈 등 소수인종, 동성애자 등 다양한 인물이 나왔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종적 측면을 강조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불붙인 인종 분열 논리에 말려들지 않는다.
“멕시코 이민자와 중국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리 대신, 자동화가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규정하고 그것은 시대적 흐름이니 그 부작용을 줄일 수 있도록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가 보수 유튜버인 벤 샤피로 쇼에서 보여 준 차분하고 논리적인 대응은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찬사를 얻었다. “이토록 분열적인 지금의 미국에서 이 정도의 토론을 볼 수 있다니” “난 공화당원이지만 앤드루 양에게 기부했다” “오바마보다 더 나은 대통령감”이라는 찬사가 나오는 지점이다.
기본소득 논의를 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논리와 자신을 비교하기도 한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들을 위해 기본소득을 주장하지 않았다. 어떤 특정 인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정책이다.
4.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를 상당히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
기본소득을 통한 경제 부양 효과는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앤드루 양은 미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미국 알래스카주에서 기본소득을 주고 있는데 그곳의 천연자원으로 거두는 주 차원의 소득을 주민들에게 ‘배당금’ 형태로 나눠줘 경기 부양을 하는 정책이 인기가 좋다는 점을 예로 든다. (심지어 알래스카는 철저히 공화당 지지 주다.)
IT 혁명으로 많은 직업이 없어지면 노동의 개념 자체가 바뀐다는 어려운 이야기도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아내가 두 아이를 돌보는데 둘 중 하나는 자폐아다. 앤드루 양은 자기 아내가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 특히 돌봄 노동을 하는데 이 노동이 지금은 경제 가치를 1원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을 든다. 노동의 개념이 바뀌면 결국 집안일이나 돌봄 노동이나 창작행위도 모두 ‘소득을 받을 만한 행위’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5. 공감 능력도 뛰어나고, 공감할 만한 요소가 많다.
아이비리그 출신이고 매우 똑똑하지만 겸손하다. 힐러리 클린턴을 비롯해 상당수의 민주당 정치인이 보여주기에 실패했던 부분이다. 숫자와 통계를 많이 인용하면서도 잘난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많이 안다’ 식으로 통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시아 아이덴티티를 적절히 드러내는 유머를 구사한다. “기본소득 받으면 사람들이 일 안 하지 않을까?”란 질문에 “난 아시아인이라 일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다들 그럴 것.”이라고 답하는 식.
얼마 전 총기 오발 사고로 숨진 아이 엄마가 총기 규제에 대한 의견을 묻자 질문자를 포옹한 후 눈물을 보이며 “나도 6살, 3살 아이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총기 소유자들이 총기가 오발 되지 않도록 구조변경을 할 수 있게 법을 바꿀 것”이라고 해 박수를 받았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세금(아마존 판매, 구글 서치마다 일정액)을 부과하자는 입장이지만, 비슷한 주장(법인세 부유세 높이고 거대 IT 기업 쪼개자)을 하는 엘리자베스 워런 후보가 ‘기업 규제’의 입장에 더 가깝다면 실리콘밸리 출신인 앤드루 양은 “IT기업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자신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다며 공감한다”는 답변을 한다. 실제 앤드루 양이 대통령이 되면 세금을 많이 두들겨 맞을 가능성이 있는 기업인인 일론 머스크가 오늘 지지 선언을 했다.
위 비디오는 아시아계 미국 유튜버 Fung Brothers 채널에 출연한 앤드루 양. 유튜브 채널에서는 유튜브 언어를 쓴다. “나는 X된 미국을 다시 돌려놓고 싶다(I would unfxxk America)”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행자보다 20살은 더 많은 앤드루 양이 훨씬 더 농구 레이업 슛을 잘한다.
개인적으로 앤드루 양의 출마와 선전이 반갑다. 물론 VAT로 기본소득 재원을 충당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역진세로 결국 저소득층이 손해를 볼 수 있는 등 보충해야 할 논리가 많다. 기본소득의 오용과 남용에 대해서도 아직은 ‘나는 사람들의 선함을 믿는다’는 낭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한계다.
그러나 미국 대선은 전 세계적인 어젠다의 시험대다. AI의 등장으로 인한 노동의 변화와, 그로 인해 어떻게 세계 경제와 소득 분배를 재편해야 할지, 국가보다 더 큰 영향력의 IT기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앤드루 양을 시작으로 하여 미국 대선에서 일어난다면 이 논의가 전 세계적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덧 1.
개인적으로 아이 중 자폐아가 있다는 점이 공약 설계에 큰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핵심공약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연계되어 있다. 자폐아를 돌보는 아내의 돌봄 노동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보상할 것인지 고민했을 것이다. 기본소득 1,000달러의 효과에 대해 기자들이 질문하면 “당장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있고, 돌볼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고…” 등의 사례를 든다.
이 기본소득 제도가 ‘장애연금’과 어떤 방식으로 공존해야 하는지에도 상당히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장애 연금이나 공적 부조는 사용할 때 제약이 많고 장애인에게 낙인을 찍는 효과가 있어서 경제/심리적 인센티브를 주지 못하고, 공적으로도 운영 부담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 내가 우리나라의 장애 관련 제도를 보면서 느꼈던 단점과 부작용을 그도 고스란히 느낀 것 같다.
덧 2.
8월에 이 글을 썼을 때 양의 전국 지지율은 약 3%였는데, 3차 민주당 경선 후보 토론회를 거친 9월 4주 차 지지율은 캘리포니아주에 한하지만 무려 7%에 달했다. 같은 주 출신의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의 지지율(6%)을 넘었다는 게 일대 사건으로 미국 언론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극 진보 성향으로 버니 샌더스(26%)가 조 바이든을 앞서 1위를 달리며, 해리스는 선두그룹(샌더스-바이든-워렌)에 이어 4위를 달리다가 이번에 양에게 추월당했다. 해리스는 지난 경선 토론 때 양이 “이 토론 보시는 분들 중 10명에게 1년간 1,000달러의 자유 배당금을 드리겠다”고 한 말에 계속 웃어서 빈축을 샀다. 현실성 없다며 비웃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경선 토론에서 발언 지분이 많아야 인기가 오른다는 공식도 깼다. 양은 지난 토론 때 10명 후보 중 발언 시간 최하위였으나 지지 상승세는 가장 높았다. 주류언론의 보도도 부쩍 늘었다. 뉴욕타임스의 기자들이 자신이 취재한 기사에 대하여 얘기하는 인기 팟캐스트 ‘The Daily’가 3차 경선 토론 직전에 양에 대한 심층 보도를 했다.
출연한 기자(IT 담당)은 ‘양이 첫 출마 선언을 했을 때 취재요청이 왔지만 금세 사라질 후보라고 생각해서 기사를 안 썼다’며 그의 상승세에 놀라워했다. 보도 타이밍도 의미심장하다. 트럼프가 민주주의의 해악이라는 논조를 유지하며, 트럼프를 이길 민주당 주류 후보 보도 비중이 높은 뉴욕타임스가 3차 경선 토론 직전에 이런 팟캐스트를 내보낸 것이다.
원문: 홍윤희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