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본인이 부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올라가면 갈수록 원하는 부의 수준이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우리는 눈이 계속 더 높아지고, 더 탐욕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들은 부자에 대한 정의가 와 닿았던 것이, 부자란 자신이 가진 것을 따져보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원할 때 소유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나는 이 정의에 매우 공감했으며, 그 정의에 따르면 난 이미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기준에서는 아마 아닐 것이다. 나는 현재에도 내 명의의 억대 주택 담보 대출금을 다달이 갚아 나간다.)
수요 vs 공급 논리
많은 세상의 이치가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흘러간다. 물욕이라는 수요를 충족할 만큼의 물질적 공급이 가능하다면, 그 두 개가 만나는 교차점이 부자로 느껴지는 지점일 것이다. 원하는 만큼 물질적인 공급을 늘이는 것보다 오히려 물욕이라는 수요를 줄여서 균형점에 보다 쉽게 도달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더 빠른 길일 수 있다. (이것이 선인들이 수백 년 전 이미 깨닫고 전파했던 ‘안분지족’의 지혜 아닌가!)
소소한 물욕이 별 크게 없는 편인 나는, 지금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큰 불만이 없고 딱히 결핍을 느낄 일이 없으니 부자가 맞나 보다. 커피 한 잔을 시키는 데도 혹시 옆집에서 더 싸게 파는 건 아닌지 고민한 것도, 정말 먹고 싶은 라테 한잔을 시키기 위해 아메리카노 대비 프리미엄의 가격이 적정한지 따위를 재지 않고 내가 정말 원하는 메뉴를 거침없이 고를 수 있게 된 것도, 굳이 ‘백화점’에서 립스틱이 맘에 든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사보게 된 것도 사실 오래되지 않았다.
누구도 그런 제한을 내게 준 적은 없지만, 연봉 앞자리가 바뀌고 나서야 이제야 스스로 떳떳이 꼭 가성비 기준 최고가 아니어도 가심비 기준의 소소한 행복도 가끔은 덥석 누려도 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원히 친할 일 없는 사람이라도 호의를 베풀거나 소소한 선물을 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끼던 순간, 나는 진짜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잡은 연봉의 몇 분의 1 정도일 때부터, 아니면 돈 한 푼 벌지 않을 때부터도 떳떳이 그런 소비생활을 이미 오래전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소비 자격은 아마 다른 모든 것처럼 그 기준이 높았을 것이고, 이제는 매일 아침 라테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된다고 스스로 무장 해제한 그때부터 아마도 나는 부자가 된 것만 같다.
냉정하게 경제 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라테 효과(Latte Effect)’라고 해서 하루 라테 5,000원을 1년 아끼면 180만 원이 넘고, 매달 모아 월초마다 2%만 복리로 굴려도 10년이면 2,000만 원 정도 된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나는 10년 후에 그 2,000만 원이 수중에 있는 것보다, 매일 아침을 행복하게 시작하고 그 기운으로 더 생산성 높은 사람이 되어 10년 후에는 그보다 몸값 높은 사람이 되는 쪽이 더 해피 엔딩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데 성공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은 몇백만, 몇천만 원짜리 가방이 아니라 매일 아침 뜨겁고 맛난 커피 한 잔이면 충분히 획득할 수 있는 싼(?)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전에는 특히 나한테 쓰는 돈은 그런 단 한 푼의 프리미엄조차 아까웠기에, 내게 조금은 더 너그러워진 지금이 너무도 행복하다.
부자인데 가난한 사람, 가난한데 부자인 사람
온몸에 명품을 걸치고는 시장에 가면 몇천 원이라도 손해 안 보려고 바득바득 깎는 사람과, 누추한 차림이지만 길바닥에서 고생하는 할머니가 안타까워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것 하나 사고 잔돈은 됐다며 웃으며 돌아서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부자일까? 우리 사회는 어떤 부자에게 경외를 보내고 롤모델로 삼아야 할까?
물질주의 사회 풍토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그 ‘껍데기 결과’만으로 경외해주는 수많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런 물질에 쏟은 돈만큼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면? 예를 들어 몇백짜리 가방을 사서 자랑하려고 매고 나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부러워하거나 경외의 눈빛을 보내기는커녕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우리나라가 특히 천민자본주의 사상이 만연하게 된 이유는, 이렇듯 단지 ‘비싼 것을 소유했다는, 눈에 보이는 결과’만 부러워하는 수많은 우리 모두의 수준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할 테다. 내가 프랑스 교환학생을 갔을 때도, 동생이 현재 독일에서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로, 유럽의 20–30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명품을 두르는 게 아무 의미가 없고, 오히려 신경 쓰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격에 맞지 않는 소비를 전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소비를 아예 신경 안 쓴다는 게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소위 부자라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본 적들이 있다. 운 좋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들 중 몇은 구김살이나 열패감 따위 없는 해맑은 타입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공통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을 가지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반경이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이 아무리 다가오려 해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씀씀이가 큰 것과 사회의 일반 통념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자수성가한 부자들과도 얘기해본 적이 몇 번 있다. 내가 느낀 공통점은 그들은 몹시 외로웠다는 것이다. 아마 외롭지 않은 부자였다면 그들만의 리그 밖인 나와 대화할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독하게 희생한 많은 것들이 그들을 외롭게 했고,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더 이상 새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진심을 알 수 없어서, 혹은 기존에 알던 사람들이라도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많은 경우를 겪고는 상처를 받은 듯했다.
그들은 정말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보였다. 물질적인 잔고는 나보다 0이 몇 개 더 붙어있을지언정, 심리적인 잔고는 결코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성공을 거둔 부분에 대해서 나는 분명 대단하다고 인정하지만, 현재의 모습이 부럽거나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부러우니까 지는 거다
종종 물질의 노예들을 본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너무도 괴로운 일을 버텨내면서 젊음과 좋은 날씨의 90% 이상을 낭비하고는, 그 보상으로 고스란히 한 달 치 월급 정도 되는 명품 소비를 한다. 또는 덜컥 외제 차를 구매해서 일주일에 단 몇 시간 잠시 부자가 된 착각 타임을 누리기 위해 한 달 내내 할부금을 갚기 위해 매시간 괴로움을 꿋꿋이 견디는 것도 본다.
그런 물질들이 과연 내 젊은 날의 황금 시간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인가? 당연히 내가 번 돈을 어디 쓰든 자유지만, 소비란 삶을 향유하기 위한 부산물이나 과정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왠지 좀 슬플 것 같다. 자신의 경제력을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겨우 달성 가능하거나 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만 겨우 가능한 소비라면, 있지도 않은 경제력을 ‘마치 있는 양 보이기 위해’ 하는 소비라면, 그건 내게는 부자가 아니라 물질의 노예 인증과 다름없다고 느껴진다.
유럽에서 명품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비력이 되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향유하는 여러 브랜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마치 내가 청바지가 없으면 지나가다 유니클로에서 하나 정도는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것처럼, 본인의 경제력 내의 자연스러운 소비 결정이라는 것이다. 반면 학생들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구멍 난 가방이나 너덜너덜해진 옷이라도 부끄럽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에서 이해할 수 없던 것이, 대부분이 본인의 수입 수준에도 맞지 않는 가방 하나쯤은 걸쳐야 하고, 폴로 등의 고가 메이커로 도배하는 경우가 너무도 흔했다. GDP로 비교해보아도 결코 우리네 학생들이나 부모가 유럽 선진국에 비해 더 부자일 것 같지 않은데, 우리는 소비 지출에 대한 눈만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목적이 되어버린 물질적 부를 좇아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을 정도가 되면 만족스러울까? 어떤 재력가는 내게 전혀 울림을 주지 못하는 돈 자랑을 계속하면서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지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는데, 결국 잘 톺아보니 부만으로 결코 살 수 없는 권력/권세에 대한 결핍의 발로였다.
‘부’라는 분야에서는 대단하다는 위치에 도달한 사람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걸 자기 위안으로 삼는 듯했지만, 결국 정작 그들이 가진 권세와 영향력이라는 것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것이기에 어느 지점에서는 자기 위안으로 완벽하게 가릴 수 없는 패배감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서 나는 그가 이루지 못한, 그리고 이룰 수 없을 것에 대한 결핍과 욕망을 동시에 본다.
어떤 친구는 한때 내게 자신의 인간관계에 자부심 가득한 얘기를 많이 했다. 본인은 친구가 많다는 것이 항상 은근한 자랑이었는데, 나는 그런 모습에서 그 친구의 낮은 자존감을 보고야 말았다. 본인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숫자로 입증하려 하다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의 많은 부분에서 “내”가 주인공인 에피소드는 많지 않고, 거의 다 “친구가, 친구들이”로 시작하는 문장이 상당히 많았다. 그는 그렇게 인간관계에 욕심이 많았고, 그것에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물질적 부가 아닐 뿐 분명히 결핍과 욕망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학벌에 대한 허영이었다. 나의 이 결핍은 30대 중반, 그때까지 모은 전 재산을 털어 외국까지 가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스스로 작아지는 느낌이 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서 마지막 학위를 따고야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오히려 그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 더 이상 그 누구도 부럽지는 않다.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어느 순간 더 부러운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진정한 부자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스스로의 물욕을 줄이는 것이 물욕을 채워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돈의 노예라기보다 오히려 돈을 벌어나가는 그 자체에서 인생의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도 주변에서 본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찌 살아가든 결국 모두는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어, ‘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너무 그 목적에만 함몰되어 나도 모르게 외로워지는 길을 걷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또 다른 결핍을 느낄만한 것을 빠뜨리고 가는 중은 아닐지 중간중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원문: 투명물고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