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국이 OECD 국가 중에서 기록적인 최저 출산율을 경신했다는 기사로 떠들썩하다. 저출산의 문제는 사회/개인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딱 하나로 꼬집기 어렵지만, 선택권이 있는 여성 그룹에 대한 단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회생활 vs 육아생활
직장만 다니는 남자도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다양한 직종의 기업에서 절대로 그만두지 않고 꿋꿋이 나오는 워킹맘들이 있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95% 이상은 애 보는 것보다 회사 다니는 것이 훨씬 쉽다고 한다. 물론 결국은 ‘애도’ 보고 ‘회사도’ 나와야 하는 숙명이 따르지만, 어쨌거나 환경이 허락한다면 애만 주야장천 보는 것보다는 일정 시간이라도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대에만 특히 나타나는 현상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예전에도 “밭맬래, 애 볼래? 하면 밭매러 나간다.”는 말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만큼 육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웬만한 경제 활동 이상의 고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시대의 불만은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분위기도 그랬지만 쉽게 응집화될 수 있는 매체도 부재했다. 전적으로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경제 활동의 경험 기회가 적었기에 그 둘을 동등하게 비교해 볼 기회도 적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같은 교육을 받은 후 같은 기회로 사회생활을 실제로 해보았다. 이게 웬걸 둘 다 해보니 육아가 경제 활동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인식의 변곡점
나는 현대의 여성들이 겪는 이 인식의 변화가 예전 노예 해방기의 변곡점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어떤 지점에서는 피부색이 조금 다른 일부가 하등한 종족이라며, 허드렛일과 고된 노동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당연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조금씩 교육의 기회가 생겼다. 실제로 해보니 백인보다 못한 인종도 아니었다.
피부색은 기득권이 핑계를 대기 위해 주입한 잘못된 족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 오래도록 부당하게 부과되었던 선조들의 삶의 무게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여성들도 비슷한 현실을 겪어왔다. 죽기 직전까지 벗어날 수 없었던 가정 내 노동의 의무, 그리고 자신의 유전자를 계승하는 성씨도 아닌 남의 가문을 위한 부당하고 버겁게 반복되는 제사 등의 고된 노동들이 과연 그리도 당연한 것인가? 점점 깨어나기 시작하며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들이 주장해온 대로 과연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이 육아보다 힘들고 더 대단한 것이었던가, 이것을 우리 세대는 몸소 비교 체험을 해보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옵션이 있는 사람일수록 애 키우는 것보다 일하는 것을 택한다는 사실이, 결혼은 하되 애는 갖지 않겠다거나 아예 비혼 선언을 하는 경우가 전적으로 늘어난다는 현실이 말해주는 건 무엇이겠는가?
자유 선택설
구세대 기득권 그들의 주장대로 출산/육아가 실제로 상대적으로 편하고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정도로 보람 있는 것이라면, 둘 다 겪어보고 선택할 수 있는 세대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자연적으로 출산율이 올라갈 것이다. 선택권이 있는 자유주의 세상에서는 더 좋은 쪽으로 선택이 몰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다.
예전의 노예가 없어진 자리에는 새로이 발명된 각종 가전 기기와 여자들의 노동이 대신해 우아한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나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여자들이 출산을 안 하는 것을 대신해줄 기술이나 성별은 아직까지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인류의(당장 ‘전체’는 아닐지라도 특히 우선 저출산의 문제가 극심한 특정 종족의) 미래가 통째로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목이 뻣뻣한 기득권들은 후손에 대한 공허한 ‘당위’를 주장하거나, 자신은 ‘돈만’ 벌어 오는 것까지가 본인의 본업이고, 육아는 기껏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 그친다.
물론 그들의 부모 세대로부터 학습한 것과는 별개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깨어있는 일부의 남성들이 있다. 정말 100%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휴직을 했던 대기업 남직원과 얘기를 해보았더니 실제로 그는 육아가 회사보다 훨씬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지체 없이 바로 인정했다.
남자도 여자만큼 기꺼이 커리어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당연히 어느 시기의 육아를 도맡아 할 수 있다. 애초에 육아라는 것이 공동 책임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본 여자들의 경우 100이면 100 죄다 출산과 육아에 회한을 느끼는 지점이 분명히 왔다. “아이는 이쁘지만”이라는 한정적 문구에는 많은 게 내포됨을 느낄 수 있다.
공허한 메아리
아주 쉽게 ‘애는 당연히 있어야지’라고 무책임하게 내뱉는 어른들은 그 ‘애’로 인해서 인생이 가장 많이 바뀌고 가장 많이 힘들 당사자인 ‘나’의 입장이나 의견, 인생 스케줄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1년에 몇 번이라도 ‘내 귀여운 손주’라는 존재가 빨리 보고 싶을 뿐이고, 그로 인해 나의 꿈이랄지 커리어랄지 인생이랄지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양 무심할 뿐이다.
나중에는 옛날 노예들에게 피부색의 핑계를 댔듯이, 응당 항상 희생해야 하는 것은 엄마라는 ‘모성애’ 족쇄로 옭아맬 것이 뻔한 스토리임을 주체적인 여성들은 이제 능동적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사회적인 당위를 주장할 때에도 일하는 여성의 인생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남자들 이상으로 (실제로 전 세계 평균적으로 여학생의 학업 성적이 남학생을 초월한다는 것은 여러 결과가 말해준다) 열심히 공부해왔고, 똑같이 성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유청년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한창 커리어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육아에 양보하라니?
같이 자식의 기쁨을 누리면서도 남자들은 경력 정체나 단절을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여자들 역시 그러한 환경이 갖추어진 후에 당위를 주장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아니라 본인을 보살펴주고 사랑을 주는 ‘부모’가 필요한 것이다. 일하는 여자도 경력 단절을 겪지 않고 육아를 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보장이 되든지, 아니면 애 있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같이 번갈아 휴직하고 육아하는 것이 당연해서 집안 내외에서의 공평한 환경이 이루어진다면 그 당위성의 외침이 좀 덜 공허할 텐데.
이 땅의 모든 엄마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기를
그럼에도 나는 왜 진정한 ‘해방’의 길을 택하지 않는가? 부당함이 많은 현실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진다는 희망을 여전히 놓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내는 극단적인 대치와 반목의 결론이 아니라, 조금은 손해 보고 다치더라도 내가 태어날 때보다는 죽을 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세상을 만드는 데 물 한 방울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이다. 투사는 탁상공론의 이론가가 아니라 진짜 삶을 살아가면서 전투를 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 땅의 모든 엄마가 본인 외의 사람들이 이미 다 짜 놓은 수동적인 역할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닌, 연극의 스토리를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는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기를 응원하며.
원문: 투명물고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