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흥분지수를 가장 높이는 곳은 어디일까?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단연 ‘마트’다. 전통시장의 활기, 흥정보다는 마트의 쾌적함과 편의성이 익숙한 세대다운 선택이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듯, 그 나라의 마트에는 고유문화, 그중에서도 특히 식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글로벌 브랜드 상품들이 장악한 마트에서 그곳만의 크고 작은 차이를 찾아내는 것은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그래서 여행자의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참새가 방앗간에 들르듯 마트에 들른다. 마트의 문을 여는 순간, 바닥난 줄 알았던 에너지가 다시 용솟음친다. 그리고 시한부 이방인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트라는 거대한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친다. 카트를 타고 싱~ 싱~.
치즈의 천국, 프랑스
처음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고작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여행 경험도 많지 않은 쫄보였다. 그 또래의 많은 여자 사람들처럼 파리에 대한 환상과 로망을 가득 안고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 본 파리는 도도했고, 차가웠으며 무엇보다 3걸음 걸으면 1개의 개똥을 밟을 위험에 처하는 3보 1개똥의 현실에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물론 연말에 떠난 여행이었기에 서유럽 특유의 으슬으슬한 겨울 날씨가 분명 나의 우울함 지수 상승에 큰 몫을 했다. 스산한 날씨, 통하지 않는 언어, 시크함을 넘어 무심했던 파리지앵들, 이렇다 할 여행 스킬도 없던 동양인 관광객에게 파리는 한없이 차가운 도시로 기억 남아 있다.
한겨울의 베르사유 궁전은 으스스했고, 오르세와 루브르는 연일 사람으로 미어터져 지쳤던 어느 날. 가격 대비 만족도가 낮았던 파리의 음식이 먹기 싫어 마트로 향했다. 가볍게 샐러드에 와인이나 사자하고 들어간 호텔 근처의 중형급 마트였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마음으로 마트의 구석구석을 훑던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 곳이 있었다.
바로 한쪽 벽면 크기만 한 거대한 냉장고에 가득 채워진 각종 치즈. 기껏해야 노란 체더 치즈, 피자 위에 올라간 모차렐라 치즈, 쿰쿰한 냄새의 카망베르 치즈 정도 알았던 치즈 무식자의 눈에 치즈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족히 수백 종류는 넘을 치즈가 쏟아질 듯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서양에서 온 관광객이 우리나라 마트의 라면 코너나 김치 코너를 가면 이런 기분일까?
한국 라면 하면 빨간 봉지의 신라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짜장 라면, 치즈라면, 해물라면, 카레라면, 육개장 라면, 마라라면 등등 수십, 수백 가지 라면의 신세계가 펼쳐지는 바로 그 상황 말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이름과 종류의 치즈들이 동양에서 온 여행자에게 각자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
누가 봐도 관광객인 내가 치즈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두리번거리니 근처에 있던 푸근한 자태의 직원분이 시식해보라며 작게 자른 치즈를 건넸다.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치즈는 고체 형태의 우유일 뿐이었다. 직원이 건넨 시식용 치즈를 입에 넣는 순간 신선하고도 진한 치즈의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졌다. 그 순간 동행자와 ‘동감’의 눈빛이 오고 갔고, 긴 고민 없이 바로 치즈를 카트에 넣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치즈의 왕’이라 불리는 브리 치즈였다. 카망베르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치즈로 파리 근교에서 생산되는 치즈라고 한다. 직원분께 브리 치즈와 어울릴 화이트 와인까지 추천을 받아 의기양양 마트 쇼핑을 마쳤다. 그날 이후, 프랑스의 밤은 매일 마트의 치즈 탐방으로 마무리되었다.
업소용 아니고 가정용, 중국
중국에 가면 곳곳에서 쉽게 대륙의 스케일을 체감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면 뚝딱뚝딱 하늘을 찌를 듯 세워지는 고층 빌딩, 뭐만 하면 세계 최대의 사이즈, 모였다 하면 수백만이 쉬운 사람들까지… 그중에서도 마트는 평범한 대륙인들의 생활 속 스케일을 짐작게 하는 상품들이 가득하다.
수산 코너는 대형 수족관에 살아 있는 뱀장어나 자라, 개구리가 요리될 날을 기다린다. 또 육류 코너에는 머리부터 발까지 온전하게 달린 오리나 닭 등 가금류를 보는 게 흔한 일이다. 종류 불문, 부위 불문 각 식자재의 매력을 제대로 즐기는 중국인들의 기개를 느꼈던 부분이다.
중국 마트에서 가장 놀란 점은 식용유의 사이즈였다. 중국 음식이 튀기고 볶는 음식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식용유를 그렇게 큰 사이즈로 팔고 사는 줄은 몰랐다. 5리터 식용유를 두세 개씩 카트에 넣는 사람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인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모두 그냥 가정에서 쓸 식용유를 사가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2리터는 작은 편이고 보통 가정집에서는 5리터짜리를 애용한다고. 지인피셜에 따르면 일반 가정에서 5리터 양이면 한 달이면 다 사용한다고 한다.
식용유의 사용량을 생각하면 비만 인구가 많아야 정상이지만 생각보다 비만인들은 많지 않다. 많이들 알듯 중국인들의 뜨거운 차사랑의 효과가 나타난 결과인가 보다. 식용유 판매량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난 후 나 역시 중국에 있는 동안 현지인들처럼 뜨거운 차를 습관처럼 마셔댔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와선 한국인답게 찬물 사랑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소스 덕후의 놀이터, 스페인
누군가는 해외에 가면 당연하게 명품 쇼핑을 즐긴다. 반면 나는 해외에 가면 명품급 양념과 소스 쇼핑에 열을 올린다. 스페인에 가기 전부터 어떤 소스와 양념들을 사야 할지 브랜드와 제품명을 리스트에 적어 두었다. 소금, 후추, 올리브 오일, 파에야 스톡, 아이올리 소스(스페인의 국민 소스, 마늘 마요네즈 느낌) 등등 무수한 제품을 서치했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 갔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종류의 제품이 나를 기다렸다. 욕망에 찬 쇼핑리스트가 무색해지는 현지 상황. 그럴 때는 주로 현지인들이 구입하는 제품을 따라 사는 편이다. 주로 중년 이상의 어머니 쇼퍼들이 나의 선생님이다.
그들은 늘 신중하다. 가격, 용량, 성분 등을 꼼꼼히 비교하고 따진 후에야 쇼핑 카트에 물건을 넣는다. 동양에서 온 작은 여행객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때로는 물어보지 않아도 먼저 추천해 주기도 한다. 그렇게 작은 친절을 만날 때면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원래 사려고 했던 소스나 양념들은 물론,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제품들까지 더해지면 귀국 때의 캐리어는 늘 묵직하다. 그래서 액체나 병에 든 제품보다는 가루나 소포장한 제품을 고르는 편이다. 여행지의 순간들이 그리울 때, 야금야금 꺼내 식탁 위에서 분위기를 내 본다. 한국산 주재료에 현지에서 공수한 소스나 양념만 더해도 충분히 현지 느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습관처럼 마트에 들러 그 나라의 맥주 혹은 와인과 그에 어울리는 마트 식품을 골라 온다. 마감 세일을 하는 조리식품을 곁들여 매일 다른 술 마시며 잠드는 기쁨은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다음 여행을 떠난 나는 어떤 마트에서 또 어떤 보석들을 만나게 될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