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되는 날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인가. 새벽부터 엄마는 숱도 없는 내 머리를 곱게 땋아 주었다. 그렇게 엄마 손에 이끌려 커다란 연회장에 도착했다. 무대 위에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웅성웅성. 처음 보는 사람들의 연사가 이어진 후, 엄마에게 등 떠밀려 사람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아가 할아버지께 꽃다발을 안겨 드렸다. 향수 냄새 짙은 어른들 사이에서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집에 오는 내내 엄마에게 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야?” 그때 엄마가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작가 되신 날이야.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후에야, 그날이 예순 넘은 할아버지께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로서의 두 번째 삶을 시작한 날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줄곧 내 머릿속에 작가는 ‘되는 것’이며, 모두에게 축하를 받을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렸던 것 같다.
그래서 작가님 생각은요?
그래서, 작가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퇴사하고 나서 아쉬운 것 중 하나가 명함이다. 하나 파면 그만이지 않나 싶겠지만, 회사 직급이나 부여받은 내 역할이 아니라 내가 직접 정의한 ‘나의 역할’을 스스로 표현하는 게 꽤나 낯간지러워서 그렇다. 물론 프로젝트 상에서 내가 하는 일은 무척 명확했지만(디자인), 참 희한하게도 디자이너라는 호칭은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붙이고 싶은 명칭은 ‘사장’이나 ‘대표’였다. 하지만 다소 건방진 포부와는 달리 스스로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그런 호칭은 또 과하다고도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유독 미팅이 많았던 이번 주, 세 건의 미팅과 한 개의 모임에서 나를 ‘과분하게도’ 작가라고 불러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호칭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아리송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호칭이 나에게 마냥 편한 것은 아님을 그때 직감했다.
…아 네,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이 골 때리는 질문은, 하필 내가 아주 유창하게(내 생각에)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짚고 미래의 진행 방향을 제안하는 한편 첨부하고 싶은 추가 자료를 설명한 뒤에 이어졌다. 이미 몇 번 뵈었던 담당자였다. 그분이 좋아하는 스타일도 알 것 같고, 팀 분위기도 나름 파악했으니 내 이야기는 ‘정답’일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 생각이 어떠냐니. 그것도 ‘작가’인 내 생각이 어떠냐니. 지금 길게 말한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는 말인가.
음… 물론 저희가 기대하는 방향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희는 조금 더 작가님이 이 프로젝트를 본인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주셨으면 해요. 저희가 컨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내가 제대로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니 하고 싶은 대로 함 해봐라’로 들렸다. 회사 다닐 때에는 숱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묵묵히 듣기만 하던 나다. 언젠가는 나도, 내 마음대로 휘갈겨 그린 선을 누군가 찾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니 하고 싶은 대로 함 해봐라”라는 말이 이토록 무서울 줄은 몰랐다.
작가가 된다는 게 어렵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되는 것’이 어려울 줄 알았지, ‘하는 것’이 어려울 줄은 몰랐다. 결국 그 미팅은 ‘나의 생각을 풀어내야 한다’는 수수께끼 같은 과제만 잔뜩 짊어진 채 마쳤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할아버지는 국어 선생님이셨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줄곧 작가셨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제일 즐기던 놀이는 ‘삽화 놀이’였다. 할아버지께서 아주 짧은 글을 들려주시거나 직접 글을 써 주시면 나는 그것에 맞는 삽화를 그렸다. 그 짤막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떤 옷과 머리를 했는지 몰랐지만 내 나름대로 상상하며 거침없이 그려나갔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이 친구는 왜 이 표정을 지었니?”라든가 “여기 배경은 왜 이렇게 표현했니?”라고 여쭤보셨다. 그때마다 일곱 살의 나는 “그냥, 그럴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내 생각에 확신이 있었더란다.
할아버지는 내가 미대에 가기를 진심으로 바라셨고, 결국 나는 바람대로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할아버지와 나의 짝짜꿍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이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에요. 지금 하는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는 ○○이에요. 여기가 이런 걸 좋아하니 이런 식으로 표현해요.
고것 참 멋있구나. 그런데 작가는 말이다, 너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니, 할아버지. 저는 작가가 아니라 디자이너라니깐요.
할아버지 무르팍에 앉아 자유롭게 생각을 펼치던 일곱 살의 영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할까’를 고민했다. 그런 나에게 ‘너의 생각은 무엇이냐고’ 물어 왔던 이번 미팅이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와 몇 해 전 나누었던 토론(작가와 디자이너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했던)도 생각났다.
그래서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명쾌한 답을 주셨다.
너는 이유가 있어서 할아버지와 그림 그릴 때 그렇게 그렸니?
아뇨,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 그러면 돼.
할아버지는 이어서 말씀해 주셨다. 나의 생각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멋진 말로 내 작업을 설명할 필요가 없음을, 내가 진심이면 다른 사람들도 느낀다는 것을 얘기해 주셨다.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불현듯 중요한 질문이 떠올려 여쭤보았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거나 제 작업을 마음에 안 들어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설득하죠?
뒤이어 할아버지의 현답이 이어졌다.
뭔 상관이니. 내 작업 싫다는 놈이랑 일 안 하면 그만이지. 작가 하고 싶다고 한 것 아니었어?
그렇게 대화를 나눈 후에야, 내가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겁을 먹었다는 걸 알았다. 상대방의 평가에 연연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지난 미팅을 떠올리자 비로소 담당자가 말했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추측’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 생각을 정리하는 행위로 착각했다.
그래서 나는 담당자와 한 이야기나 팀에서 주고받은 정보를 모두 잊기로 했다. 대신 내가 현재 이 프로젝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쭉 적었다. 다소 편향적이기도 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앞서 미팅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방향이 ‘작가 김영지’가 다음 미팅 때 들고 갈 내용임을 알았다.
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같은 주 금요일에는 내가 기획자의 입장으로 참여하여 작가님들을 상대하는 프로젝트 미팅이 있었다. 제목만 공개되고 서문도, 방향도 정해지지 않은 전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작가님들을 처음 뵙는 자리였다.
15명의 작가님은 각각 어떻게 작업을 진행할 것인지 얘기해 주었다. 제목만 보고 기획을 진행했는데, 작업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은 물론 각자가 해석한 제목의 의미도 달랐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연결한 분도 있었고, 평소 작업의 연장 선상에서 주제를 도출하신 분, 평소 하던 작업과는 거리가 있지만 관심 있던 소재로 다시 이야기를 구성하신 분. 각기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누구도 맞다 틀리다 하지 않았다. 발표를 쭉 듣던 나도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뒤풀이에서는 경외 반 호기심 반으로 요즘 하던 고민을 쭉 들려드렸다. 내 생각을 표현하면서 타인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내 생각이 막혀 문득 타인의 생각을 훔쳐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한 작가님은 오히려 나에게 질문을 던져주셨다.
영지 작가님은, 모두 다르게 해석된 15개의 작품 방향성 중 틀리다고 생각하는 게 있었나요?
아뇨, 어떻게 이렇게 다 다를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전 그런 것 같아요. 애초에 맞고 틀리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공감을 얼마나 더 이끌어 내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물론 내 세계에 갇혀서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해요.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내 생각을 충분히 숙성시켰는가, 를 고민하려고 하죠.
하지만 작가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는 점점 작가에서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 다시 할아버지가 신춘문예에 당선하셨을 때를 떠올렸다. 애초에 작가라는 것이 되기 참 힘들어서, 그래서 그렇게 축하하고 상을 주는구나 싶었다. 거기에 작가님들에 대한 경외감과 앞으로 남은 프로젝트에 대한 부담감이 섞여 뒤죽박죽되었을 때쯤, 작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작가는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작가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영감이 되죠. 클라이언트나 주변의 요청이 없어도 표현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영지 작가님께서도 자기 안의 그런 욕구를 느껴서 결정하고 선택하신 것 아닌가요? 그러면 충분히 작가죠. 자기에게 딱 맞는 매개를 못 찾았을 뿐이에요.
줄곧, 그러니까 거의 20년 넘게, 할아버지께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가 되셨다고 생각한 나였다. 나는 디자인과를 나왔으니 디자이너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작가님의 이야기는 아리송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확신이 드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주제를 찾아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나도 ‘새내기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작가님들과 헤어진 위 집에서 조용히 생각했다. 내가 이 전시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것은 뭘까?
작가가 뭐길래
디자이너로서의 나는 나의 밖에서 발견된 주제를 분석하고 연구하고 표현하는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나는, 내 안에서 발견되는 주제에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상대방이 이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보다 내 안의 주제를 충분히 발전시켰는가가 조금 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물론, 아직은 너무나 어렵다. 게다가 나는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반쪽짜리 작가다. 아직도 디자인 일을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의 의미와, 하고 싶은 걸 솔직하게 안다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주에는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같이 사진을 찍었던 그 날과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삽화를 그리던 날이 자꾸 생각났다.
도대체, 작가가 뭐길래.
어려서 그렇습니다
네가 어려서 그래~
열에 여덟 꼴로 돌아오는 답변이었습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이제는 “네, 제가 어려서 그렇습니다”라며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려서 그렇습니다』는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26살 늦깎이 사춘기 영지의 자전적 에세이로, 매주 토요일에 연재하는 것을 ‘일단’ 목표로 삼습니다. 브런치를 구독해주셔도 좋고, 제 글을 메일로 개인적으로 매주 받아보시길 희망하시는 분은 이 링크로 접속해 폼을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메일로는 제가 글을 쓴 뒷이야기와 구독자분께 쓰는 편지를 같이 보내드려요 소곤소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