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한다. 나는 길치다.
우스운 선언문처럼 쓸 필요도 없는 게 이미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길치인 것도 잘 안다. 심지어 아주 전형적인 유형의 길치여서, 길이라고는 1도 모르면서 포부도 당당하게 늘 앞서가는 길치다. 누가 바른 방향으로 데려가면 얌전히 따라갈 것이지 맨날 ‘저쪽이 맞는 것 같은데?’ 하고 종알거리며 고집을 부리는 길치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목적지를 찍고 가다 보면 가야 할 길에 대한 엄청난 확신과 묘한 안정감이 생기는데, 문제는 그게 아무 때나 그냥, 틀린 길에서도 마구 느껴진다는 데 있다. 제정신인, 그래서 나를 믿지 않고 본인이 직접 길을 찾는 일행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영 이상한 데서 우뚝 멈추기 일쑤다.
어릴 때는 어차피 행동반경도 넓지 않고 혼자 어딜 다닐 일도 많지 않으니 크게 문제는 없었다. (물론 그때도 지름길로 집에 온다고 설치다가 길을 잃거나, 버스를 잘못 타 놓고 아무 데나 내려서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하곤 했지만.) 근데 성인이 되고 모르는 곳에 직접 찾아가야 할 일이 늘면서 불편함이 커졌다. 일단은 헤맬 것까지 고려해서 약속 시각보다 한참 일찍 집을 나섰고(그래서 늘 나는 약속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친구였고)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 난생처음 가보는 곳에 가야 하면 미리 사전답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도대체 나는 왜 길치가 된 걸까. 물론 길치라고 해도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기야 하겠으나, 일단 곰곰이 생각해본 ‘길치로서의 나’는 이렇다.
1. 공간을 지각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길치의 시작은 방향치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직선의 방향을 포함하여 3차원의 건물에 이르기까지, 공간을 지각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게 문제다. 중학교 때 했던 무슨 요상한 능력 검사에서 내 공간지각 능력은 4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점 만점이 아니고 100점 만점이었다…)
말하자면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머릿속에서 가상의 공간을 상상하거나 직접 이리저리 돌려가며 적당한 방향을 찾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시작점이 어디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맨날 가던 건물인데도 뒷문으로 나오면 그때부터 멘붕인 거다.
이 건물을 위에서 보거나 반대편에서 볼 때를 상정해서 띠리띠리 원하는 길을 찾는 게 되지 않는다. 길치가 아닌 사람은 잘 이해 못 할 느낌이겠지만 그런 게 어렵다는 게 아니고 아예 ‘되지 않는다’. 모르는 언어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의 기분이랄까. 방법이라곤 일단 그 건물로 다시 들어가서 원래 다니던 문을 찾아 나오는 수밖에 없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으니 방향을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나는 서 있다, 고로 존재한다’ 같은 느낌으로 그저 눈 앞의 생소한 건물과 가로수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만 있다. 왜 이렇게 다 처음 보는 것 같지… 생각하면서. 반대로 보면 정말 새로운 길이다. 아니 당연하잖아,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아예 다른데…
2. 애초에 지리를 잘 모른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는 방향감각을 떠나서도 애초에 지리를 잘 모른다. 내 사회탐구 선택과목은 첫째도 역사 둘째도 역사였고, 하늘에 맹세코 한국 지리와 세계 지리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위치도 헷갈리던 학생이었고 지도라는 건 볼수록 머리 아프기만 했다.
‘우크라이나가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겠어요’ 정도라면 좀 무식해 보일 순 있어도 일상생활엔 큰 문제가 안 될 텐데, 문제는 이게 세계 지리 단위에서부터 대한민국 서울의 우리 동네에 이르기까지 그렇다는 것. 서울에서 나고 자란 토박인데도 나는 전반적으로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머릿속에 든 지도가 전무하다 보니 길을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근처에 떠 있는 부표도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기분이랄까. 남들과 얘기하다 보면 어디서 강변북로를 타고 빠지면 어디로 가고 올림픽대로에서 무슨 대교를 타고 가다 보면 어쩌고…
서울에 있는 그 수많은 고가도로들이며 한강의 대교들을 다들 어찌나 잘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기본적인 큰 틀에 대한 이해가 내게는 없다. 백날 서울을 왔다 갔다 해도 이 동네가 서울의 서쪽인지 동쪽인지도 가끔 헷갈리는 내게는 별나라 얘기다.
3. 기술이 ‘너무’ 발달했다.
그래도 요즘에는 세상이 많이 발달해서 카카오맵이나 구글맵을 켜고 걸으면 내가 지금 선 위치를 실시간으로 잡아준다(가끔 지하도를 통과해야 하거나 갑자기 인터넷이 끊겨서 이게 잘 안 잡히면 일단 걸음을 멈춰야 한다).
일단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리면 친구들과의 카톡이나 보던 영상 같은 걸 모두 중단하고, 양손으로 핸드폰을 꼭 쥔 채 걸음을 옮긴다. 기술의 발달로 길을 헤매는 빈도는 확실히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주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1) 늘 핸드폰만 보고 걸었기에 갔던 길도 다시 가면 새로운 길이다.
주변 경관이나 큰 빌딩 같은 거 확인하지 않고 지도 위의 빨간 점만 보며 걸었기 때문에, 여기가 왔던 길인지 안 왔던 길인지조차 이제 모른다. 봤어도 기억했을 자신은 없지만 아예 보지도 않고 걸으니 기억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
2) 더더욱 ‘길 찾는 능력’ 개발에 소홀해졌다.
어차피 늘 핸드폰을 쥐었고 갖가지 맵은 갈수록 발전하니, 애초에 얼마 안 되던 길 찾는 능력도 굳이 쓸 필요가 없다. 건물에서 나서면 일단 ‘보자-‘ 하고 핸드폰을 켠다. 맵에서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알려줄 때까지 한 걸음도 떼지 않는다. 이러니 원래도 얼마 안 되던 그쪽의 능력이 전부 퇴화하는 느낌이다.
세상 모든 ‘길잘알’님, 존경합니다
뭐가 어찌 됐든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선천적인 능력의 영역이라는 거다. 비록 부모님 두 분 다 길치가 아니시므로 유전의 영향까지 따지긴 애매하지만, 확실히 이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어떤 숙명 같은 거다. 공간을 그리고 지도를 기억하고 방향을 정하는 뇌의 한 부분이 꽉 채워지지 못하고 텅 비어버린 기분이랄까.
아니 누군들 길치가 되고 싶었으리오! 남들한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게 나한테는 왜 이리 어려운지 스스로도 답답하다. 한때 이상형 조건 중 하나로 ‘길 잘 찾는 사람’을 꼽았을 정도로 그냥 길을 잘 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매력 포인트로 느껴질 정도다.
아마 그 세부적 유형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길치 한 명씩은 있을 것. 어디냐고 물어봤을 때 ‘여기 횡단보도 앞…’ 같은 소리나 해대면 나 같아도 정말 짜증이 나겠지만, 그래도 이게 노오력한다고 크게 고쳐지는 문제가 아님을 상기하시고 한 번은 더 참아주시길. 비록 자꾸 틀린 길로 가면서 우기더라도 그냥 오랜만에 아는 길이 나온 것 같아 뿌듯하고 조금 들떴을 뿐이니 귀엽게 봐주시길.
늘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저희 같은 길치들을 보살펴주시는 세상 모든 ‘길잘알’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길치, 이 미로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 화이팅해요. 비록 다들 지도에 코 박느라 길에서 만나도 눈인사도 못 하겠지만, 우리 존재 언제나 화이팅!
원문: 소화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