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저녁. 괜한 눈치를 보며 조금 일찍 사무실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가는 길. 약간 들뜬 마음에 발걸음이 바쁘다. 어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힘든 하루였지만 그래도 오늘은, 제주로 퇴근한다고.
마음이 번다하고 어지러울 때마다 전부 내려놓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그럴 것. 나는 언젠가부터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기보다 콕 집어 ‘제주로’ 떠나고 싶은 순간이 많아졌다. 서울에서 머지않은 거리, 그럼에도 공항에 가서 수속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터다. 혹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휙휙 바뀌고 익숙하지 않은 말들이 시끄러워 영 쉬는 것 같지 않은 해외보다 마음이 편해서일지도. 그 와중에도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청명한 하늘과 바람과 바다가 있는 곳이니 어쩌면 이걸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마치 고향을 그리듯, 콕 집어 제주만을 바라게 되는 이유가 더 있을까. 이미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계절에 십수 번 오간 곳이지만, 내게 가장 근원적인 제주의 느낌은 혼자 떠났던 두 번의 여행에서 비롯한다.
스무 살이 되었으니 혼자 여행 한 번 가봐야 하지 않아?
그렇게 스무 살이 되자마자 훌쩍 제주로 떠났다. 다 컸는데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애써 당당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건만 공항버스에서부터 괜히 긴장해 몸에 힘을 주었다. 난생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길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는 내게 머나먼 외지였다. 어디서 어떤 위협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크게 뜨고 어깨엔 힘을 주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긴장해서인지 설레서인지 몰라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 첫 여행에서 겁도 없이 스쿠터를 빌렸다. 스쿠터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제주를 돌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는데, 돌이켜보면 이제 막 운전면허를 땄던 주제에 영 용기가 과했다. 30분 속성 과외를 받고 올라탄 스쿠터는 생각보다 무거웠고, 빨랐고, 그래서 무서웠다. 계획대로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때라 겁을 잔뜩 먹고도 일단 출발했다.
아직 해가 쨍쨍하던 초가을, 스쿠터를 탈탈거리며 시내를 빠져나온 나는 용케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오른편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애월의 바다는 예쁘기도 예뻤다. 옆으로 쌩쌩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을 신경 쓰며 안전운전을 하느라 그리 오래 시선을 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내려 고기국수도 한 그릇 먹고 해안가에 앉아 쉬기도 하며 협재까지 갔다.
스쿠터 여행이 예정보다 일찍 막을 내린 건 내일부터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이었다. 날 맑을 때도 겨우겨우 타는 것을 비를 뚫고 탈 자신까지는 없었고, 나는 계획을 취소하고 비가 내리기 전 부랴부랴 다시 제주시로 올라왔다. 스쿠터를 반납하고서는 근처 동문시장으로 가서 회를 떴다.
아저씨, 저 혼자 먹을 건데 돔으로 주세요.
그렇게 말할 때는 조금 어른이 된 기분도 들었다. 수줍어서 흥정 같은 건 못하던 때라 분명 비싸게 주고 샀을 테지만. 다음날엔 스쿠터 대신 택시를 갈아타 가며 이곳저곳을 들렀다. 어린 여자애 하나가 세상 처연한 얼굴로 혼자 다니는 게 영 이상했는지 기사님들마다 사정을 묻고 싶어 안달이셨다. 대부분은 남자 친구랑 헤어졌냐는 물음을 벗어나지 못하셨지만. 비가 온대서 스쿠터 여행을 취소했노라 하니 더러 안타까워들도 하셨다. 제주는 매일 비 예보가 있지만 매일 모든 곳에 비가 오진 않는다고.
겨우 2박 3일의 짧은 여행은 심심하게 끝이 났다. 들고 온 책 한 권을 다 읽었고, 내내 음악을 들었으며, 언덕 중턱이나 해안가 바위에 걸터앉아 시선을 멀리 두고 한참씩 멍을 때렸다. 스무 살, 턱없이 어린 나이에도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제주에 가서 처음 알았다. 아, 나는 이런 시간이 필요했구나. 어쩌면 나는 이런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서, 이 순간을 내내 그리워하겠구나, 하고.
혼자 제주를 다시 찾은 건 작년
첫 회사를 그만둔 직후다. 다음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딱 열흘이 남아있었고 나는 두 번 고민 않고 바로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새로운 나라로 떠날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런 건 애초에 선택지에도 없었다. 첫 회사에서 나는 스스로를 참 많이도 갉아 먹었고 그러는 내내 제주를 그리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주에서 보냈던 그 시간을 그리워했다.
일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 이래도 되나 문득 불안해질 정도로 머릿속을 텅 비우고 멍하니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날들. 그간 여행의 경험이 꽤나 쌓여서 이번엔 망설임이 없었다. 일사천리로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를 예약하고 홀랑 제주로 떠났다. 내 첫 회사에서 보낸 3년의 시간, 쌓이고 쌓여 무거운 돌덩이가 된 모든 것을 뒤로 던지고서.
그사이 새로 생긴, 꼭 나 같은 여행자를 위해 지어진 것 같은 숙소에 체크인했다. 무언가 관광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간 여러 친구와 여러 번 제주에 들른 탓에 더 보고 싶은 관광지가 거의 없기도 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요가를 하고, 당근 주스를 마시며 바로 앞의 광치기 해변을 따라 산책했다. 전복죽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설렁설렁 걸어 다시 돌아오면 이미 시간은 한낮.
해가 뜨거워 방에 들어와 책을 읽다가 심심해질 쯤이면 작은 카페에 가 앉아 허송세월을 했다. 해가 저물 때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동네를 돌다가 마음이 내키면 더 멀리 페달을 구르기도 했고, 숙소까지 돌아올 힘이 없어 그저 기다릴 요량으로 길가에 주저앉아 있다가,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어가 혼자 저녁을 먹기도 하고. 여행이라기보단 일상, 그러나 내 실제의 일상에서는 한참 먼 느리고 조용한 일상이었다.
유일하게 발품을 팔아 찾아간 곳은 안도 다다오가 명상을 위해 지었다는 ‘지니어스 로사이’라는 건축물이었다. 이제는 미술관으로 바뀐 내부가 다소 아쉬웠지만 굳이 시간을 내 찾아간 보람이 충분했다. 딱 이런저런 잡념이 치고 들어올 때쯤 방문해 머리를 가볍게 비우고 돌아 나올 수 있었다. 어딘가 다정하게만 느껴지는 공간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깐은 눈을 감아보기도 했다. 명상 같은 거 할 줄 모르지만, 그곳에서라면 하염없이 내부로 침잠할 수 있을 것 같던 순간.
꼬박 일주일을 머물렀으나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그럼에도 그 일주일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내게 이런 시간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걸음걸음 내딛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도 내일의 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보내는 시간을, 지난 3년간 단 한 순간도 가져보지 못했음을.
제주로 갑니다
매년 다시 찾을 때마다 제주엔 관광지가 늘고, 세련된 카페가 늘며, 발맞춰 관광객이 늘어난다. 징검다리 휴일이 붙은 주말이라 오늘 제주로 가는 이 비행기 안에도 사람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나의 제주는 늘 거기 있다. 여전히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숲이, 혼자 앉아 멍하니 시선을 둘 수 있는 바다가, 해가 질 때쯤 완전히 새로운 색을 보여주는 하늘이. 무엇보다도 혼자여야만 했던 나를 위로해준 게, 어쩌다 보니 그곳에서 처음 깨달은 내 어린 자아가 제주에 있다. 내게 꼭 필요했던, 그러나 일상에서는 절대 가질 수 없던 시간들.
깨달은 순간 그대로 각인이 되어, 이제 내게는 제주라는 공간이 그 시간을 독점한다. 어쩐지 계속해서 아래로 끌어 내려지기만 하는 것 같은 요즘이라 나는 오늘 다시 제주로 간다. 이 잠깐의 순간을 빌어 또 1년을 살아낼 수 있길 바라면서.
원문: 소화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