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사노 요코의 에세이 중엔 「책 좋아하는 여자의 이혼율」이 있다.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문학상의 특징을 구별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여자, 다른 이는 가끔 잡지를 들추어 보는 것 외엔 책에 딱히 관심이 없는 초절정 미녀다. 작가는 말한다. 전자는 어느 순간 남편과 이혼을 했고, 후자는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산다고. 그것이 본인 주변의 현실이라고.
물론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분명 심정적 공감은 간다. 내 주변의 일부 남자들이 하는 얘기는 이것이다. “자꾸 지적하는 여자는 너무 피곤해.” 그리고 덧붙인다. “본인들이 엄청 똑똑한 줄 아는데, 따따따 얘기하는 말투도 짜증 나.” 이 말은 팩트와 감정을 분리해야 한다. ‘자꾸 지적한다’가 팩트, 나머지는 모두 감정이다. ‘엄청 똑똑한 줄 안다’는 일방적 가정과 ‘말투가 거슬린다’는 개인의 견해가 섞여 있는 상태. 결국 이 발언을 분석하면 내용은 아주 심플하다. 그냥 여자가 지적하는 게 싫다는 것.
나와 내 주변의 여자들은 사노 요코의 미녀 친구처럼 ‘바라만 봐도 시간이 멈춘 듯한’ 미모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보통 여자들이고, 대부분 책을 좋아하며, 책에서 배운 상식, 철학, 태도들을 현실과 비교하며 살아간다. 그런 배경은 우리에게 ‘자꾸 질문을 던지는 본능’을 만든다.
왜 남자와 여자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기준을 학습 받는지, 왜 똑같이 육아해도 남성은 더 착한 사람이 되며, 왜 일은 내가 하고 저 남자가 승진하는지 등. 따지고 보면 이것은 한 인간의 상식적인 궁금증일 뿐이다. 왜 21C에도 조선 후기식 사고가 여전히 부유하는가에 대한 호기심 어린 질문.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성(性) 대결’로 해석되기 쉬운 질문들이기도 하다.
단지 인간 대 인간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뿐인데 ‘남성에 대한 여성의 불만’ 정도로 쉽게 간주한다. 한마디로 ‘콘텐츠(Contents) 자체에 대한 해석’보다는 ‘지적하는 상황의 불쾌함’에 더 주목하는 격이랄까. 내가 언급한 남성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 ‘절대 아니다’라고 손사래 치겠지만, 진짜 그렇지 않다면 왜 다들 그 유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일까?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정말 기가 세구나!
여성들의 이 같은 질문은 과거부터 계속되어 왔다
교육과 참정권에서 제외된 여성들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달라고 수 세기를 거쳐 주장했고, 그 권리가 획득된 후에도 여전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프랑스의 여권 운동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이란 책에서 말한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본능이 여자 아이를 태어날 때부터 수동성, 교태, 모성애와 어울리게 해버렸으며. 아이는 처음부터 그 인생의 직분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지성이자,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했던 보부아르 역시 사회의 차별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소르본대학의 수석은 사실 보부아르였다는 정설이 있지만 여자란 이유로 사르트르에게 그 공을 양보해야 했으며, 『제2의 성』이란 책 역시 “남성을 조롱하는 책”(알베르 카뮈) 혹은 “위험한 책”(교황청)으로 불리며 끝없이 수난을 당해야 했으니까. “성생활이 문란하다”며 그녀의 사상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남녀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우애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인데 말이다.
정당한 질문은 엉뚱한 대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질문에 “당신의 얼굴은 너무 못생겼다” 외모 비하가 이루어지거나, “잘난 척하네” 발언하는 것이 그러하다.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하는 남성들이 너무 많다는 어느 여성의 고백에 “그러게 짧은 치마를 입지 말았어야지”라고 답했다는 국회의원의 답변은, 질문 자체를 쏙 삼키게 하는 기막힘을 선사한다. 테니스 선수의 가슴을 도드라지게 확대한다든가, 범죄 신고를 유도하는 관공서 포스터에 예쁜 웃음만 짓는 여성 경찰 등 기타 미디어에서 다루는 여성을 향한 시선은 한숨 그 자체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3세기부터 21세기까지 독서하는 여자의 그림과 사진을 소개하며 책을 읽는다는 의미에 주목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자유공간을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독립적인 자존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험하게 여긴 당시 남자들의 반응도 함께 적어 놓는다.
책을 읽을 때 생기는 신체 활동 부족은 상상력과 감정이 억지로 뒤바뀌는 것과 결부되어 근육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래가 들끓고 가스가 차고 변비가 생기도록 만들 것이며, 잘 알려진 것처럼 여자의 경우 특히 생식기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 1791년, 카를 바우어
18세기 교육가가 했다는 이 말은 아주 유치하고 또 유치하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그 단어의 선택만 교묘히 바뀌었을 뿐, 기저를 흐르는 맥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책 좋아하는 여자들은 귀찮아. 자꾸 질문을 하고, 따지려 들고. 저 까다로운 여자, 어떻게든 좀 밟아줘야겠어!
이 책에서는 마릴린 먼로가 ‘섹스 심벌’이 아닌 ‘상당한 독서가’였다는 점도 함께 소개한다. 그녀가 실제 삶의 철학이 뚜렷한 여성이었다는 점은 《라이프 (Life)》라는 잡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섹스 심벌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의 심벌이 되었든 이 심벌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나는 물건 취급당하는 것이 싫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것의 심벌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섹스 심벌이 되겠다. 어떤 여자들은 스스로의 결심이든 유혹에 의해서든 나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전방이나 후방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 중간에서 산다.
귀가 닫힌 남자의 이혼 확률
언젠가 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남자들이 바람을 꿈꾸는 순간’이란 제목이었던 것 같다. 그중 1위 상황은 이것이었다. 자신이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낯선 여자가 “나는 다 이해해요”라는 위로를 하며 고요히 손을 잡아줄 때라고.
왜 괴로운 상황에서 모르는 여자와 손을 잡고 있는가도 잘 이해되지 않지만, 내가 그런 여자가 되어줄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내 남자가 괴롭다고 할 때, 난 그 원인을 묻고 함께 해결책을 찾을 것 같으니까. 필요하다면 괴로움을 주는 대상을 찾아가 적극적으로 따져 물을 자신도 있다. 하지만 내 주변의 일부 남자들은 이런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내 옆에서 자는 동거인이자 남편도 내가 디테일하게 묻고 지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좀 듣는 듯하다가도 “아 좀 고만!” 하며 귀를 막아버리지.
서두에 언급한 요코의 에세이를 다시 한번 언급해본다. “자고로 여자는 예쁘고 말수가 적어야 한다.” 책을 좋아하는 여자와 결국 이혼을 했다는 남성이 강조한 말이란다. ‘이혼’이란 말이 이렇게 심각하게 들리지 않기는 처음인 것 같다. 슬프고 비관적이라기보단 약간 “그럴 줄 알았어”라는 생각이 드는 코미디의 느낌?
이 코미디의 진부함이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 남성들에게 말해봤자 어차피 이해 못 할 것이란 여성들의 비관적인 발언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길 바란다. ‘책 좋아하는 여자의 이혼 확률’만큼 ‘귀가 닫힌 남자의 이혼 확률’ 역시 적극적으로 따져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