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와 커피믹스, 생수에 라면 국물까지 각종 블라인드 테스트로 단련된 마시즘. 그의 호적수는 누구일까? 아마 터키 북동부에 사는 곰이다. 매일 밤 마을에 쳐들어와 꿀을 훔쳐먹던 이 녀석은 한 양봉업자의 아이디어로 가장 맛있는 꿀을 훔쳐먹는 꿀 테이스터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꿀 빠는 삶(?)을 성공시킨 것이다.
우리의 꿀믈리에가 먹은 꿀은 무엇일까? 5종류의 꿀 중에서 곰이 고른 굴은 터키산 ‘앤저꿀’로 KG당 약 36만 원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며 앤저꿀은 다년간의 꿀 도둑으로 알려진 곰이 선택한 꿀로 유명세를 더 얻었다고 한다.
‘음료가 아닌 꿀의 세계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불안감이 떠올랐다. 꿀도 이렇게 잘 먹는데 사람의 음료를 좋아하는 동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음료, 그중에서 맥주를 만들고 좋아했던 동물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 맥주를 만드는 나무늘보가 있다
올해 8월 2일, 미국의 LA 동물원에서는 현지 40여 개 양조장이 참가하는 맥주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마시는 사람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지만, 맥주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천하제일 무술대회 같은 일. 양조장들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깊은 맛의 맥주를 준비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LA 동물원에 사는 나무늘보가 만든 맥주다.
이 녀석의 이름은 ‘찰리(Charlie)’다. 사육사는 찰리의 우리에 호박, 장미, 배, 사탕무 등 맥주에 쓰일만한 재료 리스트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찰리는 아주 신중하게 올라와 있는 재료 중에서 ‘장미’와 ‘배’를 골랐다. 살짝 돌잡이 느낌이 나는 것 같지만, 어찌 우리가 동물 브루 마스터의 큰 뜻을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찰리에게 모든 양조의 과정을 맡길 수는 없었다. 하루에 약 38M만 이동하는 나무늘보에게 맥주 양조를 맡기면 어느 세월에 맥주가 만들어지겠는가. 다행히 LA 동물원과 파트너를 맺은 레스토랑이자 펍인 심지스(Simmzy’s Pub)에서 이 재료를 받아 맥주를 만들었다. 그렇게 찰리가 시작하고, 심지즈에서 끝을 낸 ‘슬로덴 브로이(Slothen Bräu)’가 축제에 한정 출시되었다.
맥주 축제가 열렸다. 나무늘보가 고르고, 독일 쾰쉬(Kölsch, 독일의 쾰른 지역을 대표하는 맥주 스타일. 에일처럼 발효하고, 라거처럼 숙성한 풍미와 시원함을 채긴 박쥐 같은 맥주. 가까이에는 가펠 쾰쉬를 찾아볼 수 있다) 스타일로 만들어진 슬로덴 브로이는 축제의 이목을 끌었다. 마셔본 사람들의 평가는 대체로 즐거워하는 반응. ‘재미있는 술을 마셨다’부터 ‘우수하고 부드러운 맥주’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반면 ‘나무늘보는 맥주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동물과 함께 맥주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찰리 이전에는 레인저(Ranger)라는 곰이 맥주의 재료를 고른 모양(꿀과 히비스커스를 선택했다). 동물마저 이렇게 브루잉의 세계에 들어오다니. 마실 줄만 아는 마시즘은 긴장을 해야 한다.
여기, 맥주로 임금을 받는 군인… 아니 군웅이 있다
술(알코올)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발효된 야자나무 수액을 마시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침팬지의 사례도 있고, 벌이나 딱따구리, 나무늘보도 발효된 수액이나 열매를 먹고 비틀거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알코올 홀릭에 빠졌다기보다는 먹이를 찾다 보니, 하필 발효로 향이 세진 술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다만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참전불곰 ‘보이텍(Wojtek)’을 제외하면 말이다.
보이텍은 어려서부터 폴란드군의 병사들의 손에 길러졌다. 어미가 총을 맞아 죽고 이란 소년에게 구해졌다가, 이를 병사가 구입한 것이다. 병사들은 작고 기운이 없는 보이텍에게 군납 우유를 보드카 병에 담아 먹여 길렀다. 보이텍은 병사들을 엄마로 생각하고 잘 따랐다고 한다.
무럭무럭 자라서 183cm에 200kg을 돌파(너무 무럭무럭 자란 거 아니냐)한 보이텍은 인기쟁이로 거듭났다. 두 발로 걷기를 좋아했고, 차를 탈 때도 조수석에 탔다고 한다. 사병들과 샤워를 했으며, 맥주와 담배를 함께 했다고 한다. 문제는 폴란드군이 이탈리아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애완동물은 소유가 금지되어 있으며, 함께 이동을 할 수도 없었다. 고심 끝에 동료들은 보이텍을 폴란드 육군 제2군단 포병 사단 제22 탄약 보급 중대에 입대시킨다.
보이텍은 이란, 이집트, 이탈리아를 오가며 동료 병사들과 우정을 나눴다고 한다. 군웅(軍熊)으로 업적도 많이 쌓았는데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인 ‘몬테카시노 전투’에서는 포탄을 나르는 역할을 맡았다. 혼란한 전쟁통에서도 무거운 포탄을 놓치지 않고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다고 한다.
또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이텍은 어느 순간 부대의 마스코트가 되었고, 실제 22중대 공식 심벌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다른 부대에서는 전설의 군인 같은 셈.
거기에 보이텍은 부대 내에 침입한 스파이를 잡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보이텍이 모든 사병을 기억하기에 잡았다는 설과 인간적으로 부대에 곰이 걸어 다니는데 어떤 스파이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있겠냐라는 설이 충돌한다. 어찌 되었었건 스파이를 잡은 공로로 보이텍은 무려 ‘맥주 2박스’와 ‘따뜻한 욕조’에서 반나절 동안 놀 수 있는 포상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안타깝게도 보이텍은 동료들과 계속 함께할 수 없었다. 공산화가 진행된 폴란드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947년 11월 15일 ‘하사’ 계급으로 전역한다. 그리고 에든버러 동물원에서 남은 생을 살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제22중대 보급중대장 안토니 헤우코프스키(Antoni Chełkowski) 소령 허가 없이 다른 동물원에 옮기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동료들은 보이텍을 잊지 않고 종종 찾아왔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폴란드어가 들리면 곧장 달려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전우에게 담배 달라는 시늉을 하였고, 몇몇 동료들은 무단으로 울타리를 넘어가 보이텍과 놀았다고 한다. 보이텍은 1963년 12월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왕립전쟁 기념관, 캐나다 전쟁박물관에는 보이텍 기념비가 있고, 여전히 보이텍을 기리는 맥주가 나온다.
우화 같은 맥주를 만난다는 것
똑같은 맥주인데 동물이 만들거나, 마셨다고 하니 기분이 남다르다. 보이기에 예쁘거나 좋아서가 아닌, 이야기에 먼저 취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찰리와 보이텍을 생각하며 어떤 맥주를 마셔야 할까?
원문: 마시즘
참고 문헌
- 지적이고 과학적인 음주 탐구 생활, 허월, 더숲
- Animal testing: Turkish beekeeper finds thieving bears prefer premium honey, Alison Rourke, The Guardian, 2019.8.29
- LA 동물원, 나무늘보가 선택한 재료로 만든 맥주 제작해, 유성호, 소믈리에타임즈, 2019.8.3
- You can drink beer made by a sloth, The animal club, 2019.7.30
- A sloth at the Los Angeles Zoo helped pick out the ingredients for a new beer called ‘Slothen Brau’, Phoebe French, The Drinks Business, 2019.8.3
- U.S. Zoo Debuts Slothen Bräu, a Beer Brewed by a Sloth, FELICIA LALOMIA, Vine pair, 2019.7.30
- Slothen Brau, UNTAPPD(Drink socially)
- [이야기가 있는 아침] 전쟁에 참가한 ‘하사’불곰, 백재현, 아시아경제, 2014.12.2
- 그냥 곰이 아니라 전우였다, 김민구, 조선일보, 200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