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야, 네 글 친구한테 보여주었는데 친구가 그것을 읽고 용기를 얻어 퇴사했어!
고등학교 친구 L양이 들뜬 목소리로 내게 전했다. L양에게 분명 어떤 답변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을 스치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뿔싸. 하지만 물론, 머리로만 되뇔 뿐 입으로 전하지는 않았다. 대신 겸연쩍은 축하 인사를 전했다.
허허, 축하드린다고 전해줘.
그렇게 나는 졸지에 ‘퇴사 선배’이자, 어쩌면 (사회의 일원으로서 4대 보험의 혜택을 받고 앞이 창창한 20대의) 퇴사를 종용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진심으로 L 양 친구의 선택을 응원한다. 하지만 고작 퇴사 5주 차 선배인 나는, 환호보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아버렸다.
이번 주는 퇴사 5주 차다. 첫 주 차에만 해도 나는 거의 퇴사 전도사였다. 사실 지금도 퇴사를 후회한 적은 단 하루도 없다. 하지만 간간이, 아니 거의 매일 ‘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하며 탄식한다. 특히 프리랜서 또는 자영업자의 타이틀로 이 세상에 나와, 자신의 두 발만으로 우뚝 선다는 것은 정말 다른 이야기다.
물론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눈치 볼 상사도 없고, 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펼치는 프리 선언 후의 삶은 로망 그 자체이다. 하지만 프리로서의 삶이 마냥 핑크빛의 로망으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다. 오늘은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 또는 앞으로 내가 조금 더 발전시켜야 할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이 그리운 순간
머릿속에 퇴사라는 글자가 박힌 이래로, 근 몇 주간 퇴사에 관한 글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제로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는 그 어떤 퇴사에 대한 긍정적인 글들도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퇴사 반대 글이나, 프리랜서로 사는 삶이 얼마나 고된지 쓴 글이나, 신세 한탄하는 글들만 눈에 들어온다.
퇴사에 대한 마음은 연애 고민과 비슷하다. 상담이나 설득이 불필요하다. 정말로 퇴사할 사람들은 어떻게 설득하든 퇴사하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글을 보고는 다시 마음을 고이 접어두기 마련이다. 나도 퇴사하기 전에는 정말로, 충분히 퇴사와 프리랜서로서의 고충을 간접 체험했다. 하지만 결심이 선 이후로는 어떤 고충도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 나는 아직 젊으니까. 어리니까.
- 나는 부지런한 편이니, 일은 계속 따올 수 있을 거야.
- 일 좀 못 따오면 어때, 지금 부업으로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있잖아?
게다가 나는 퇴사하는 시점에서 부업으로 벌어들이던 수익이 회사 월급과 비슷했다. 그래서 ‘경제적인’ 부분의 고충은 나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지금의 나는 현재의 통장 잔고뿐 아니라 3개월 후, 6개월 후, 심지어 1년 후의 잔고까지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당장 벌어들이는 수입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니다. 월급과 비교했을 때 많으면 많았지 더 적지는 않다. 그럼에도 지금 들어오는 일들이 ‘언제까지고 있진 않다’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자동적으로 ‘일이 들어오지 않을 시점’을 대비하게 된다. 몸이 너무 지칠 때마다 타던 택시는 지나쳐 보내고,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던 립스틱은 잠시 내려놓는다.
퇴사를 고민하던 기간에 친구 P양과 약속을 했다. 정말로 퇴사하면 연말에 2주 정도 그리스 여행을 떠나자고. 그때는 내가 시간적으로 자유로우니 당연히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퇴사하고 나니, 비행깃값과 숙박비를 다시 한번 찾아보게 되었다. 게다가 성수기의 크리스마스 때 지금 운영하는 사업지를 놓고 떠나는 것도 마음이 썩 편할 것 같지 않더라.
휴가 일수가 문제지, 월급을 따박따박 받았다면 쿨하게 같이 여행을 떠났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프리’하지 않아
그래서 계획과는 다르게, 들어오는 일들을 쳐내지 못한다. 참 감사하게도, 퇴사 후에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이 많다. 덕분에 계속 일을 받는다. 오히려 다른 때였다면 거절했을 일들도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잠깐 나는 짬을 활용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계속 받고 있다.
그리하여 퇴사 후 딱 2주간 유지되었던 일과는 아래와 같다.
- 9:00 기상
- 9:00–11:00 글쓰기 및 개인 작업
- 12:00–13:00 에어비앤비 돌보기
- 13:00–17:00 프리랜서 작업
- 18:00–21:00 개인 프로젝트 준비 또는 자유 시간
- 24:00 웹툰 보다가 취침
그리고 퇴사 5주 차, 나의 지난주 스케줄은 아래와 같이 변해버렸다.
- 6:30 기상
- 8:00–10:00 창천동 3호점 준비하기
- 10:00–11:00 시공자분 뵙기
- 12:00 디자인 작업 미팅
- 13:00–17: 00 외주 작업
- 18:00- 21: 00 다른 외주 작업
- 21:00–24:00 창천동 3호점 준비
- 1:00 am 취침
거기에 토요일이었던 어제는 물론이고 근 3주간 주말이 사라졌다. 오히려 출근과 퇴근 개념이 모호해지니, 일이 많아지고 스케줄에 쫓길수록 회사 다닐 때보다 더욱 지독한 야근과 주말 출근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와 지난주에는 나 스스로에게 선물로 줬던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시간마저 뺏겨버렸다. 그랬더니 갑자기 스트레스 지수가 팍 올라가 버렸다. 분명히 ‘프리’랜서인데, 어째 나는 전혀 프리하지 않더라.
프리랜서도 온·오프가 필요해
스케줄에 쫓겨 헉헉댄 후에야, 프리랜서도 ‘출퇴근’과 ‘주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지금 누워있는 침대가 책상이 될 수도 있고, 예뻐서 들어간 카페가 직장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프리랜서에게는 일과 휴식을 ‘끄고 켜는’ 온오프 장치가 너무나도 필요하다. 전에는 연락을 시도 때도 없이 받고 밀린 일 역시 주야불문 진행했다. 그런데 이제는 스케줄러를 쫙 펴고 확실하게 근무 시간과 휴식 시간을 구분한다.
- 오전 8–10시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개인 시간’으로 정했다.
- 에어비앤비 관련 연락은 10시부터 6시까지만 받되, 그 외의 시간에 나 대신 답장을 해줄 사람을 지정하기로 했다.
- 업무 관련 연락은 칼같이 10시부터 6시까지만 받기로 했다. (메일 답장 포함)
- 하루 동안에 다 처리하지 못해 밀린 일들은 저녁 7–10시 사이에만 진행한다.
- 일요일은 절대적으로 쉬는 날로 정한다. 그래서 브런치 연재 날짜도 일요일로 바꾸었다.
- 토요일은 범퍼 날로 정했다. 쉬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되, 혹시 일이 다 마무리되지 않을 경우 ‘범퍼’ 역할을 하는 날로 정했다.
특히 나는 ‘범퍼 타임’을 지정하기로 했다. 아무리 칼같이 스케줄을 끊어내고, 연락을 안 받아야겠다 마음먹어도 일은 언제나 예상과 다르게 들어올 수 있다. 항상 스케줄에 허덕였던 이유는 이 ‘예상치 못한 업무량’을 잘못 조정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내가 예상치 못한 일 폭탄을 맞을 경우 나를 서포트할 인력을 붙여주거나 나를 다른 일에 배치하는 등 전반적인 대처를 도와준다. 하지만 내가 홀로 서는 순간, 내가 잘못 세운 스케줄은 오롯이 나의 탓이 된다. 그렇기에 밀린 일들을 처리할 ‘범퍼 타임’과 ‘범퍼 요일’이 필요하더라.
혼자는 지쳐
프리랜서나 1인 사업가가 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홀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에 다닐 때는 고충을 함께 나눌 동료도,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질문할 사수도, 회사가 ‘정해준’ 업무량과 목표도 있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독립하는 순간부터는 모든 결정과 역할을 스스로 해야 한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작은 소일거리를 처리할 수 있어도, 큰일은 처리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부족해서인 탓도 있겠지만, 앞으로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동료’를 찾아야 한다. 동료라 함은, 내가 업무나 사업 측면에서 고민이 있을 때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같은 프리랜서나 자영업자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나는 대개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 나의 일과 고민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과 친구들은 나 홀로 결정할 때 막히는 것들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다.
꼭 내 편에 서서 조언해주는 사람 말고도, 같은 길을 ‘먼저’ 걷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하다. 프리 선언을 한 이후에는 시간 관리도, 일 관리도 매일매일 새롭게 배우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보다 하루라도 앞서 나아간 사람들의 조언이 언제나 도움 되더라.
예전에는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매일 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는다. 고충을 듣고, 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일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배우는 기분이 든다. 간혹 나와 생각이 비슷하거나 배울 점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은 컨택해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너무 감사하게도, 대다수가 자신의 경험을 다 솔직하게 들려준다. 그 경험들이 피와 살이 되더라.
회사에서 나와 홀로 서는 순간, 나에게 일을 하나하나 가르쳐줄 사수가 없어진다. 그러니 내가 사수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내 일을 보조해줄 사람을 준비해야 한다. 홀로 있어 보니, 원하던 디자인 일이나 그림 작업을 하는 시간보다 부가적인 일을 하느라 시간을 뺏길 때가 많았다. 작게는 짐을 옮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세금이나 매출 계산까지 해야 했다. ‘별거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알고 보니 ‘별거’인 경우가 아주아주 많다.
나의 경우 특히 짐 옮기는 게 힘들었다. 차도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냐 싶었는데, 내 체력은 박스 1개 옮기는 것만으로도 바닥나는 저질 체력이더라. 매번 가족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내 힘으로 부족한 것을 해야 할 때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장 돈이 나간다. 앞서 내가 했던 경제적 고민 이야기와는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 보았을 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100퍼센트의 효율로 하는 것이 프리랜서로 오래가는 길이라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다.
그래서 그제는 아예 에어비앤비를 나 대신 관리할 매니저를 고용했다. 내가 운영하는 셰어하우스 방 한 칸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월급 50만 원도 지급하는 조건이다. 사실 계산하면 매번 청소업체를 부르는 쪽이 훨씬 경제적이다. 그러나 부업에 내가 들이는 스트레스와 고민을 이 친구가 덜어준다면 매우 효과적인 딜이라고 생각했다.
프리랜서에게 낭만을
홀로 독립해 먹고사는 길은 만만치 않다. 일을 계속 따오는 것도 일이고, 일하는 것도 일이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도 일이다. 그러나 일에 치이다 보면 문득 이 ‘왜’라는 본질을 잊을 때가 많다. 그러니 홀로서기로 결심한 이상, 낭만을 잊지 않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퇴사를 막연히 꿈꿀 때는 핑크빛의 낭만적 라이프스타일을 기대한다. 갑자기 훌쩍 떠나는 여행, 모두 출근한 평일에 찾아가는 카페와 전시관. 나도 그런 삶을 기대했고, 처음 몇 주간은 지켜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에 치이다 보니, 낭만을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더라.
낭만을 잃은 퇴사자는 직장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정말 차이가 없다. 클라이언트는 항상 신경 쓰일 것이고, 일에 치여 쉬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기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없으니 불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낭만이 있는 퇴사자는 당장 수입이 없어도, 일에 치여도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이루는 나날만으로 직장에 다닐 때보다 훨씬 큰 만족도를 얻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낭만을 즐기는 시간이 있다. 이 글과 그림이 그렇다. 예전부터 바라던 ‘작가’의 삶을 이루기 위해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꿈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 시간이 나에게 큰 이득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글을 통해 수입이 나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꽤나 많은 시간을 공들이기까지 않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보다는, 일하는 사이사이 카페에서 글을 쓰는 나 자신이 훨씬 멋있게 느껴진다.
게다가 10월에는 말레이시아로 훌쩍 떠난다. 물론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리랜서이기에 가능한 선택이기도 했다. 업무 차원에서 가는 말레이시아지만, 추가적으로 몇 주 더 있으려고 한다. 동남아의 원시림, 이슬람 사원, 그리고 휴양지를 상상하며 서류를 검토하는 내 모습. 회사에 다닐 때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 아무리 일에 치이고, 돈에 쫓기고, 불안한 미래를 살아도 나의 모습과 나의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아직 나는 ‘홀로서기’를 했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겨우겨우 회사 다닐 때의 월급과 비슷한 한 달 수입을 만들고, 일은 전보다 즐겁기는 하지만 양이 준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아직도 세금과 얼마 전 폭탄 맞은 건강보험료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한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후회하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오히려 매일매일 ‘진작 그만둘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요즘은 지속적인 프리랜서 생활을 위해 나만의 체계를 구축하려 노력한다.
L양의 친구가 퇴사했다고 했을 때 등골이 서늘했던 이유는, 그 친구가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 그 친구도 내가 겪은, 아니 아직도 계속 겪는, 시행착오를 당분간 겪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사 5주 차. 아직 많이 버벅거린다. 다크서클은 어째 전보다 더 내려온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낭만 있는 프리랜서다. 조금씩 체계를 잡아가니, 나의 다음 주, 그리고 다다음주는 더 나아지겠지!
어려서 그렇습니다
네가 어려서 그래~
열에 여덟 꼴로 돌아오는 답변이었습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는데, 이제는 “네, 제가 어려서 그렇습니다”라며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려서 그렇습니다』는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26살 늦깎이 사춘기 영지의 자전적 에세이로, 매주 토요일에 연재하는 것을 ‘일단’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브런치를 구독해주셔도 좋고, 제 글을 메일로 개인적으로 매주 받아보시길 희망하시는 분은 이 링크로 접속해 폼을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메일로는 제가 글을 쓴 뒷이야기와 구독자분께 쓰는 편지를 같이 보내드려요 소곤소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