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칸투칸 8F에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
나에게 있어 자존감은 일정한 주기로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돌고래 같다. 온몸이 물 밖으로 나와 빛날 만큼 자존감이 넘치는 시기가 있고 나면 반드시 깊은 수심으로 가라앉아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자존감이 떨어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반복을 여러 번 겪으면서 오르내림의 주기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을 때도 곧 세상이 나를 등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하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 반대로 아무리 암울한 때도 결국은 다시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버티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적어도 지난 10년간 ‘자존감’은 서점가의 주요 화두였다. 힐링, 위로, 공감, 욜로, 심지어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하는 식의 태도까지 그 표현 방식은 달라졌으나 결국 모두 자존감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이었으니까.
베스트셀러 목록에 소위 말하는 ‘감성 에세이’가 늘 한 자리 차지한 걸 보면, 그동안 많은 사람이 참 힘들었구나 싶다. 다들 아시겠지만 몽글몽글하고 아련한 느낌의 일러스트를 겸비한 감성 에세이들이라고 해봤자 결국 ‘다 잘 될 거야. 너는 너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야.’류의 메시지를 동어 반복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무명작가이자 전업 작가로서 자존감이 훼손되는 경험은 꽤 괴롭다. 돈을 따박따박 잘 벌거나, 글밥과 별개로 하는 사업이라도 있으면 나을 텐데 오로지 글 쓰는 것만이 생업이자 자아실현의 발로인 나에게 자존감이 훼손되는 일은 치명적이다. 일단 돈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이 어렵고, 돈이 안 되는 글을 쓰는 것은 더욱 자괴감이 든다. 이도 저도 안 돼서 글을 쓰지 않고 누워 있으면 세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우울해진다.
기분 전환 겸 쇼핑이라도 해볼까 싶으면 ‘돈도 못 벌고, 글도 못 쓰는 주제에’라는 자기 경멸이 엄습한다. 결국 라면에 밥이나 말아 먹으면서, 몇 년째 실패해왔던 다이어트를 또 지속한다. 그 역시도 다 먹고 나서 거울을 볼 때면 자존감이 뚝뚝 떨어질 게 뻔한 행동이다. 정도가 심각해지면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려서 주변의 위로나 응원도 아니꼽게 들린다. 감성 에세이류의 문장을 읽다가 화가 치밀 지경에 이르면 거의 바닥이다.
그런 못난 시기를 주기적으로 겪으면서도 나는 용케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왔다. 김연수나 김영하, 백영옥, 박준 시인의 글 덕분일 때도 있었고 정승환과 장필순, 포스트 말론과 비틀스의 노래 덕분일 때도 있었다. 뜨거운 물로 오래 하는 샤워, 봄도 아닌데 무작정 시작한 대청소를 하는 동안 창으로 비치는 햇살 덕분이기도 했다.
일단 현관을 나서 걸었던 거리, 일단 가본 헬스장에서 땀 흘리며 했던 운동 덕분이었다. 냉장고에 애매하게 남은 식재료들을 꺼내 찌개나 볶음 요리를 하고, 퇴근하고 돌아온 아름이와 그 음식을 나눠 먹은 덕분이었다.
얼핏 아무 맥락 없어 보이지만, 내 자존감 회복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뭐든 시작하기’다. 자존감이 떨어졌을 때 우울보다 두려운 건 무기력증이다. 그저 우울하기만 하다면 다음날 찢어버릴지언정 글이라도 끄적일 텐데, 무기력증에 잠식당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된다.
성욕과 식욕, 수면욕, 배변욕 같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제외하고는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는다. 심할 경우에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 자존감과 무기력증은 서로의 빈틈만을 노리며 잠복하던 천적 사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나는 그게 뭐가 됐든 일단 해보려고 노력한다. 당장 샤워하는 일부터, 별로 더럽지도 않은 집을 청소하는 일 따위를. 영 힘이 안 날 땐 볼륨을 높여 노래를 틀어둔다. 집 안에 있는 게 갑갑하면 집 앞 놀이터라도 산책하러 나간다. 운 좋게 길고양이라도 만나면 금세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그래도 마음이 회복되지 않으면 헬스장으로 가 운동을 하고, 번화가를 걷고, 걷다가 괜히 군것질도 해본다. 장담하건대 이렇게 뭐라도 계속하다 보면 점점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자존감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딱히 자랑스러운 행동을 한 게 아닌데도 그렇다.
정신과 의사이자 자존감 전문가라는 윤홍균 작가는 저서 『자존감 수업』에서 자존감을 3개의 축으로 나눠 설명한다. 자기 효능감, 자기 조절감, 그리고 자기 안전감.
자기 효능감은 캐나다의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에 의해 소개된 개념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기대와 신념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기 효능감이 뛰어난 사람은 다소 버거운 상황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 조절감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생을 꾸려가고 싶은 욕구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충분히 유능한 사람도 자존감이 낮은 경우가 있는데, 그건 자기 조절감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이라도 ‘내 의지대로 선택하고 완성한 인생’이 아니라면 자기 조절감은 바닥을 칠 수도 있다.
마지막 자기 안전감은 내 인생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유지된다는 감각이다. 자신의 상황을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자기 안전감이 훼손된다. 당장 눈앞의 위험을 직면할 때도 자기 안전감은 훼손되지만 흔히 인생의 먼 미래를 막연히 걱정하기 시작할 때, 자기 안전감은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정도 월급으로는 몇십 년을 모아도 얼마 되지 않을 텐데, 결혼은 어떻게 하고 아이는 어떻게 낳아 기르지? 부모님 노후를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러다 보면 당장 별 위험 없이 지내는데도 자기 안전감이 훼손되면서 불안을 겪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자존감 회복을 위해 선택했던 ‘뭐든 시작하기’는 주로 자기 조절감과 자기 안전감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작가로서 당장에 자기 효능감을 고취할 수는 없었다. 하루아침에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아주 사소한 과업일지라도 온전히 내가 선택한 일을 해낸다는 점에서 자기 조절감이 충족됐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사소한 과업, 그래서 당장에 해결해낼 수 있는 과업이었기에 먼 미래의 불안을 잊고 현재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일단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 그러면서 자기 안전감도 차차 회복되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친구 J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빵을 만들면 빵이 생기는, 노력에 대한 성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일이(내게는 특히나 엄청) 긍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을 읽었다. 친구의 문장일까, 어쩐지 어디서 읽은 것 같기도 한데. 아마 김연수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자존감 회복 이야기를 하면서 내내 그 문장이 떠올랐다. 나의 자존감 회복 방법이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빵을 만드는 일이다. 빵을 만들면 빵이 생기는 일이다.
글 초입에 ‘나에게 있어 자존감은 일정한 주기로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돌고래 같다.’라고 적었다. 그건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결국 자존감이 곤두박질쳤다가 다시 떠오르는 반복은 돌고래의 헤엄처럼 나를 어디론가 향하게 할 것이다. 괴로운 와중에도 침잠하는 삶이 아니라 나아가는 삶이라는 것.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자존감 회복은 늘 성공적일 것이다.
원문: 김경빈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