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제 노동자들에겐 주 52시간 근로법의 적용이 생계를 위협한다고 들었다. 이 글은 이 법이 애당초 타깃으로 삼았어야 할 연봉제 직장인의 애로사항을 담은 글임을 미리 밝힌다. 월급은 정해져 있는 데다 야근을 올릴 수 있는 한도까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매일 공짜로 몇 시간씩 일하는 사람들에게 ‘저녁 있는 삶’을 주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졌을 법이니까.
주 52시간은 법정근로시간 40시간, 최대 연장근로 12시간으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이러한 52시간 집계엔 아직까지 다양한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1. 해외 영업 출장(특히 공휴일 및 주말이 포함된 출장)
해외 출장 자체가 52시간 산정을 애매하게 만든다. 잠자는 시간까지 회사에 반납하게 하니까…. 공휴일을 끼고 출장을 가는 경우 더더욱 그렇다. 우리 회사에서는 5명 넘게 회사 사정으로 이번 추석 때 해외 출장을 간다. 그런데 공휴일은 법정 근로일이 아니다. 이번 출장엔 주말 두 번에 추석까지 껴있다.
휴일 근로가 이제 연장 근로의 개념이 된 것은 올바른 인식이나, 회사마다 연장 근로가 하루에 인정되는 한도가 있기 때문에 (보통 최대 2시간에서 4시간) 출장지에서의 나머지 시간은 생략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출장지에서는 9 to 6보다 오히려 일정이 빠듯하게 돌아갈 때가 많아서 퇴근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다(출장 간 사람에게 그 지역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 가본 적 있느냐고 물어보면 아마 하나같이 그런 것 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할 것이다.) 오전부터 낮까진(점심시간 포함)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저녁에도 클라이언트를 만나거나, 밀린 본사 업무를 처리하거나, 다음날에 있을 미팅 준비를 한다.
한국과 시차가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라면 저녁 시간은 보고 업무 및 본사에서 접수되는 요청 사항을 처리해야 하는 시간이다.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 출장 결과 보고서를 쓰면서 오기도 한다. 혼자 가는 출장이라면 그나마 이 정도지 누군가를 수행하는 출장은 24시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출장지에서는 시간 외 근무조차 올릴 수 없다.
2. 고객사와 만나는 저녁(술) 자리
야근은 거의 안 하지만 고객사와 만나는 저녁 자리가 잦은 국내 영업직 친구들은 야근하고 수당을 받는 나보다 억울하다. 2차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3차까지 가는 경우가 아직도 허다하다.
이런 경우 상사 및 상대사 비위 맞추랴,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해명하랴, 야근 수당도 못 받고 건강만 망치면서 감정 노동을 하는 것인데 52시간 연장근로 집계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새벽에 집에 귀가하니 지하철이 끊겨 택시비까지 나온다. 평소에 술을 너무 자주 마셔서 질려버린 그들은 막상 친구들을 만날 땐 가벼운 반주도 꺼린다.
3. 나보다는 출근을 빨리해야 하지 않겠니
주 52시간을 지키자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빨라진 회사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출근 시간은? 9시 출근인 회사도 8시, 아무리 늦어도 8시 20분엔 신입사원들이 앉아있다. 그렇지 않은 회사들도 있겠지만, 당연히 신입사원은 그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야 마땅한 존재라고 여겨지니까. 그럼 그 추가 시간은 집계에서 누락되어도 괜찮은가.
신입사원이 아니더라도 은근히 회사에 대한 충성도 및 성실함의 판단 기준을 빠른 출근 시간에 두어 근무 평가에 적용해 버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그리고 본인 슬하의 직원이 자신보다 출근 시간이 늦으면 핀잔을 준다. 그렇게 일찍 회사에 오고 싶으면 혼자와도 상관없을 텐데 대체 왜 주변에 피해를…. 그런 상사 밑에서 어쩔 수 없이 늘 조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4. ‘눈 가리고 아웅’: 52시간 때문에 집으로 가져가는 업무, 기록상 퇴근을 찍고 하는 업무
간혹 보면 집에서 보고서를 쓰는 친구들이 있다. 그걸 왜 집에서 하냐고 물어보면 이미 야근을 올릴 수 있는 한도가 다 차 버려서 회사에서 컴퓨터를 못 켠다는 것이다. 이 친구들이 집에서 보고서를 쓰면서 들이는 시간은 그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퇴근 시간이 기록된다는 친구들은 연장 근무 12시간이 초과되지 않도록 신경 써서 퇴근을 찍고 계속 일을 해야 한다.
52시간 집계의 사각지대
1번과 2번은 해외 영업이나 국내 영업부서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영업활동이다. 없앨 수 없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상해줄지에 대한 고민이 조금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사 컴퓨터가 켜져 있는 시간만이 근무시간은 아니다.
회사마다 52시간을 관리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이 다르겠지만 야근 일지만 관리하는 회사들이 있다. 이런 경우 3번에 해당하는 ‘조근’은 명백한 52시간 집계의 사각지대가 된다. 우리 회사의 공식 출근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빠른 출근을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말자.
4번의 경우 인력 충원, 합리적인 업무분장, 시간 단축을 위한 업무 효율화 등 52시간 도입에 필요한 본질적인 준비를 안 한 채 그냥 도입해버린 후, 직원들에게 야근 올리지 말라며 고통만 안겨주는 경우다. 업무는 그대로거나 늘어나는데 회사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다면 집으로 가져가거나 기록상 퇴근한 척을 할 수밖에 없고,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당만 줄어든다.
가장 궁금한 점은 이 법을 도입만 해놓고 적용 범위가 적합한지, 잘 지켜지는지, 의도에 맞게 적용되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등에 대해 왜 그 누구도 관리를 하지 않는가이다. 취지만 좋으면 뭐 하나,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데.
내가 기재한 4가지 경우 외에도 사각지대는 정말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 법이 시행되는지조차 체감이 안 되는 기업이 허다하다. 법이 생겼는데도 왜 난 이렇게까지 일을 더 하나, 그저 억울함만 쌓일 뿐이다.
원문: 상추꽃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