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의 시대
최근 유튜브가 뜨겁습니다. 영상을 통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금액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유튜브나 해볼까?’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자, 그럼 어떤 걸 찍어볼까?’라는 이어지는 질문에 주제와 콘셉트의 부재에 절감하며 결국 씁쓸하게 월급날을 기다리는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콘텐츠는 이미 누가 했거나 대다수가 할 수 있다’라는 준엄한 사실을 자각하면 무언가 할 동력 자체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미 누가 그 자리를 선점해 실행조차 하지 못한 무기력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가슴 아픈 경험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브랜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수많은 제품이 온라인상에 진열되면서 소비자의 선택권은 넓어진 반면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는 매우 고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소비자의 분별 있는 선택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라인상 좋은 제품이 너무 많아서, 비슷한 제품이 많아서 감히 제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누군가 했다는 느낌’은 결론적으로 브랜드의 행보를 소극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정보는 많으나 보폭을 넓힐 수 없는 것이 현재 브랜드가 가진 무기력함이랄까요. ‘의미 있는 콘셉트가 아니라면 시작도 할 수 없다’라는 무력한 상황이 무한경쟁의 현실 속에서 현재 브랜드가 겪는 고충일 것입니다.
가장 창의적인 볼펜을 만드는 방법
일전에 브랜드 잡지 매거진 《B》를 만든 JOH 조수용 대표와 대담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창의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법에 대한 소주제를 통해 청중들과 여러 가지 질문이 오가던 중 조수용 대표가 던졌던 물음은 ‘가장 창의적인 볼펜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수용 대표의 대답은 심플했습니다.
- 전 세계 여행을 떠난다.
-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볼펜이란 볼펜은 있는 대로 다 수집한다.
- 수집했던 볼펜 중 의미 있는 최적의 조합을 찾아낸다.
꽤 상투적인 해법이었습니다. 말에는 분명 과감한 비약이 있고, 많은 부분의 가치가 생략되었지만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창의적인 제품은 수많은 수집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
온라인과 SNS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품과 수집의 행위는 어쩌면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정보와 인사이트를 다뤄야 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인사이트를 담보하며 물건을 수집하고 돌아다니는 일은 어리석은 일로 보일 수 있죠.
하지만 실물이 갖는 효용은 남다릅니다. 목적성 있는 수집을 통해 산업의 인사이트를 얻는 방식은 꽤 고전적이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카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블루보틀의 성공 요인을 뉴스와 책으로 접하고 분석하는 것과 블루보틀의 전 매장을 돌아다니며 커피를 마셔보고 방문 고객과 이야기해보고 분위기의 감도와 서비스의 수준을 체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유형의 해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성공 신화의 기본 스토리 역시 비슷합니다. 뱅엔 울룹슨 창립자 뱅과 울룹슨은 오디오에 미쳐있는 수집광이었고, 스티브 잡스는 PC에 미쳐 워즈니악과 차고에서 모든 PC를 수집하고 해체했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한국 기업 발전의 대부분은 이런 수집과 카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0년대 1년의 반을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전자 기업의 모든 제품을 뜯어내고 카피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죠.
누가 더 많은 레퍼런스를 보유하는가
차별화와 남다른 콘셉트가 중요해진 브랜드 세계에서 수집이 갖는 가치는 다양한 레퍼런스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은 ‘모방은 창조의 연속이다’이란 말을 남기며 그림뿐 아니라 다양한 잡동사니를 수집한 수집광이었습니다. 그가 의료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집에는 만여 종이 넘는 수집품이 쌓여있었다고 하죠.
기존 인더스트리 간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창의적인 작업에 대한 경계 역시 점점 흐릿해집니다. 패션을 다루는 방식으로 잡지를 다루고, 디자인을 다루는 방식으로 전자기기를 다루고, 럭셔리를 다루는 방식으로 커피를 재해석하는 식입니다. 기존의 인더스트리를 기존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뭔가 심심해져 버렸죠. 이쪽의 레퍼런스를 통해 저쪽의 산업을 해석하고 저쪽의 레퍼런스를 통해 여기의 산업을 혁신하는 것이 더 우아해 보입니다.
관점의 재해석을 통해 산업의 혁신이 재편되는 가운데 지속 가능한 레퍼런스의 확보는 브랜드 입장에서 꽤 중요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누가 더 많은 레퍼런스를 갖는가’가 결국 업종 간의 경계를 허물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루이비통의 버질 아블로
그런 부분에 있어 버질 아블로의 등장은 파격적이었습니다. 루이비통이 2018년 남성복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한 38세의 흑인 디자이너가 바로 버질 아블로입니다. 스트릿 브랜드인 오프 화이트의 수장인 아블로를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미디어와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건축학도로 시작해 10년이 넘도록 스트릿 브랜드를 아울렀던 풍운아였습니다. 스트릿 브랜드인 파이렉스 비전과 오프 화이트의 혁신과 같은 성공을 얻어내면서 그 명성은 유명해졌지만 그럼에도 그의 근본은 스트릿이었습니다.
루이비통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가진 다양한 디자인 레퍼런스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점점 빠르게 변화하는 패션계에서 완고한 오리지널리티로는 발전의 한계가 보인 것입니다. 루이비통의 최고경영자 마이클 버크는 아블로를 클래식과 모던을 잇는 다리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산업 간 경계가 무색해진 가운데 럭셔리의 행보 역시 한층 과감해진 것이죠.
브랜드가 된 수집 이야기
취미로써의 수집을 통해 성공적인 브랜드를 일궈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프레임 몬타나는 작년 말 안경 하나로 오픈 일 무려 4억 원을 상회하는 매출을 달성해낸 대박 스타트업입니다. 브랜드 네임과 히스토리가 중요한 클래식 안경에 신생 업체인 프레임 몬타나의 성공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클래식도 스타트업이 돼?’라는 의문이 존재했죠.
프라임 몬타나는 몬타나 최로 불리는 CEO 최영훈 씨의 취향과 고집으로 일궈낸 브랜드입니다. SNS에서 클래식 패션으로 유명한 몬타나 최는 프라임 몬타나의 브랜드 론칭 전 클래식 안경 사업에 대한 로드맵을 끊임없이 팔로워들과 공유했습니다.
그가 제품을 만들어낸 방식은 간단합니다. 이미 자신이 수집하는 수백 개의 프랑스, 아메리칸 빈티지 클래식 안경 중 CEO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것에 대한 최적의 조합입니다. 프레임에 대한 밸런스와 디자인, 사용자 편의성, 색채 등의 최상의 조합을 고려해 소수 몇 개의 제품으로 압축해나갔습니다.
프레임 몬타나의 초기 제품 구성은 12가지 스타일로 간단합니다. 클래식이라는 정서적 색채에 프랑스와 아메리칸이라는 시대적 빈티지를 포함하고, 범주를 세분화했습니다. 클래식 안경이라는 넓은 범주를 12개의 제품이라는 좁은 깔때기를 통과시켜나가는 과정을 SNS 팔로워 모두와 공유했습니다.
1개의 안경 콘셉트가 완성될 때마다 그는 그 안경만이 갖는 유니크한 가치와 의미를 디테일하게 묘사했습니다. 수백 개의 클래식 안경 수집을 통해 형성된 그의 안목과 관점은 많은 팔로워의 공감과 지지를 얻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죠.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수집하십니까?
꽤 고리타분한 해답을 알아내는 것과 실제 그 해답을 행위로 옮기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수집을 통해 다양한 레퍼런스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은 꽤 무식하고 무의미한 작업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 너무 많은 교묘한 복제와 인터넷이라는 무한한 정보에 둘러싸여 실물이 지니는 디테일한 가치를 놓치는 건지도 모릅니다.
의미 있는 콘셉트는 단순히 온라인과 SNS의 무한한 정보를 통해 추출되고 만들어지진 않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실제 구매행위를 통해 제품을 만져보고 차곡차곡 모으고 일일이 사용해보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야만 제품이 갖는 효용과 사용되는 맥락의 본질적 순간에 더 가까이 접근할 것입니다.
유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콘셉트를 보유하는 것은 소수의 경우입니다. 일단 만들어 보고 반응을 보고, 그 피드백에 따라 수정하면서 결과적으로 좋은 콘셉트가 나오는 것이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새로운 인사이트의 지속적인 발현은 결국 지속적인 행위의 인풋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관점의 시대에 그 관점을 이해하고 재해석하기 위해선 나름의 확고한 레퍼런스가 필요합니다. 그게 안경이 되었든 시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말이죠. 의미 있는 레퍼런스는 제품을 실제 사용함으로써 마주하는 불편과 짜증, 반대로 환희와 소름의 순간을 모아가며 제품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철학을 세울 때 더 자연스럽게 발현합니다.
더 우아한 제품을 가져야 더 우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말을 남긴 건 가브리엘 샤넬이었습니다. 더 좋은 취향을 갖고 더 좋은 제품을 아는 사람이 분명 더 좋은 콘셉트를 알아보고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콘셉트의 어렴풋한 조각을 채워나가는 것은 결국 실물의 경험이 주는 자신감 있는 고증과 감각일 것입니다.
원문: 밤은부드러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