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볼 것인가.
같은 것을 보더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지인 중 한 분은 꽤 유명한 소믈리에인데 눈앞에 나타난 모든 현상을 와인과 연결해 말해주곤 합니다. 동해의 바람을 피부로 느끼면서 나파밸리 화이트 와인의 싱그러움을 설명하고, 대관령 설악의 공기를 폐부로 느끼며 칠레 안데스산맥 숙성 와인의 깊은 맛을 이야기하는 식입니다.
매번 당혹스럽지만 반면에 한 분야의 깊은 이해로 다양한 삶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삶을 풍부하게 감상하는 것의 주안점은 한 가지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에 바탕을 둘 때가 많습니다. 자신만의 프레임이 확고한 나머지 전체적인 삶의 현상을 그 분야의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창문이란 프레임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풍경이 제한된 의미로 해석될 때 더 깊은 감상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서울 길거리에서 남산 전체를 바라보는 것과 고급 호텔의 라운지에서 보는 남산의 전경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죠.
전체를 관망하기보다 작은 프레임을 통해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는 것이 감상의 질을 더 높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화가는 나에게 1억 원의 고가 액자를 선물해준다면 10억 가치의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프레임이 제시되느냐에 따라 제품이 가진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라하는 반면 가치 없는 제품으로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상상력은 좁은 프레임에서 나온다.
부분적인 제한을 통해 그 가치를 더 깊게 만드는 일은 비단 풍경과 예술이 아닌 브랜드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지속 가능한 지구’라는 좁은 프레임을 통해 자신들이 판매하는 모든 제품을 재해석하고, 다이슨은 ‘디자인’이란 프레임을 통해 소비 가전을 하이엔드(High-End) 예술품의 영역으로 안내했습니다.
대부분의 의미 있는 브랜드의 과거를 되짚어보면 세상에 없던 물건을 통해 혁신하겠다는 의미심장한 케이스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브랜드 영역에서 기존의 방식이나 관습을 더 정교하게 해체하고 분석하여 기존 관점을 뒤엎는 자신만의 프레임을 세우는 경우가 대다수죠.
스트릿 패션은 꼭 중저가 브랜드로 남아야 할까요? ‘스트릿도 럭셔리가 될 수 있다’가 슈프림이 제시한 새로운 문법이었습니다. 슈프림은 ‘스트릿 패션의 럭셔리화’라는 좁은 프레임을 통해 길거리 문화를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도전했습니다. 특히 타 브랜드와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기존에 사람들이 가진 스트릿 패션의 조잡한 이미지에 신화적인 상상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중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과의 협업은 전 세계적으로 수일 만에 전 품목을 완판하는 신화를 보여줬습니다. 스트릿의 좁은 프레임을 폭넓게 해석해나가며 슈프림은 비주류문화였던 스트릿 패션을 고급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레임이란 제한된 한 가지의 관점이 오히려 제품 해석의 깊이를 늘린 것입니다.
점심에 뭐 먹을까?
소비자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직장 점심에서 오늘 뭐 먹을까? 에 대한 질문으로 ‘네가 먹고 싶은 걸로 골라’라는 무책임한 답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상상력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죠. 오히려 ‘일식 중에 골라볼까?’ 혹은 ‘익선동 안에서 골라볼까?’라는 의미 있는 제약을 줄 때 더 큰 상상력을 펼칩니다.
인스타그램은 창업 초기 일상의 아름다움을 공유할 도구로써 ‘정방향의 프레임’만을 고집했고 유저들의 선택은 쉽게, 상상은 깊게 만들었습니다. 트위터는 메시지의 글자 수를 140자 이내로 묶어둠으로써, 바인은 동영상의 길이를 6초 이내로 제한함으로써 유저에게 더 풍부한 상상력의 틀을 제공했죠.
다이소는 1,000원 샵 콘셉트로 시작해 현재 거의 2조에 육박하는 매출을 올린 저가 브랜드의 신화 같은 존재입니다. 다이소가 제품을 해석하는 능력은 발군이죠. 소비자가 초창기 다이소에 주목한 이유는 1,000원이란 제한된 프레임을 통해 어디까지 제품을 확장하고 해석할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가 브랜드건 저가 브랜드건 나름의 프레임을 구축하는 것은 소비자에게 안정감과 동시에 상상력에 대한 강력한 틀을 제공합니다. 나름의 프레임이 있다는 것은 소비자가 어느 정도의 예측 가능성과 신뢰성이 있다는 뜻이죠. 소비자가 다이소에 갈 때 느끼는 감정은 ‘비싸서 못 사겠다’라는 불안한 감정은 없습니다. 다만 그 저렴한 가격 안에서 ‘뭐까지 살 수 있을까?’라는 안정적인 상상력을 갖게 되는 것이죠.
수용 범위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브랜드
의미 있는 많은 브랜드는 이와 같이 안정된 상상력이라는 프레임에 기반합니다. 인상적이지만 너무 급진적이지 않은 중도적인 입장이면서도 그 안에서 극단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프레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산업 디자인을 개척한 레이먼드 로위는 소비자는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수용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과감한’ 그러면서도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제품에 매력을 느낀다는 마야(MAYA : Most Advanced yet Acceptable)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성공적인 디자인은 브랜드가 제시하는 안정된 틀 안에서의 극단적인 모험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산업 디자인의 영역을 개척하며 제시한 제품 디자인의 첫 번째 조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브랜드는 자신이 제시하는 안정된 프레임이 있느냐? 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브랜드만의 차별화된 프레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브랜드 혁신의 방향성이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용기 있게 나름의 브랜드 관점을 정하는 것입니다.
파타고니아와 지구 이야기
1973년 설립된 파타고니아는 등산 장비를 다루는 아웃도어 브랜드입니다. 설립 초기부터 꾸준히 주장해온 ‘건강한 지구 만들기’는 기업 사명으로 쓰일 정도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에고가 강한 브랜드죠. 2011년 블랙프라이데이에 시작한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Don’t Buy this Jacket)’는 왜 그들이 지속 가능한 지구를 만드는지에 대한 슬로건을 집약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고객에게 재킷을 사지 말고, 고쳐 입으라고 주장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재킷을 물려주고 아들은 또다시 오래된 재킷을 고쳐 입음으로써 지구를 구하라고 조언합니다.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븐 쉬나드 회장은 ‘우리가 최고의 옷을 만드는 이유는 오랫동안 옷을 입어 자원을 아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패스트패션이 주를 이루는 글로벌 패션계에 역설적으로 이 재킷을 사지 말라는 주장은 꽤 굳건한 관점으로 비칩니다.
파타고니아 프로비전은 2016년 파타고니아가 지속 가능한 지구에 대한 일환으로 시작한 식품 브랜드입니다. 프로비전은 시리얼은 물론, 샐러드, 맥주, 연어까지 취급합니다. 어떻게 보면 상관없어 보이는 식품 사업으로 발길을 돌리는 파타고니아의 행보가 소비자의 지지와 공감을 얻는 건 왜일까요?
파타고니아는 지속가능성을 위해 연어의 적정 수확량을 정하며, 수확도 지역민이 직접 연어를 잡는다고 합니다. 맥주와 시리얼 등 타 가공품 역시 최대한의 자연 친화적 방식을 연구하여 제조하고 수확합니다. 아웃도어 브랜드가 식품을 파는 게 논리적이고 합당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는 건 파타고니아의 브랜드 사명이 멋, 패션이 아닌 ‘지속 가능한 지구’에 초점이 맞춰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관점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가치에 동의하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마련입니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파타고니아는 자신들의 프레임을 고집했고 그에 맞는 팬을 끌어들이게 됐죠. 그쯤에선 비싼 가격도 무의미합니다. 고객은 지속 가능성에 대한 프레임을 지지하고 파타고니아를 선택할 수 있게 때문이죠.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프레임 이론의 창시자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주문에 바로 코끼리를 연상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주목했습니다. 구체적인 주문에 대한 프레임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은 곧바로 그 프레임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트럼프를 쉽게 기억하는 건 그가 확고한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임이 없다면 기억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브랜드는 어떤 것인가요? 애플, 나이키, 샤넬 등은 브랜드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설명할 나름의 관점을 가진 브랜드입니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으면 금방이라도 운동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 샤넬 백을 메면 몸가짐이 좀 더 우아해지는 것은 브랜드가 구축한 나름의 정서가 그 사람의 행동 프레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관점을 담은 브랜드는 유명 브랜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유명해서 기억한다기보단 오랫동안 자신만의 관점을 고집했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후 관점을 둘째 치고 결론적으로 그 브랜드는 소비자의 갈증을 풀어줄 명확한 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브랜드는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습니까? 삶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관점이 있으신가요? 수많은 브랜드가 난립하는 가운데 자신만의 관점이 없는 심심한 브랜드는 소비자에게 쉽게 인식될 수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용기 있게 자신의 관점을 제시할 때입니다.
원문: 밤은부드러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