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보호법 26조 1항, 일명 ‘셧다운제’에 대해 게임산업계가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이 위헌이 아니라 판결하였다. 판결문에 대해서는 링크를 걸어둔다.
개인적인 입장을 밝힌다면, 헌재의 판결 결과에 대해서 상당한 실망감을 갖고 있다. 미성년자의 야간 훈육은 가정이 담당할 일이며, 셧다운제는 가정의 교육으로 해결해야 할 미성년자의 과다한 게임 이용을 요식행위로서 억제하려고 하는 시도라 보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상 입시 위주의 정상적인 클럽활동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는 학교가 갖는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고, 학부모의 잦은 야근 역시 빠질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이런 문제들을 제쳐놓고 산업계에게 사실상 기만적이며 실효성이 떨어지는 규제를 가해 미성년자의 야간 게임 몰입을 억제하려고 하는 것은 훈육이 목적이 아니라 산업계를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 시도라고 보며, 이 법이 매우 과거퇴행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있다.
나는 셧다운제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헌재의 셧다운제 합헌 판단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내 기준에서 그 복잡한 문제는 셧다운제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
다양한 문제에서 눈을 돌린 헌재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헌재는 판결문에서 인터넷게임에 대한 법적 정의를 명확히 하고, 청소년보호법 26조가 가진 법적인 문제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기본권과 죄형법정주의, 침해의 최소성 및 법익 균형성, 행동자유권 및 자녀교육권에 대한 침해 여부가 있는지를 검토하며, 합헌 의견의 법관과 반대 의견의 법관 모두 그 안에서 기본적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헌재에서 내린 판결문은 그 결정요지와 논리의 흐름 모두 마치 체크리스트처럼 이 법률이 법의 원칙과 특성, 헌법적 의무와 권리에 어긋나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헌재의 판결이 기본적으로 이 법률이 갖는 헌법과 관계된 부분을 검토하는 것이지, 이 법률이 가진 사회적 지향성과 가치관의 충돌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성년자가 게임에 몰입해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게임을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쟁이 가능하다. 학생이 야간에 게임하는 것에 대해서 부모가 간섭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옳은가? 학부모는 자녀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위치인가? 게임이란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가? 미성년자의 훈육에 있어서 가정과 정부, 교육기관, 산업계가 각각 맡아야 하는 역할과 그 사이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셧다운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제기되는 논쟁은 다양하다.
그러나 헌재는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가치관의 논쟁에서 보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법적인 논리를 통해 헌재는 법에 대한 판단을 한다.
헌재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기기를 이용하는 인터넷게임에 대하여 그 적용이 유예되고 있는데, 이는 이 사건 금지조항의 적용범위를 축소하는 것이어서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사항이라 보기 어렵고, 일부 인터넷게임에 대하여 적용이 유예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사건 금지조항에서 정한 ‘인터넷게임’의 의미가 불명확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실제로 자녀교육이라는 가치관 측면에서 봤을 때, 게임이 정말로 문제가 된다면 모바일게임 역시 문제가 된다. 애니팡에 빠진 아이의 숙면은 지킬 필요가 없고, LOL에 빠진 아이의 숙면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헌재의 입장에서 모바일게임에 대한 유예는 모순과 기만성의 표현이 아니라 법의 효력을 일부 축소시킨 것으로 해석되며, 그러므로 기본권 제한으로부터 오히려 법적으로 면죄부를 일정 부분 얻게 된다. 법이 개입하는 영역이 줄었으므로.
자충수 위헌 소송, 게임의 입지만 줄였다
이런 헌재의 판단을 나는 법적인 이유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미묘한 문제인데, 헌재는 이 이슈에 대해서 ‘헌법적으로’ 판단하는 기관이지, 게임 중독에 대해서 앞서 밝힌 다양한 가치관의 논쟁이 도달한 사회적 결론을 논하는 집단이 근본적으로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는 가치가 투영된 법리가 가지는 영역이고, 후자는 법이 아닌 순수한 가치의 논쟁이며 가치관의 논쟁이다.
이 차이는 내가 생각해 봤을 때, 셧다운제 찬반 진영에서 헌재의 결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차이다. 내가 생각하는 셧다운제 정국에서 헌재의 판단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역설적으로 헌재가 ‘어떻게 판단했느냐’가 아니라 헌재가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헌재가 이 법안에 대해서 결정을 내림으로서, 그 이전까지 있어왔던 부모와 자녀, 학부모와 학생, 정부와 가정, 산업계와 학부모 간에 존재해 왔던 다양한 가치관의 논쟁이 사실상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법적인 중립성과 헌법의 권위로 완벽하게 무장된 헌법재판소가 이 법안에 대해서 합헌이라 판단했으니 더이상 이 이슈에 대한 ‘가치관의 논쟁’은 필요없게 되고, 이런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은 헌재의 권위에 대드는 바보가 될 것이다.
사법부에 의존하려 드는 이상한 정치
나는 이 현상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서 셧다운제 자체보다 더 큰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현상에 관해서 말이다.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 일반이 일상적인 정치의 정국에서 가져야 하는 올바른 포지션은 무엇인가? 입법부, 즉 국회의원은 국민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선출된다. 이런 투표라는 선출과정을 통해 입법부는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성을 지니게 되며, 입법부 내에서의 가치를 둘러싼 정치적 충돌은 동일한 이슈에 대한 서로 다른 국민의 가치관의 존재를 반영한다. 이 충돌은 다수결과 합의, 거래라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 해결되고, 그 결과로서 국민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입법부에 의해 ‘법’이라는 옷을 입는다. 그렇게 법이 탄생한다.
법은 천부적인 질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가치관에 옷을 입혀 ‘강제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법은 바뀔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바뀌어야 한다. 사회 구성원의 중심적인 가치관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변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다루는 헌법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헌법은 좀 더 근원적인 가치, 그러니까 정치제체, 영토, 국민의 기본적인 의무와 권리와 같은 것들을 유형화했기에, 그리고 가치를 법으로 바꾸고 나면 가치에 대한 여론이 바뀌는 것만큼 법이 빠르게 바뀌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에 헌법의 변화에는 보수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헌법에 대한 수정에는 일반적인 법률에 비해서 여러 안전장치가 걸려 있는 것이다.
가치가 법이라는 옷을 입으면, 그 법은 사법부에 의해서 앞으로의 사회 구성원의 행동을 제한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다. 즉 입법부는 국민의 가치관을 대리해 법을 만들고, 사법부는 그 법을 해석하고 강제력을 행사해 사회에 그 가치관에 맞는 행동을 강제하는 집단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정치의 사법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와 관련된 헌법소원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에는 정당이 주체가 되든, 다른 이익집단이나 시민단체가 요체가 되든 가치에 관련된 문제를 사법부에 의해 최종날인을 받으려는 유행이 일어났다.
사법부, 어느새 입법의 영역으로 들어오다
그런데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법관을 투표로 뽑고 있는가? 아니면 여론에 맞지 않는 판결을 한 법관은 국민이 투표로 끌어내릴 수 있는가? 아니다. 입법부와 달리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는 본질적으로 고도의 법적 판단력을 요구받는 평가를 통해 인원이 충원되는 비선출직이다. 사법부는 법적인 판단력을 요구받는 자리이지, 국민의 여론을 대표하길 요구받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법부가 선출직이 아닌 것은 사법부가 국민의 여론을 대표해야 할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아서다. 매우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국민정서법’에 의해 문제를 다루는 것, 또는 ‘인민재판’이 옳지 않음을 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사회에 존재하는 법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법적인 판단이고 사법적 심판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사법적 판단과 강제는 국민의 대표성이 아니라 법적 판단력을 가진 집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에 관한 능력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집단이 사법부가 된다.
사법부는 입법부에 의해 가치가 유형화된 법률을 법적 논리로 해석해 사법적으로 강제하는 집단이며, 가치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사법부는 법을 만드는 집단이 아니라 법을 적용하는 집단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법률을 만들거나 법률을 개정해 새로운 가치를 적용하는 일, 즉 ‘입법부’의 기능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개입이 억제되어야 한다. 가치가 법에 우선하며, 법은 가치의 일부를 ‘정치’라는 사회적인 합의 과정을 거쳐 강제화한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시스템의 집행자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애초에 헌재에 맡긴 것부터가 문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게임업계가 셧다운제에 관한 결론을 ‘헌재’에게 위임하게 되는 과정이 매우 우려스럽다. 사실상 이것은 다양한 개인과 조직, 산업계, 학부모, 또는 학생까지 연관된, ‘셧다운제’라는 정치적 이슈가 사실상 입법부의 정치적 과정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거나 최소한 불만을 억제할 수 있는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지향하는 가치를 대변하고, 정치적 협상과 논쟁을 거쳐서 사회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가치의 지향을 법으로 구체화시켜야 할 입법부에서 이 과정이 실패함에 따라, 게임업계는 입법부에 하소연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 이슈를 헌재에 헌법소원을 제기함으로서 사법적 중립성과 헌법적 권위에 의해 꼬여버린 상황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런 셧다운제와 같은 흐름은 기본적으로 위험하다. 헌재는 이런 법안이 갖는 사회적 가치와 지향점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적 타당성을 고려하기 위한 집단이다. 물론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도 여론에 의해 혹형, 약형과 같은 여러 법률적 판단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그 압박은 입법부의 그것에 비하면 거의 의미가 없으며, 사법부는 그런 압박을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사법부는 정치중립적이길 요구받으며,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셧다운제는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법률을 개정함으로서 어떠한 종류의 가치관을 사회에 강제하기 위한 시도고, 기본적으로 입법부의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할 이슈이다. 여기서 사법부가 끼어들면서 입법부의 정치과정이 갖는 모순이 생긴다. 가치관을 투영하기 위해 입법을 하는데, 사법부가 그 입법에 대해서 이미 이전의 가치가 투영된 법률에 의해 최종날인을 하고 그것이 입법에 관한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이다.
결국 과연 청소년이 야간에 게임을 할 자유에 관한 사회적 논쟁, 청소년의 교육에서 어디까지가 가정의 섹터고 어디까지가 업계와 정부의 섹터이며 무엇을 규제해야 하고 무엇을 자율에 맡겨야 하는가와 같은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가치관 충돌과 논쟁, 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존재해온 입법부의 정치는 사법부의 강력한 중립성과 권위에 의해 물거품이 되며, 언급된 가치 자체에 대한 논쟁이 무력화된다.
헌재가 이미 판단준거를 주었기에, 더이상 논쟁하는 것이 변화를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학부모의 야근’과 같은 관련된 가치판단의 문제는 언급하는 것이 우스운 상황이 된다.
확대되는 입법부의 모순
입법부의 정치가 갖는 모순도 확대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사회에 투영하고자 입법을 요구하고 입법 과정을 벌이는데, 사법부는 이미 예전부터 존재하던 가치가 투여된 법률에 의해 문제를 판단한다. 법이란 옷을 입지 못하고 있던 가치는 과거의 가치가 투영된 법에 의해 먹혀버리고, 남는 건 이미 존재하는 법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법이라는 시스템에 손을 대는 것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입법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처리해야 하고, 사법부, 특히 ‘헌재’의 개입은 헌법적 가치에 비추어 봤을 때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될 수 있으며 비가역적인 변화가 될 수 있는 이슈에 대한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이슈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동성애자의 결혼’이나 ‘낙태’ ‘안락사’와 같은, 이익집단의 충돌이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의 규정과 관계된 것들로 이 경우 헌재의 판단은 사람들에게 가치판단을 위한 중요한 레퍼런스로서 활용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법대로 합시다 법대로!’ 하고 외치는 수준에서 써먹는 기관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를 포함한 사법부가 입법에 관련된 정국의 해결사로서 등장하는 일은 한국 정치에서 마치 유행처럼 번졌지만, 사실 이것은 입법부의 정치가 사실상 마비되었음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헌재가 정국마다 등장하면서 헌재의 판단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가치판단을 위한 준거로서의 가치도 매우 가벼워지니 헌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셧다운제는 결국 헌재의 손을 빌렸다. 이렇게 정치의 사법화를 보여주는 사례는 또 하나가 추가되었다. 이런 지난한 가치의 논쟁을 생략시키고 복잡한 협상과 조율이 없는 편리한 수단에 정치세력과 이익집단이 의지하게 될수록, 우리 사회에서 입법의 정치가 갖는 의미는 경량화될 것이며, 시간이 흐르며 가치관이 변화하는데 그것을 반영한 법률의 변화는 억제될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줄다리기를 하는 입법부의 줄에 정치의 사법화는 석고를 부어서, 사회에 필요하거나 사회 구성원이 요구하고 있는 변화를 억제시키게 된다. 사회는 안정적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중요시 여기게 된 가치관을 법제화하는 데 있어 이미 존재하는 법을 통한 판단이 개입되는 방식이라면 꽤 곤란하다.
사법에 대한 의지를 버려야 한다
셧다운제 합헌 결정이 가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생각하기엔 ‘이것이 헌재에 올라갔다’지, ‘헌재가 이것을 어떻게 판결했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떻게 말하면, 위헌으로 판결되었을 경우 셧다운제 반대 집단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정치의 차원에서 보면 입법부의 역할이 무너지고 헌재가 헌법적 판단과 권위를 통해 이익집단의 손을 들어준, 사실상 사법에 의지하는 정치의 결과물이나 다름없으며 이 역시 한국 정치에 나름대로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예상이다.
앞으로 셧다운제에 관심이 있는 정치세력과 이익집단이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할 일도, 이것이 헌재가 합헌이라고 평가했다고 다가 아니라 우리의 지향점의 문제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위헌’이라는 말과 ‘사회적으로 옳지 않음’은 같은 말이 아니며,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물론 매우 어렵고 지난하며, 한국 사회에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봤을 때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갖는 본질 중 하나라고 단언하고 싶다.
출처: 잉간 블로그 /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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