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고로 인해 연일 잠을 제대로 못 이루시고, 자도 잔 게 아닌 것 같고, 즐거운 소식을 들어도 마음껏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압니다. 저도 사실 그렇습니다. 지인들과 개드립을 치고, 맛있는 걸 먹고, 유난히 좋았던 금요일에 햇볕을 쬐고. 그러다가도 문득 속에서 울컥울컥하고 뜨거운 게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애써 쌓아둔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나 보람들이 거대한 분노와 우울 앞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걸 반복하지요. 이게 어디 저 만의 일이겠습니까.
진도에 내려가 계신 한 어머니의 인터뷰,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되었죠. 삼풍 때 화만 내고 아무 것도 안 했더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오늘 딸이 저 깊은 바닷속에 있노라고. 당신들은 나를 동정할 일이 아니라, 분노하고 행동하라고. 이런 엉망진창의 세상을 바꾸라고. 안 그러면 이런 일들은 또 반복 될 것이라고.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그 인터뷰를 보고 고통스러워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일인시위도 하고, 추모의 뜻을 담아 촛불집회도 하고, 국회의원들에게 청원서를 보내는 웹사이트를 홍보하시기도 하더군요.
분노를 단순히 분노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동력으로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모순과 병폐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됩니다.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대형사고들이 터질 때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중 적잖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를 내고 “누군가 제대로 좀 감시를 해라”라고만 말하고 연일 세상 전체를 썩었다고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격렬한 분노는 오래 품고 있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분노를 불을 뿜듯 한 번에 연소시키곤 하죠. 안 그러면 사람을 속부터 태워들어가 잡아 먹어버리거든요. ‘울화(鬱火)가 치밀어오른다’라는 표현이나, ‘홧병(火病)이 난다’는 표현에 불 화(火)자를 쓰는 게 괜히 쓰는 게 아닙니다. 그 분노를 얇게 펴서 꺼지지 않게 관리하면서 오래 지속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벽에다 대고 소리라도 치고, 길거리에 나가서 시위라도 하면 그 분노를 낳은 세상이 바뀔까요. 제 경험상으로는 꼭 그렇진 않더군요. 물론 시위로 ‘나 이 나라 주권자고 나 지금 이러이러한 이유로 몹시 화가 나 있어’라는 걸 보여줄 순 있습니다. 그렇게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아주 많으면, 오래 쌓인 관성을 고치는 걸 거부하는 관료조직이든, 위정자든, 기업이든, 당장에는 겁을 먹고 ‘앞으로 잘 하겠으니 이제 화 좀 그만 내시고 들어가십시요’라고 말을 듣는 시늉 정도는 합니다. (물론 그래놓고서는 나중에 도로교통법 위반, 집시법 위반 했다고 범칙금 딱지를 날리기도 합니다만서도.) 하지만, 우리가 생업을 내팽개치고 매일 거리로 나갈 수 있나요? 생계는 둘째 치고, 만족스러운 변화가 올 때까지 매일매일 그 정도의 분노를 유지한 그 정도의 인파를 모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분노를 가장 허무하지 않게 활용하는 것은 세상을 좋은 곳으로 바꿔가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단체,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경고할 수 있는 단체들에 힘을 보태거나 가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민단체가 될 수도 있고 협동조합이 될 수도 있으며 정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이 비극을 틈타 또 좌파가 제 세를 불리려 선동질을 한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전 노동당 당원이고,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보복성 손배·가압류를 멈추는 것을 그 방향으로 삼는 모임 ‘손잡고’의 공동제안자입니다. 매달 당비를 내고, 조금 여유가 있는 달에는 ‘손잡고’가 추진하는 운동인 노란봉투에 돈을 냅니다. 네, 저는 분명 한국사회 안에선 좌파로 분류가 되는 것이고, 지금 여러분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전 지금 제 세를 불리려고 선동질을 하는 건 아닙니다. 무분별한 규제철폐로 이번 비극이 가능하도록 만든 국회의원들을, 선사가 제대로 안전점검과 훈련을 하는지를 감시하고 제대로 된 임금을 주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할 의무를 방기한 관료조직을, 제대로 된 콘트롤타워 하나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헤매며 희생양을 찾고 있는 정부를, 이윤 때문에 응당 챙겨야 할 안전을 방기한 기업을 감시할 수 있는 단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그게 꼭 저처럼 노동당일 이유도, 손잡고일 이유도 없습니다.
당신이 보수주의자라서 도저히 새누리당이 아닌 당에 애정이 가지 않는다면, 새누리당 당원이 되세요. 당비를 내는 당원이 되시고, 같은 당원들끼리 만나 토론을 해주세요.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더 많은 당원들끼리 목소리를 모아주세요. 당원들의 목소리를 모아 당의 의원들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해주시고, 의원들이 당의 주인인 당원의 뜻을 들을 수 있도록 압력을 넣으세요.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진보적이라 생각하지만 군소정당에 가입할 마음은 도저히 안 드신다면, 원내에 진출한 정당들 –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통합진보당 – 에 당원으로 가입하셔도 좋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비를 내시고, 당원들끼리 만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의원들을 압박하시고, 그들이 제대로 입법을 하는지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세요.
현재 원내 진출한 정당 중엔 당신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없다 생각되신다면, 저처럼 노동당에 가입하셔도 좋고, 녹색당에 가입하셔도 좋습니다. 아직 정당은 아니지만 같은 정치 비전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인 청년좌파 준비위원회도 있습니다. 당에 가입해 당비를 내는 것은, 당의 정책을 연구하고 힘이 필요한 현장에 힘을 보태는 활동가들을 돕는 일입니다.
소속정당을 가지는 일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정파적이라고 생각되신다면 시민단체를 찾아보세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 이미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고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는 시민단체들이 있습니다. 이런 단체에서 하는 행사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사는 게 바빠서 그게 안 된다면 가입해 이름을 올리고, 매달 후원금을 내고, 긴급하게 서명운동을 할 때 서명을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작은 참여를 하시는 겁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분노는 잠시 피해가면 되는 파도에 불과합니다. 작년 말 코레일 KTX 노선 분리 및 민영화 반대 총파업 때 거리로 나오신 분들 많으시죠.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그래서 뭔가 바뀔 거라 믿은 분들 많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총파업은 끝났고, 수십수백억의 손해배상청구와 민주노총 간부들의 체포가 이루어졌고, 이번 사고로 전국이 시끄러운 틈을 타 민영화 저지 법안은 무력화됐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고용노동부 집계 기준 한국의 노조조직률은 2012년 기준 10.3%에 불과합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함께 파업을 해도, 조직되어 이런 상황에 끌어다 쓸 수 있는 노동자는 전체 대비 10.3%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노조 파업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다’라는 프로파간다에 힘이 실리고, ‘이 파업도 강경한 자세로 버티면 곧 끝난다’라는 판단이 먹히는 겁니다.
조직되지 않은 분노는, 금방 흩어지고 무너집니다. 이 분노를 허공에 날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공부하고 뭉치고 조직해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와 같은 곳에서 동지로 만날 수 있길 간절히 희망합니다만, 꼭 저와 같은 곳에서 만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디든 여러분들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가서, 뭉쳐서 거대한 힘이 되세요.
그 안에서 무리에 휩쓸려 가지 말고 무엇이 옳은 길인지 치열하게 토론하세요. 감시하세요. 학습하세요.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고 상대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놓고 의견들을 들으세요. 고민하세요. 그렇게 쓰였을 때야말로, 이 분노는 헛된 분노가 아니게 될 겁니다.
원문: 웹진 다시 / 편집: 리승환
woolrich parkaConfused About Using the Term REAL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