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말도 안 돼. 제가요?”
“말이 안 될 건 또 뭐여? 잘하는 게 ‘요리’라는 게.”
수능이 끝난 그해 겨울날, 용하다는 ‘사주카페’에 있던 친구와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점쟁이 아주머니의 입에서 겨우 나온 대답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리의 ‘ㅇ’ 자는커녕 달걀프라이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고, 라면 물도 못 맞추는 나한테 ‘요리’가 적성이라고 한 거야? 그게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집에 가는 내내 친구에게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르겠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친구가 말했다.
너 먹는 거 되게 좋아하잖아. 못할 건 또 없지.
한편으로는 내가 잘하는 게 얼마나 없으면 요리라고 했을까 싶었다. 친구의 말에 깔깔깔 한바탕 웃으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손으로 무얼 만드는 건 좋아했지만 죄다 입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땐 단지 한자가 싫다는 이유로 이과에 갔고 공대에 진학했다. 선택한 전공이 재밌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 인생에 ‘요리’라는 단어는 영영 없을 것만 같았다. 요리란 그저 엄마가 나를 위해 해주던, 더 솔직히는 어린 마음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그래서 ‘하찮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렇게 사주 한 번으로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고, 그 틈을 타 기어코 스무 살이 되었다. 요리는 내게 여전히 하찮은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오븐의 문을 닫고, 시간과 온도를 맞추고 난 뒤에야 잔뜩 든 긴장이 풀어졌다. 베이킹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탓에 우리 집 주방은 난리가 났다. 하얀 밀가루와 반죽 덩어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오븐을 들여놓은 지 4개월이 지났지만 짐짝에 불과했다. 천성이 덜렁이라 계량과 칼 같은 시간이 생명이라는 베이킹을 직접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간간이 베이킹 클래스를 듣기도 했지만, 이마저 오래전 일이라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스콘 Day-1. 간밤에 꾼 꿈에 내 몸덩이만큼 부푼 스콘이 나왔을 정도로 설렘과 기대, 긴장, 초조, 불안, 흥분 등 만감이 교차한 나의 감정은 마치 스콘 반죽처럼 거칠게 뒤섞여 있었다. 세모로 자른 반죽을 넣고 약 15분을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려봐야 초조해질 뿐이라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는 내내 신경은 온통 오븐으로 향해있었다. 행여나 부풀어 오르는 소리(?)를 놓칠까 최대한 조용히 접시를 닦았다. 물이 뚝뚝 흐르는 고무장갑을 낀 채로 잘 보이지도 않는 오븐 속을 비집고 쳐다봤다. 10분이 지나도 고요한 나의 스콘.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순식간에 고소한 버터 향이 순식간에 번졌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이거구나! 하지만 오븐을 열어보기 전까진 확신해서는 안 된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더 기다리자, 스콘에 딸기잼-콜로티드크림 순으로 얹어 먹을까 아니면 그 반대로? 영국에선 이걸로 논쟁이 붙기도 한다지? 차는 무얼 마시지. 지금은 저녁이라 커피를 마시면 밤잠을 설칠지도 몰라. 홍차도 마찬가지고. 그래! 결정, 레몬그라스 티!
정확히 그 일이 있은 지 14년 후,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누구보다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요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식자재, 즉 먹을거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전공을 살려 2년 동안 관련 일을 했지만, 가치관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한때는 대학원까지 진학(개강 직전에 입학을 포기했다)했을 만큼 전공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죽었다 깨나도 사대강 사업을 눈뜨고 볼 자신이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길로 들어서기까지 나에겐 1년의 시간이 주어졌다(백수였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했던 나는 마치 요리는 하찮은 것이라는 편견을 깨버리듯 달걀을 깨고 프라이를, 스크램블을 그리고 달걀말이를 만들었다. 어느새 내 책장엔 갖가지 요리법을 담은 책과 식자재와 맛을 주제로 한 에세이와 관련 교양서로 채워졌다. 모임에 나가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했다. 환경,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역시나 맛있는 음식으로 끝을 내야만 그날의 모임이 마무리되었다.
모든 건 근간으로부터 즉, 요리는 식자재로부터, 식자재는 땅으로부터 바로 서야 하고 농업은 먹을거리의 근본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래야만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으로부터 느끼는 행복이 조금 더 정교히 완성될 것만 같았다. 이것이 내 ‘요리사(史)’의 시작이다. 물론 내가 한다는 요리는 절대 전문적이지 않다. 나와 남편이 소소한 맛의 행복을 느끼는 정도의 일상적인 가정요리이다. 맛은 그저 그렇다.
땡!
성공과 실패 사이, 이제 확인해볼 차례가 되었다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부풀어 있지 않으면, 빈대떡 마냥 푹 퍼져있으면, 밀가루 반죽처럼 허옇거나 아니면 의도치 않은 머드 스콘이 되어있으면 어떡하지. 만약 실패라면 다시는 오븐 근처에 가지 않을 거야.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으니 절반의 성공을 확신했다. 이게 뭐라고 긴 숨을 들이마시고 오븐을 열었다.
뜨거운 스콘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달걀 물 때문인지 겉은 반질한 갈색으로 변해있고, 옆엔 크랙도 생긴 것이 제법 모양이 난다. 뜨거운 스콘을 접시에 담고 크랙을 따라 스콘을 갈랐다. 고소한 버터 향이 새어 나왔다. 클로티드 크림을 올리고 딸기잼을 얹었다. 적어도 지금 내게 이 순간만큼은 머나먼 영국에서의 논란 따윈 전혀 문제가 아니다. 따끈하고 묵직한 덩어리를 입에 넣었을 때, 고소함과 달콤함이 동시에 전해졌다. 성공. 스스로 대견해 미칠 지경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오롯이 내 입맛에 맞게, 때로는 누군가의 취향을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넣고 빼고, 덜 넣고 더 넣는 이 섬세하고 고귀한 행위를 나는 왜 그토록 하찮게 여겼을까. 이 스콘의 성공은 남편과 엄마, 지인의 취향을 반영해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장의 카드가 생겼다는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좋아하는 재료로, 취향껏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이것이 곧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이킹은 마냥 어려울 거라는 편견을 깬 쾌감도 쏠쏠하다. 조금 더 보태자면 이건 마치 14년이나 묵은 요리의 편견을 깨고 난 기쁨이랄까. 편견은 위대하다. 더 큰 희열을 부풀게 했으니까!
어렵다는 편견은 버려요, 가볍고 담백한 우리밀 스콘
베이킹은 정량이 중요하다는 편견, 근데 이건 편견이 아니라 ‘사실’인 것 같다(덜렁이는 웁니다). 알다시피 스콘은 차와 함께 마시는 영국의 대표적인 디저트다. 베이킹 치고는 요리법이 간단하고 실패할 확률이 낮아서 베이킹을 시작하는 분들께는 최적의 메뉴라고 한다.
나는 우리밀로 만들어 보았다. 우리밀은 중력분으로 글루텐 함량이 적어서 사실 베이킹 재료로 선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땅에서 우리 공기를 마시며 나고 자란 놈이 몸엔 더 낫겠지 싶다. 확실히 시중에 파는 스콘보다는 가볍고 담백한 느낌이다. 설설 잘 부서지지만, 고소하다.
준비물
- 우리밀가루 300g
- 소금 ¼작은술(가염, 무가염 버터 여부에 따라 가감)
- 설탕 2.5큰술(얼마 전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오가닉 흑설탕 from발리, 백설탕이면 2큰술)
- 베이킹파우더 1작은술
- 버터 90g
- 우유 110mL
- (옵션) 레몬즙 1작은술
1. 우리밀가루와 소금, 설탕, 베이킹파우더를 섞고 채로 곱게 걸러줍니다.
2. 큐브 모양으로 조각낸 버터를 넣어 슬슬 비벼줍니다. 이 과정에서는 절대 버터가 녹지 않도록 손이 아닌 스크래퍼를 사용한다는데, 다른 레시피를 보니 손으로 비비적거려도 괜찮다더라고요. 전 그냥 편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3. 버터가 콩알만 해지고, 가루가 촉촉해졌을 때 우유(그리고 레몬즙)를 넣고, 접어주는 느낌으로 조몰락조몰락! 너무 치대면 스콘의 결이 없어진다고 해요.
4. 편평히 펴서 원하는 모양대로 잘라줍니다. 저는 세모!
5. 달걀을 풀어 겉에 살짝!만 발라줍니다.
6. 200도로 예열된 오븐에 넣고, 상태를 봐 가며 200도에서 15–20분.
요리라는 행위가 주는 기쁨
편견을 깨고 도전하자는 고상한 메시지를 담으려는 글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스콘의 성공(?)을 통해 느낀 요리라는 행위가 주는 기쁨이 제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글로 남기고 싶었거든요. 그간 회사 일을 핑계로 많은 걸 미뤄두었습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식자재와 요리, 글을 재료 삼아 저만의 콘텐츠를 모으는 작업을 시작할 거예요. 더 세세히 담도록 할게요!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니 가을이 찾아들었습니다. 그간 땅의 기운을 쫙 빨아들인 뿌리채소가 가장 맛있게 영글 때라고 해요. 우리 땅에서 자란 뿌리채소 많이 드시고 건강한 가을날 보내시길!
원문: 오가닉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