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트렌드 중 하나는 무엇이든 ‘내려놓기’인 듯하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말 것, 노력에 목숨 걸지 말 것, 관계에 집착하지 말 것, 사랑이나 이성에 너무 몰입하지 말 것. 이런 말들이 에세이 시장이라든지 예능이나 연예인의 어록, 공감의 말 등에서 대세를 이룬다. 내려놓기가 하나의 거대한 트렌드이자 위로 산업, 힐링의 문화를 이루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성행하면 성행할수록 과연 우리 삶이 더 나아지는지, 무언가 현실적으로 내려지는지는 의심스럽기도 하다.
한 사회에 고통이 넘쳐나면 날수록 고통을 치료하는 산업들, 우울증약의 판매량, 심리상담 산업, 힐링과 위로의 문화가 성행한다. 그런 개별적인 해결책들은 각 개인을 일시적으로 낫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끝없이 사회 내에서 고통이 생산되는 한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고통의 사회적 총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아무리 훌륭한 의무병과 자원봉사자가 있더라도 사상자는 계속 늘어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내려놓기와 포기를 강조하는 이 모든 현상은 과연 임시방편적인 치료제조차 되는지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 그 모든 말은 사실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방식으로 위로하는 건 아닐까? 과연 내려놓는 게 중요하고 포기가 중요하다고 한들, 그게 가능할까? 이미 포기한 것에 대한 사후적인 위로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끌어안고 견뎌내는 것보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만이 강조되는 일이 과연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들까? 나아가 그렇게 노력하지 않고 포기하는 삶이 실제로 우리 삶에 이로울까?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엄청나게 노력한 사람들이란 점이다. 그들에게는 무언가를 포기하더라도,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일종의 반대급부에서의 처절한 노력과 견딤이 있기 때문에 ‘포기’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책을 쓰는 작가가 되는 과정, 유명 연예인이 되는 일, 셀럽이 되고 발언권이 생기는 과정은 그 자체로 노력과 견뎌냄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그렇게 되었더라도, 그런 입지를 유지하는 데도 엄청난 관계의 기술과 견뎌냄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들은 무언가를 포기해도 된다. 다른 무언가에서 엄청난 성취를 거두었고, 또 노력하기 때문이다.
관계로 스트레스받고 고민하는 사람에게 ‘관계 같은 건 거리를 두고 포기하라.’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속 시원할 수 있다. 그러나 관계란 과연 포기할수록 좋은 것일까? 아니면 관계란, 혹은 삶이란 원래 어려운 것이어서 어떻게든 그 속에서 견디며 배우고 관계를 잘 다룰 수 있을 때까지 부딪히며, 성장해봐야 하는 것일까?
사랑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사랑 같은 거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건 위안이 되는 말이다. 실제로 라이프스타일은 다양할 수 있고, 사랑은 삶의 필수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스스로 그런 걸 알려면, 온갖 어려움을 겪어가며 사랑을 해볼 만큼 해보고, 사랑이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거리를 두고, 포기하고, 내려놓는 일은 당장 위로를 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당장의 위안’은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도록 하는 데, 어떤 셀럽의 말이 순식간에 퍼지도록 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우리 삶은 언제나 복합적인 맥락 속에서, 오랫동안 존재하며, 길게 이어진다.
그 속에서는 당장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지금은 무척 힘들고 괴롭지만 견뎌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의 중요성은 저마다의 삶마다 달라서, 함부로 재단해 하나의 ‘지상 명제’ 아래 복종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내 나름의 관계의 방법과 기술을 익히는 데 적어도 10–20년의 세월이 걸렸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렇게도 관계를 맺어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며 나름 나에게 맞는 관계성이라는 걸 조금 알게 되었다. 또한 삶에서 포기한 것들도 많지만, 악착같이 붙들고서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끌고 가는 것도 있다.
한때는 내려놓고 싶은 많은 게 있었지만, 지금은 내려놓지 않은 것들이 내 삶을 이루고,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낸다. 결국 우리 삶에는 내려놓아야 할 것들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 붙들어야만 하는 것들이 아닌가 하고 자주 생각한다. 적어도 나의 삶의 방식은 그런 편이다.
어떤 종류의 말이, 어떤 지상 명제가, 어떤 사회적 요구나 강령이 대세가 되고 당연한 듯 말해질 때면 늘 그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당연히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만하지 않은 이유, 걸러내야 할 이유도 있을 것이다. ‘포기의 트렌드’ 또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 속에는 우리 삶을 위로해줄 만한 요소들도 있겠지만,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앗아갈 측면들 또한 있을지 모른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