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과 죄책감은 둘 다 ‘잘못했다’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에릭슨의 발달 심리학적 관점에서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치심은 ‘내가 실패했다’ 혹은 ‘내가 실수했다’는 뜻의 잘못이다. 에릭슨의 이론에서 수치심의 반대편에는 자율성이 있다. 즉 수치심은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가장 근원적인 수치심은 우리가 어릴 적 배변훈련 과정에서 생겨난다. 똥오줌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을 때, 내 또래는 모두 기저귀를 떼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거나, 밤중에 잠자리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머리에 뭔가를 뒤집어쓰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금 구걸을 해야 했을 때 느끼던 감정이 바로 근원적인 수치심이다. 우리는 이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자기 조절능력을 배운다. 그 결과 기저귀를 떼고도 오줌 지리는 일 없이 일상생활을 해낼 수 있는 지금의 우리가 된 것이다.
반면에 죄책감은 내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했으며, 잘못된 결과가 내 책임이라는 윤리적인 의미의 잘못이다. 역시 에릭슨의 이론에서 죄책감의 반대편에는 주도성이 있다. 주도성은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을 선택하는 경우에 발휘된다. 그리고 그렇게 주도적인 선택을 한 경우에야 그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생겨난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책임감, 그 결과에 나 이외의 다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는 인식, 그것이 죄책감인 것이다.
죄책감의 원형도 역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변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쳐서 기저귀를 뗀 우리가 이제 자유로운 몸으로 세상을 마음껏 탐색하던 시절, 그 탐색의 과정에서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사고를 치게 된다. 사고를 치면 불쾌한 결과가 따른다. 어머니가 아끼던 화장품 병뚜껑을 전부 열어 한 덩어리로 섞었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을 때, 만지지 말라던 뜨거운 주전자를 건드려 화상을 입었을 때, 가지 말라는 곳에 들어가 다치거나 혼이 났을 때, 우리는 조금씩 잘못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배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느낌을 ‘선을 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우리는 세상이 허용한 선을 넘었을 때 처벌을 받고, 그러면서 죄책감을 배운다. 문제는 그 선이 어디인지를 알려면 결국 넘어가 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선이라는 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내 탐색에 따라 넓어지거나 좁아지는 존재라는 점이다. 성장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자신에게 허용된 영역의 경계선을 조금씩 확장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선을 넘어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결과, 지금 여기까지 온 셈이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기택(송강호) 가족의 특이한 점은, 이들에게서는 죄책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 전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들 기우의 대사는 이 가족 전체의 모토다. 이들의 관점에서 사기를 치는 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사기에서 실수를 하는 건 잘못이다. 그건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의 문제다. 이들은 실수 없이 사기를 쳐서 이익을 취하는 데 성공한다. 성공에 취한 이들은 심지어 몰락한 신분을 회복하고 더 향상시킬 꿈까지 꾼다.
하지만 그 소망은 냉혹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들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냄새다. 아무리 그럴싸한 설정과 능란한 연습으로 다진 연기로 자기 연출을 하더라도 숨길 수 없는 냄새. 거주지 혹은 근거지의 명백한 격차를 드러내는 ‘반지하 냄새’. 기택은 그 냄새를 감지한 박 사장 앞에서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을 느낀다.
이 수치심은 극복이 안 된다. 앞서 설명했듯 에릭슨의 이론에서 수치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율성의 획득이다. 배변훈련을 잘해서, 자기 몸을 통제하고 자기 연출을 더 잘하는 거. 기택네 가족은 이 분야에서 매우 뛰어나다. 가난하지 않은 척, 일류대학(!) 다니는 척, 미술치료 전문가인 척, 가족 아닌 척…
그런데 이 반지하 냄새는 자기 연출로 해결이 안 된다. 이들이 반지하 방을 벗어나지 않는 한, 페브리즈를 아무리 많이 뿌려도 안 될 거다. 노력이나 연습으로 극복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한계인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수치심 앞에서 기택은 좌절한다.
좌절은 폭우로 반지하 집이 잠수 집으로 전락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기택의 가족은 이제 반지하 집조차 잃고 난민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기택이 풍기는 냄새는 박 사장 부인이 드러내놓고 코를 움켜쥐게 할 정도로 심해진다. 당연하다. 이제는 반지하 냄새가 아니라 시궁창 냄새가 날 테니. 안 그래도 뚜렷했던 격차는 이제 더 명백하게 벌어졌다.
난민촌에서 밤을 지새운 그 날 기택은 박 사장네 아이의 급조 생일파티에 동원된다. 격차를 통해 겪는 좌절은 배가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좌절을 하면 분노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분노는 공격성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단 그 공격성은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올라 임계점에 이른 기택의 좌절과 그로 인한 공격성은 결정적인 순간 우연히 그 수치심을 다시 한번 자극한 박 사장에게로 표출되고, 모든 파국에 이른다.
덧
봉준호 감독의 작품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 즉 ‘숙주’였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은 다들 아시듯 ‘Parasite’다. 묘한 대구다.
원문: 싸이코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