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양조장 굴뚝 그림자 안에서 마셔야 한다.
…… 그런데 우리 동네는 양조장이 없는데? 맥주국 독일의 속담은 언제나 나에게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동네마다 혹은 각 집마다 김장하듯 맥주를 빚는 곳이라. 대형 맥주 공장에서 나온 맥주를 처음 접해본 우리와 달리 그들이 맥주를 접하는 느낌은 다르겠지? 나는 입맛을 다신다. 우리는 왜 그런 술 문화가 없을까?
아니다. 우리에게는 막걸리가 있다. 돌이켜보면 작은 면 단위에도 있었던 동네 막걸리야말로 뿌리 깊은 술 문화 중 하나다. 오늘 이야기는 막걸리다. 그동안 맥주와 소주에 자리를 넘겨주었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등의 안주거리가 많거든.
쌀로 술을 빚는 것은 금지! 밀막걸리의 사연
소주와 맥주 이전에 막걸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막 걸러서’ 만들어서, ‘마구 마셔서’ 이름 붙여진 막걸리는 서민들의 대표적인 술이었다. 문제는 한국전쟁 이후는 밥 지을 쌀도 모자랐다는 것. 1963년, 정부는 막걸리를 만들 때 쌀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킨다(이때 소주도 전통 소주에서 희석식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그렇게 나온 것이 ‘밀가루 막걸리’였다. 다만 밀가루로 만드는 막걸리는 술을 띄우기가 쉽지 않아 맛이 제대로 나지 못했다. 혹은 일본식 누룩을 가져와서 술을 제조해야만 했다. 막걸리는 비록 제대로 된 맛을 내지 못했지만, 경제성장과 함께 일꾼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주류 판매량의 75%를 차지했고, 1977년에는 드디어 쌀막걸리가 허용되었다. 막걸리는 그야말로 ‘서민의 술’이었다. 문제는 그 서민들이 값싸고 빨리 취하는 희석식 소주로 술자리를 모두 옮겨버렸다는 거. 그렇게 맥주의 시대가 오고, 다양한 해외 주류가 한국에 들어왔다. 막걸리의 자리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뜻밖의 한류: 막걸리의 르네상스를 열다
2000년대 후반, 막걸리에게 봄이 찾아왔다. 다만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일어났다. ‘청주를 마시던 일본인들이 한국 막걸리의 탁한 부분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업계의 설명이고, 한류의 영향이 더욱 크지 않았나 싶다. ‘욘사마’가 열어놓은 길로 한국의 가수와 배우… 그리고 막걸리가 출동했다.
막걸리(일본에서는 맛코리(マッコリ)라 부른다)의 인기는 일본의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퍼졌다. 이 흐름의 선두주자는 1990년대부터 꾸준히 막걸리를 수출해오던 ‘국순당’. 국순당은 배용준과 함께 ‘욘사마 막걸리’를 내기도 한다. 또한 국내 최초의 막걸리 CF, 막걸리 뮤직비디오(윤종신의 ‘막걸리나’)를 만드는 등 활발히 활동을 한다.
국순당뿐 아니었다. 크고 작은 막걸리 업체가 일본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정부에서도 막걸리를 주요 수출 문화로 지정한다(엔트리가 김치, 떡볶이, 막걸리다). 얼마나 팔렸길래 그 난리냐고? 2008년 국내 막걸리 수출액은 약 400만 달러였다. 그리고 2011년 5,280만 달러를 찍는다. 일본의 주요 히트상품 중에 막걸리가 들어가고 국내에서 늦게 유행을 받아들이는 현상이 생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011년 최고점을 찍은 막걸리는 다음 해 귀신같이 수요가 줄고 만다. 갑자기 냉랭해진 한일 관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막걸리의 품질 문제가 컸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막걸리는 대부분 유통기한이 15일 미만이었다. 수출을 위해서는 발효를 제어하거나 아예 살균해야 했다. 당연히 기존 막걸리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그사이 다른 술로 유행이 바뀌었다.
일본 진출만 바라보고 살던 수많은 막걸리 양조장은 집단 멘붕에 빠진다. 저도주에 상큼한 것을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과일 막걸리도 준비했는데… 설필패. 이래서 설레면 무조건 실패라니까.
혼술을 타고 돌아왔다: 프리미엄 막걸리의 등장
세계화 이전에 대중화였다. 살아남은 막걸리 양조장들은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힘을 쓰기로 했다. 다행히 2010년도 이후에 막걸리의 단맛을 냈던 감미료 ‘아스파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아스파탐은 막걸리의 단맛을 보충해주는 감미료다. 여기에 막걸리를 사용하는 쌀을 수입산에서 국내산으로 바꾼 막걸리가 등장한다. 문제는 비싸다는 것. 반전은 ‘프리미엄 막걸리’란 칭호를 얻었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품질로 승부하는 ‘프리미엄 막걸리’는 2015년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또한 편의점 등의 채널에 재미있는 콘셉트의 막걸리를 내놓으면서 ‘나이 많은 사람이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도 탈피했다. 아메리카노와 막걸리를 섞은 ‘막걸리카노’라거나, 카카오와 섞은 ‘막카오’, 드슈… 마시즘의 마음을 사로잡은 콘셉트의 막걸리가 제법 나왔다.
여러 환경 요인도 막걸리를 돕는다. 이번 주세법 개정에서 맥주와 함께 포함된 막걸리는 이제 재료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부담이 사라졌다(재료 가격이 아닌 양으로 세금을 낸다). 또한 2017년부터 전통주에 속하는 막걸리는 온라인 판매가 되기 때문에 지역의 특산 막걸리들을 다른 지역에서도 받아서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샴페인을 연상시키는 모습인 울산의 ‘복순도가’는 인터넷을 통해 지역에서 전국구로 퍼진 케이스다.
빚는 이들이 있으니 막걸리의 시대는 다시 온다
값싼 술에서 프리미엄 막걸리로, 20–30대가 좋아하는 술로 변하는 막걸리. 하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도 막걸리 양조를 그치지 않았던 양조자들의 의지였다. 막걸리의 가까운 역사를 살펴보면서 나왔던 크고 작은 막걸리 회사들이 그치지 않고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명맥을 이어왔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가 다른 술에 빠져있는 사이에도 막걸리는 멈추지 않았구나.
어려움과 외면 속에서도 꿋꿋이 제 길을 가는 모습 또한 굉장히 우리들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광복절이 오기도 했고,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달콤하고 시원한 동네 막걸리 한 잔이 당기는 날이다.
번외 : 막걸리의 영어 이름은 어떻게 될까?
시간을 돌려 2010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농림수산식품부에서는 막걸리 세계화를 위한 영문 애칭을 공모했다. 놀랍게도(?) 선정된 이름은 ‘드렁큰 라이스(Drunken Rice)’였다. 마블 빌런 같은 이름은 ‘먹으면 취하는 쌀’ 혹은 ‘술 취한 동양인’ 같은 의미가 떠오른다며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와 별도로 외국인에게는 ‘Korea Rice Wine’ 정도로 소개를 하는 게 설명하기 쉬운 표현으로 나타났다. 실제로도 그렇게 많이 쓰기는 하는데… 더 좋은 이름은 없을까? 당시 실제 나왔던 아이디어 후보들을 보며 이름을 생각해보자. 코주(Koju), 코리(Kori), 탁하니(Takani), 술술(Soolsool), 막커리아(Mckorea), 레이니데이와인(Rainydaywine)… 작명의 괴로움을 가득 안고 막걸리나 마시러 가야겠다.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타임라인순으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 쌀막걸리를 허하라, 경향신문, 1977.11.9
- 농수식품부, 막걸리-Drunken Rice 영문 애칭 발표, 오상민, 세정신문, 2010.5.27
- 막걸리 세계화, 차근차근 준비해야, 신승일, 한겨례, 2010.6.4
- 막걸리 열풍 막걸리 대박, 허시명, 신동아, 2010.7.23
- 막걸리 수출 ‘대박’ 올해 5,500만달러 예상, 김광동, 농민신문, 2011.12.16
- 막걸리 시장 벌써 취했나, 조득진, 포브스, 2013.9.23
- 미운 오리새끼 전락한 막걸리, 안현덕, 서울경제, 2013.8.27
- 안주하는 순간 끝이다, 이재훈, 파이낸셜 뉴스, 2014.8.27
- [그 많던 막걸리는 어디로 갔을까] 일본에 들썩 일본에 풀썩, 장민제, 시사위크, 2018.7.11
- [백승대의 술딴지] 막걸리가 왜 그럴까, 백승대, 단디뉴스, 2018.8.20
- 통신판매 날개 단 막걸리… 술술 팔린다, 김보라, 한국경제, 2018.11.18
- 막걸리 부활의 날갯짓, 나원식, 비즈니스워치, 2019.2.26
- 친근한 막걸리, 국내 넘어 다시 한류 날개 달까? 김동열, 소믈리에타임즈, 2019.3.8
- [2019 주류 트렌드] 막걸리 이제 와인처럼 마신다…’프리미엄 막걸리’ 시장 쑥쑥, 김성윤, 조선일보, 2019.3.25
- 다시 온 막걸리 청춘시대, 안효주, 한국경제, 2019.6.19
- 체험관 전문점 열고…2030 손짓하는 막걸리, 이윤화, 이데일리, 2019.6.26
- MB 막걸리 세계화 전략 10년 후, 이지원, 더스쿠프, 2019.8.4
- 말술남녀, 명욱, 박정미, 신혜영, 장희주, 미래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