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망하는 브랜드의 모든 것
안녕하세요. 철학을 전공하다 말고 우연히 마케터가 된 한나입니다. 앞으로 얼마간, 브런치를 통해 망하는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성공해서 성공한 브랜드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러다가는 영원히 글을 쓸 수 없게 될 것 같아서요… (눈물바다) 아직까지 망하는 경험밖에 안 해봤으니 망하는 브랜드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글쓰기라는 슬픈 이야기를 전하며 이 글을 엽니다.
아마 ‘브랜딩! 이렇게 하면 나도 (망)할 수 있다!’를 통해서 저는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브랜드 마케터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라도 이 글을 보신 분들이 저를 보고 ‘우리 브랜드도 망하게 할 참으로 적합한 인재로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거 같거든요. 그럼에도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두 번 다시 망한 브랜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로서는 걱정이 되는 글쓰기이기도 하나, 솔직하게 실패를 인정하고 지나가지 못하면 영원히 실패를 내 안에 은폐하고 살아가게 될 것 같아 용기를 냈습니다. 물론 이 용기가 새로운 인사이트를 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경고장 역할은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저처럼 망해보신 분들에게는 이 글이 일종의 공감이나 위로가 될 수도, 성공만 해보신 분들께는 망함이라는 낯선 세계와의 영접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저와 같이 ‘망하는 건 나도 참 잘하는데’ 하는 분들에게 ‘나만 망한 건 아니구나’하는 작은 위로의 글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제 그만 망해요 : )
저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브랜드가 다채롭게 망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망함이라는 경험 속에서 만난 핵심 메시지는 망함에도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있더라는 겁니다. 힘이 닿는다면 망함의 다채로움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더욱 다채롭게 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총체론적인 비법을 습득하게 되실 겁니다.
혹시 본인이 꼭 망하게 하고 싶은 원수의 브랜드가 있다면 이 비법을 열심히 습득하셔서 그 회사의 일원이 되세요. 빠르면 6개월 안에 그 브랜드는 망합니다. 이 글에서는 최근에 겪은 망함부터 과거의 망함까지의 비법을 요약해서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제가 직접 겪은 경험만을 토대로 하겠습니다.
혹시 정말 브랜드를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이 우연히 이 글을 접하신다면, 이 글을 읽는 시간이 낭비라고 느껴지실 수도 있기에 브랜딩이라는 키워드에 낚이지 마십사 조심스럽게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성공하는 브랜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시간이 남으실 때 심심풀이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절박해서 브랜딩을 공부하시려는 분은 『브랜드 마케터들의 이야기』처럼 성공적인 브랜드 마케팅에 대한 글에서 영감을 받으시기를 권합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마케팅 서적인데 저도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어쩜 이렇게 한 줄 한 줄, 소중하고 부러운 얘기뿐이던지. 이런 글을 내주신 퍼블리와 각 저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여러분에게도 추천합니다.
1편: 망하는 브랜드가 회의하는 법
어느 정도 이 글의 전체적인 방향을 말씀드렸으니 본격적으로 망하는 브랜드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브랜드를 망칠 가장 확실한 방법은 회의를 하는 방식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일의 출발이자 종착지인 회의가 브랜딩을 어떻게 망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는 토론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일을 공유하고, 결정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직장생활 중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멋진 말입니다. ‘브랜딩! 이렇게 하면 나도 (망)할 수 있다!’를 다룰 때 제일 처음으로 공유하고 싶었던 비법이 바로 이겁니다. 브랜드를 꼭! 망하게 하겠다! 하시는 열정 넘치는 분들은 저 명언을 꼭 기억하세요. 망하는 브랜드가 회의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회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혹시 직장 내에서 ‘공유’라는 단어를 ‘구성원들에게 우리 브랜드의 새로운 이슈를 알리고 논의하려는 목적의 발화’라고 해석했다면 오답입니다. 그런 올바른 생각은 브랜드를 망하게 할 수 없으니 주의하세요. 여기서 말하는 ‘공유’는 ‘공지’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공지, 아시죠? notice. ‘오늘의 점심 급식 메뉴 게시판’할 때 그 게시요.
망하는 브랜드에게 회의라는 건요, 멋지게 프로젝터를 켜놓고 모두의 앞에서 급식 메뉴를 읽어주는 것과 같은 그런 행위입니다. 답은 정해져 있고 고개는 끄덕이라는 뜻입니다. 브랜드는 이런 과정에서 모든 질문의 여지와 발전적인 담화의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당합니다.
반대가 없으니 브랜드는 긍정으로만 둘러싸이는 것 같지만, 그런 긍정 속에서 브랜드는 점차 고독해지고 외부로부터 차단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 사장님만 사랑하는 브랜드가 덩그러니 남게 됩니다. 사장님만 우리 제품을 살 거라면 ㅇㅈ. 회의와 토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토론=반역이라는 공식을 세우는 것이 바로 브랜드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기억하세요 🙂
회사에서 토론은 언제 하나요?
저는 저 명언을 최초로 발화하신 망 브랜드의 대가에게 ‘그러면 토론은 언제 하나요?’를 물었다가 회의실 밖으로 끌려나갔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 드리는데 브랜드를 망하게 하실 거라면 절대 질문하지 마세요. 질문이야말로 브랜드의 망함에 있어 죄악입니다. 질문은 ① 시간을 딜레이시키고, ② 상급자에게 스트레스를 줄 뿐 아니라 ③ 브랜드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브랜드를 망하게 하려면 질문은 금물입니다.
질문은 아주 비효율적이죠. 자고로 망하는 브랜드의 비즈니스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의사결정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존립할 수 없습니다. 의사 없이 결정하는 놀라운 혁신(innovation)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잡스도 울고 갈 듯.
이 혁신 덕분에 망하는 브랜드 안에서 일단 모든 이슈는 공지된 뒤 바로 결정됩니다.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공지가 되는 동시에 즉시 결정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다닌 곳은 교육기업이었는데, 우리는 교육 콘텐츠를 다루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신규 강사진에 대해 회의를 해야 했습니다. 망한 브랜드였기 때문에 회의에서 강사진 리스트는 일단 올라오면 무조건 결정됩니다.
메가 트렌드, 소비자? 시장 상황? 브랜드 철학? 제가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런 죄악은 해서는 안 됩니다. 망하고 싶다면 이런 키워드들은 회사 내에선 절대 꺼내지 마세요. 금지어니까요. 저 키워드만 피해도 망하는 브랜드 안에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높은 인사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망하는 브랜드는 지체 없이 결정한다는 걸요. 그래서 놀랍게도 망하는 브랜드는 생각보다 의사결정 시간이 짧습니다. 절대 시간에 대한 능률, 구성원들의 긍정적인 태도가 없는 것만이 브랜드를 망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오히려 무조건 긍정적일수록, 시간을 더 짧게 쓸수록 브랜드는 더 빠르게 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대로 브랜딩을 하려는 분들이라면 효율이라는 말에 대해, 우리 브랜드만의 개념을 정립하고 시작하셔야 합니다. 우리 기업이 추구하려는 방향이 어떤지에 따라 효율이라는 말은 달라져야 합니다. 모든 브랜딩은 우리만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 꼭 명심하세요.
신기한 건 때때로 회의에서 마치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도 중간중간 나타나는 페이크 스킬이 있다는 겁니다. 간혹 공지에 가까운 발제 후에 “여기에 대한 질문 없냐”고 묻는 분들이 계세요. 마치 토론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들은 듣고 싶어 합니다. 망하는 브랜드에서 이런 가면을 쓴 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게 뭘까요? 그건 바로 질문의 형식을 띈 ‘긍정적인 기대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이럴 때에는 ‘지금 발표하신 섭외자 리스트가 좋은데요? 잘 아시는 분들인가요? 우리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그 강사 섭외해볼까요?’ 같은 긍정적인 동의 문구를 내보내 주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문의 의미는 question이 아닙니다.
“질문 없냐”길래 진짜 비판적인 질문을 했는데, 발제자의 표정이 황급히 굳는다던가 “아 좋긴 한데,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그건 돈이 많이 드니까~, 그건 현실적으로~”라는 류의 대답부터 하신다면 두세 번 그 발제자를 의심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 브랜드가 곧 망한다는 걸 미리 캐치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fake skill을 쓰는 망브랜드의 대가들에게 비판도 아닌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회의 시간에 대한 효율은 와장창 무너집니다. 혼나느라 시간을 쓰게 되니까요. 브랜드를 망하게 하는 사람들은 침묵에 발작하기 마련이죠. 그들도 침묵이 비판보다 더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침묵하게 되면 혼나는 시간이 길어져 회의 시간은 무기한 늘어나기만 합니다. 이때 우리는 ‘너넨 왜 이렇게 의욕이 없냐’ ‘애사심이 제일 중요하다’ 등의 명언을 들을 수 있죠. 망하는 브랜드일수록 명언을 들을 기회가 많아집니다. 밥 먹다가도 가르쳐주려는 게 왜 이렇게 많으신지들 🙂
‘답은 정해져 있다’ ‘로봇은 대답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망하는 브랜드가 회의에서 고수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입니다. 로봇이 침묵하면 고장 난 줄 알고 화가 나 두드려 팰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브랜드를 망하게 하고 싶다면 고개를 잘 끄덕이는 로봇에 빙의해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yes’라는 의미의 다양한 대답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ex. 의견 좋은데요, 역시 ○○인데요, 조금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해보겠습니다, 우선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빠르게 진행해봐야죠 등.)
망하는 브랜드가 절대 하지 않는 질문 BEST 5
망하는 브랜드에서 이런 말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될 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우리 소비자가 그 서비스를 원하나요?
-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 가격과 상품의 장점만 보여주지 말고, 브랜드 스토리를 담아내 보면 어떨까요?
- 타사에서 이렇게 한다고 해서, 저희가 무차별적으로 따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질문이 안 되면 의견은 되나요 선생님
질문은 안 되지만 의견은 될 거 같죠? 의견도 안 됩니다. 질문보다 의견은 더 안 됩니다. (★★★) 특히 소비자의 경험을 생각하자던가, 메가 트렌드는 이렇다던가, 하는 얘기는 오답 of 오답입니다. 그런 얘기들은 주로 ‘추상적이다’, ‘역시 철학과를 전공해서 그런지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 같은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이런 귀결의 더욱 발전된 형태로는 ‘너가 CEO냐’ ‘그렇게 깊게 생각할 거면 니가 창업해라’ 등… 집에서 연습해왔나 싶은 발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간혹 박수 보내며 의견을 들어주는 경우가 있지만 기억하세요. 앞에서 말씀드린 페이크 스킬이 도처에 널려있다는 것을요.
그들은… 듣기만 합니다. 또는 박수만 치거나. 그러니 일단 들어주는 경우가 있더라도 방심하지 마세요. 당장 내일 매출로 전환될 의견이 아니었다면 그 박수는 내일 비웃음 또는 외면으로 돌아올 확률이 있습니다.
“내가 동의했니” “내가 언제” “박수가 그런 뜻은 아니었어.”, “좋다고 했지만 니가 더 생각을 해봤어야지, 중요한 건 오늘 매출액이 이렇다는 거야.” “그 의견 좋은데 일단 그건 다음에, 매출 오르고 나서!”
다양한 양태로 외면을 마주하게 될 텐데요. 회의에서 한 얘기는 무시하고 딴소리를 한다던가, 바로 다음 날 마음이 바뀌는 것 역시 망하는 브랜드의 회의법에서 필수 요소입니다. 망하는 브랜드는 그래서 회의록도 그냥 쓰는 겁니다. 망브랜드에서 회의록이란 그냥 고장 난 cctv같은 거죠.
기록은 하지만 기억하지는 않겠다.
…… 들리시나요? 브랜드 망하는 소리가. 이런 식으로 망하는 브랜드 안에서는 목소리를 내는 직원일수록 이상한 사람이 되기 쉽고, 자존감을 마음 밖으로 내놓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회의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회의에서 말했는데 나가면 잊히고… 심지어는 동료들의 눈치까지 봐야 하죠.
여기서 한 가지 더, 망하는 브랜드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을 수 있으셨을 텐데요. 브랜드를 망하게 하고 싶다면, 의견을 말하는 직원이 자존감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겁니다! 자존감이 뭐였더라, 생각하게 될 정도로 그 직원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도록 하세요. 🙂 내가 사람인지 로봇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무아지경의 철학을 득도하게 된 직원과, 망한 브랜드 두 가지를 한 번에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은 아주 중요한 망브랜드의 첫 번째 공통점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각보다 조금 길어졌네요. 혹시라도 제대로 된 브랜드를 만드시려는 분이라면, 회의는 위에 있는 내용과 반대로 해보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또 뵙겠습니다!
원문: 한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