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치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처음부터 중국과 담쌓는 용도는 아니었다. 초기에 미국과 중국은 구상을 함께하기도 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중국이 동참 않기로 하면서부터 미·중 양국은 갈라서게 됐다. 이로써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이라는 4강이 동아시아에 다시금 대치하게 된 상황.
집권 초기부터 문 대통령의 (사실은 김대중-노무현 때부터 이어져 온) 방향은 한반도 주변 4강의 갈등 봉합이었다. 남북을 협력체로 만들어 각국이 한반도 주변 경제로부터 이익을 나눠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경제 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된다면, 이 지역의 평화는 거의 항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각국은 대결이 아니더라도 국력을 소모적으로 쓰지 않고 경제/패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남북 모두 경제적 성장을 가로막는 정치외교적 장애를 없애면서 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으며, 통일로 가는 길의 충격을 서서히 없애는 면역 기간을 가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남북 관계를 주도해 가면서 한국을 강대국 간 외교의 공유 폴더 역할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따라서 우리와는 달리 대결 구도의 반사이익을 챙겨야 하는 아베 정권의 외교 영향력을 배제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이번 일본의 경제 도발의 시원을 작년 10월의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로부터 찾으려 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2년 전인 2017년 5월 출범하며 남북 관련 외교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때부터 일본의 위기감은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그 당시 몇 차례 언급했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부터 이미 예견됐고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혹자는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적 화의에 게을렀기 때문에 공격을 당하게 됐다고 비난한다. 혹은 애초 깜도 안되면서 일본을 무시하다가 큰코다쳤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의 곤란은 실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경제적 번영 그리고 나라의 명운을 위해 한국에겐 현재 이 길밖엔 없었으므로 맞이하게 된 역사의 계단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2년 전 출범과 동시에 동아시아 외교 강자의 길을 선택하고 직진해 왔다. 당연히 일본이 이 상황을 모를 수가 없다. 아베 정권으로선 확실한 시점에 확실한 계기만 필요했을 뿐이다. 안타깝지만 일본이 자국의 번영을 위해 지금 당장 갈급한 심정으로 행동하는 것만큼이나 한국도 지금 시점, 지금의 정부, 지금의 경제력, 지금의 아시아 정세가 아니고선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없다.
오늘 한국 주도의 한반도 정책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당대인인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불안과 공포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금 유예돼서 후손들에게 이체되고 말 것이다. 당대의 외교 갈등은 당대의 사람이 해결 할 수 있을 때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100년 전에 그렇게 못했고 후손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한 나라의 안위는 더 선명한 국력을 바탕으로 더 주도적인 위치에서 또렷한 의사를 피력할 수 있을 때 지켜진다. 문 대통령은 회의 발언을 통해 미·일·중·러에 한반도 주변의 평화를 통한 경제적 미래가 일본의 대결적 외교술보다 더 큰 이익으로 각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한국은 국제 경제 생태계에서 신의를 지키는 길을 걸을 테지만, 일본은 돈만 많을 뿐 신뢰를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국의 신뢰를 문제 삼은 일본에 그 신뢰의 성적표를 고스란히 되돌려 주는 되치기이자, 주변 4강에 보내는 대외 선언, 미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한반도 구상 선언의 재확인이다.
미중의 대결적 양상은 당사자성을 가진 그들끼리 해결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이 그 자리에 새로운 방법을 꾸려 보이겠으니 동참하라고 선언한다. 그것도 국가수반들의 모임 연단에서 쇼하듯 말하는 뜬구름이 아니라, 정확히 당대의 엄혹한 외교 현실이 가지는 위험 앞에서 실제 행동과 함께하는 실천적 선언이다.
거듭 말하지만, 훗날 사람들은 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을 웬만한 성명보다 더 실질적이고 중요한 역사적 선언으로 정의할 날이 올 것이다. 대내적으론 자국민을 향해 스스로를 믿으라는 안타까운 독려가 앞장선 내용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올해는 대외에 과거와는 다른 국가를 선언한 원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