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10km. 평균 일주일에 4–5번. 총 220만 842걸음. 걸었던 거리 1,628.6km. 1년에 평균 약 3,600만 걸음. 휴대전화를 바꾼 지 3년, 그간 휴대전화 속 걷기 앱이 기억하는 지난 3년간 내가 걸었던 기록이다.
걷기의 시작은 단순했다. 엄마가 50대 중반일 무렵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 의사의 말로 수술 전 엄마의 무릎 상태는 80대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30년이나 더 일찍 무릎이 망가져 버린 엄마. 불행 중 다행일까? 수술 후 누워 있는 엄마를 보며 의사는 말했다. 보통의 인공관절 수술을 하는 나이보다 환자분이 젊으니 회복이 빠를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엄마의 무릎 수술 과정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50대면 아직 창창할 나이에 무릎이 일을 하고 결국 다리를 못 쓰는 지경까지 온 엄마. 아직 해야 할 것도, 가야 할 곳도, 봐야 할 것도 많은데…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내가 먹고살기 바빠 엄마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늘 언제나 내 곁에 건강한 모습으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철없는 망나니였다.
어쩌면 엄마가 이른 나이에 무릎 수술을 하게 된 게 다행일 수도 있다. 그때 엄마의 무릎이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만 바쁘고, 나만 잘난 줄 알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를 그리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볼 생각조차 못 한 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지방에 있는 큰언니, 결혼을 해 자신의 가정을 꾸린 작은 언니를 대신해 가까이서 엄마의 재활을 도와야 했다. 병원에서야 전문가 선생님들이 도와주었다. 하지만 퇴원 후에는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의사는 당부했다. 한 발짝 떼는 것도 힘들어하던 엄마의 엉덩이를 밀어 집 근처 중랑천으로 나왔다. 처음엔 10분, 다음엔 30분, 그리고 한 시간. 그렇게 천천히 걷는 시간을 늘려갔다. 인공 관절이 엄마의 무릎에 적응하는 길고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힘들어할 때마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걸어야지. 걸어야 여기저기 놀러 다니지. 아직 해외 가는 비행기 한 번도 못 탔잖아. 이대로 여기서 멈추면 너무 억울하잖아. 잘 걷게 되면 우리 여행 가자!
처음 내게 걸음마를 가르쳐 줬던 엄마. 이젠 다 큰 딸이 엄마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이끌었다. 그렇게 노력한 덕에 몇 년 후 우리는 일본의 온천으로 모녀 여행을 떠나게 됐다. 휠체어나 지팡이 같은 보조기구 없이. 온전한 엄마의 두 발로. 이것이 엄마와 내가 직접 만든 해피엔딩이다.
엄마의 재활 과정을 통해 난 ‘걷기‘라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엄마를 걷게 하겠다는 욕심에 시작한 일이 나중엔 어느새 내 몸에 밴 즐거운 습관이 되었다. 보통 하루에 10km를 달성해야 할 목표로 삼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8시 뉴스가 시작될 무렵 운동화를 신고 중랑천으로 향한다.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휴대전화 속 걷기 앱을 체크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 (10-오늘 걸었던 거리)÷2=★
그 ★의 숫자가 오늘 나의 반환점이다. 평균적으로 출퇴근만으로 3km 내외를 소모하고 남은 7km를 반으로 나눠 3.5km까지 걷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성향의 나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내킬 때, 내가 걷고 싶은 만큼 걷는다. 천천히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중간중간 만나는 길고양이들과 눈인사를 한다.
어떤 때는 뉴스를, 어떤 때는 팟캐스트를, 어떤 때는 음악을, 또 어떤 때는 클래식 라디오를 들으며 걷는다. 걷는 그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사색의 시간이자, 상상의 시간이자, 반성의 시간이다. 그렇게 몇 년을 걷고 나니 나는 참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생각보다 걸을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매일 10km. 일주일에 4–5번이라고 써놨지만 사실 1년 중 제대로 걸을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한여름인 7–8월, 혹한인 1–2월이 빠지면 벌써 365일 중 약 120일이 빠진다. 게다가 비나 눈이 오거나 미세먼지 폭격이 이어지는 날도 걸을 수 없다. 게다가 내 컨디션이나 일, 약속 등으로 빠지는 날까지 빼고 나면 1년에 고작 150–200일가량이 된다. 걷기에 완벽한 날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핑계로 제하고 나면 며칠 안 남는다. 그래서 걸을 수 있는 날은 어떻게 해서든 악착같이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선다.
인생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걷기 완벽한 날처럼, 완벽한 때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걷기를 시작한 후 나는 ‘좀 더 좋은 때’, ‘좀 더 완벽한 때‘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다. ’ 지금‘, 그리고 ’ 오늘‘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걷기’가 가르쳐 준 교훈이다.
목표보다는 원래 계획보다 약간 낮게 잡는다
걷기 앱은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원래는 10km를 목표로 설정해 놨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10km가 나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때가 되면 설정해 놓은 알람이 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오늘 이만큼밖에 안 걸었어. 남은 게 이만큼이야. 얼른 걸어야지.
그 알람이 올 때마다, 숙제 안 한 초등학생의 마음이 됐다. 이게 뭐라고 날 이렇게 쪼는 걸까? 홧김에 목표를 1만 보로 하향 조정했다. 10km를 걸으려면 내 걸음으로 평균 1만 6,000보 정도를 걸어야 한다. 6,000보를 줄인 목표 설정은 꽤나 효과가 좋았다. 평소처럼 10km를 걸으면 목표 초과 달성인 것이다. 만약 10km를 채우지 못하더라도 오늘은 1만 보만 걸어도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나는 늘 높은 목표를 잡았다. 더 좋은 대학이나 회사, 더 높은 직급, 더 화려한 커리어 등등 그런 것들이 날 더 높은 차원의 세상에 데려다줄 거라 믿었다. 어른들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분명 말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가혹하리만큼 채찍질하며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결과는 늘 목표 미달이었다. 부족하고 모자란 내가 늘 불만이었다.
사실 이 결과는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목표를 설정한 결과다. 난 그런 높은 곳에 가면 천성적으로 현기증을 일으키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인간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건 채찍이 아니었다. 작은 칭찬이 날 더 쉽게 움직이게 만든다는 걸 나는 걷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만의 속도를 지킨다
처음, 걷기를 시작할 때는 분명 평범했다. 그런데 나보다 뒤에서 오던 사람이 나를 지나쳐 앞서가는 걸 보는 게 왜인지 ‘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시합도 아닌데 나를 지나쳐 앞서가는 누군가의 뒤통수를 보는 일은 꽤나 씁쓸했다. 한창 경쟁에 내몰리고, 탐욕에 절어 있던 20대 후반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패배감이었다.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점점 걷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제치기 시작했을 때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그 즐거움에 취해 한창때는 걷기를 하는 게 아니라 경보와 뛰기 중간쯤 되는 속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신나게 걷기 반, 뛰기 반을 하며 사람들을 앞서가는데 발목에서 우두둑 뭔가 끊어지는 느낌이 왔다. 뭔가 잘못된 기운이 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서는 무리해서 걸어 발목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발목이 정상 컨디션이 되기까지 내 일상의 작지만 큰 행복, ‘걷기’를 잠정 중단해야 했다.
근질근질한 몸을 다독이며 여러 생각을 했다. 남들이 앞서가건, 굴러가건, 깨춤을 추며 가던 그들의 페이스에 말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나만의 속도를 지켜 가며 봄에는 벚꽃 비를 맞으며 걷고, 가을에는 은행잎 샤워를 하며 걷는 즐거움을 느끼면 되는 거다. 남들의 속도는 남들의 속도고! 나는 내 속도로 가면 된다. 결승점은 하나가 아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집으로, 나는 내 집으로 가는 거니까. 내 목표는 오늘의 반환점을 돌아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걷기가 몸에 밴 후 참 부지런히 걸었다. 평소에는 집 근처 중랑천을. 여행을 가서는 여행지의 걷기 좋은 골목과 길을 찾아 걸었다. 목표치를 덜 채운 날은 내려야 할 정류장보다 2–3 정거장 전에 내려 모자란 분량을 채운다. 덕분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미세하게 변하는 작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세심한 관찰력을 얻게 되었다.
또한 또래의 평균보다 한층 업된 엉덩이를 보유하게 되었다. 탄탄해진 것은 엉덩이나 허벅지, 종아리의 근육만이 아니다. 마음의 근육도 한결 탄탄해졌음을 느낀다. 걷기를 알기 전, 쉽게 무너지고 흔들리던 몸과 마음은 야무지고 굳세 졌다. 이게 다 걷기의 즐거움이 몸과 마음에 스며든 결과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