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 스마트폰에서 가장 많이 실행하는 앱은 ‘로니 라디오(RONY RADIO)’라는 앱입니다. 국내 라디오를 모두 모아서 들을 수 있는 앱으로 기존에 나온 라디오 앱과는 달리 깔끔한 디자인, 편한 UX 때문에 즐겨 이용합니다. 아쉽게도 iOS 버전만 있어서 주변에 아이폰을 가진 지인에게만 조심스럽게 추천하는 앱이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는 라디오 세대는 아닙니다. 10대, 20대 모두 라디오보다는 컴퓨터, 휴대폰과 더 밀접하게 보냈습니다. 라디오는 제 인생에 있어서 정말 생소한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택시나 버스를 탔을 때 듣던 것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개인적으로는 ‘죽어가는 매체’로 생각했습니다. ‘요즘 누가 라디오를 들어?’라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저였죠.
그랬던 제가 요즘은 라디오를 매일 1-2시간씩 듣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출퇴근 환경이 바뀐 탓도 있지만 집에서 심심할 때, 또는 운동을 할 때 이젠 음악보다는 라디오를 듣습니다. 그 덕분인지 요즘 제 아이폰의 시리(siri)는 특정 시간에 ‘로니 라디오’ 앱 사용을 자동으로 제안해줍니다. 일정한 시간대에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앱을 캐치하고 자동으로 앱 사용을 제안해주는 기능인 ‘시리 제안’을 처음으로 경험해본 것이기도 합니다. 그 정도로 요즘 제게 라디오는 ‘최애’ 매체입니다.
콘텐츠 소비의 시작과 끝이 자유로운 콘텐츠
듣는 콘텐츠를 선호하기 시작한 것은 직장인이 되고 나서입니다. 종일 모니터를 응시하는 ‘보는 일’을 하는 직장인으로서 그 외 나머지 시간에는 최대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애용하게 된 콘텐츠가 바로 ‘팟캐스트’입니다.
팟빵, 오디오 클립, 아이튠즈, 모노클 등 국내외 팟캐스트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보는 콘텐츠를 듣는 콘텐츠로 대체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스마트폰 첫 화면에는 ‘AUDIO’라는 폴더가 생겼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팟캐스트 서비스로 자투리 시간을 채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팟캐스트를 듣다가 느끼게 된 불편함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알찬 콘텐츠 소비’를 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탐색’에 시간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즉 콘텐츠 경험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어떤 콘텐츠를 들을지 계속 고민하고 신중하게 콘텐츠를 선택하다 보니 그 탐색의 시간마저 ‘피로감’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팟캐스트의 경우는 제대로 맘 잡고 들어야 하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에피소드의 처음부터 끝까지 완청 해야겠다는 부담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 제대로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에서 들어야겠다는 강압감, 듣다가 만 콘텐츠를 보면 남은 부분도 꼭 들어야겠다는 중압감 비슷한 것들을 느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된 ‘라디오’는 팟캐스트보다 훨씬 캐주얼한 콘텐츠였습니다. 라디오는 기본적으로 팟캐스트보다 ‘라이브’ 성격이 강합니다. 24시간에 가까운 편성표로 운영되다 보니 제가 어느 시간에 들어가든지 들을 콘텐츠가 있습니다. 앱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고민 없이 바로 터치해서 콘텐츠 소비(라디오)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죠. 들으면 바로 노래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DJ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습니다. 물론 광고가 흐를 때도 있고요.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부터 바로 들을 수 있는 환경, ‘그만 들어야겠다’ 생각이 들 때 고민 없이 바로 멈출 수 있는 환경이 라디오의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콘텐츠의 시작과 끝에 그 어떤 부담감도 없자 더 많은 소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팟캐스트 애청자에서 라디오 애청자가 되어갔습니다.
라디오에서 배우는 콘텐츠 창작자의 자세
라디오를 들으면서 콘텐츠 창작자의 자세에 대해 배우는 것도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라디오는 DJ뿐 아니라 게스트, 작가, PD 등 여러 ‘창작자 크루’가 함께 모여 만든 ‘고퀄리티 오디오 콘텐츠’입니다. 그리고 다른 콘텐츠와는 달리 ‘라이브’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공간, 정해진 위치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더 돋보입니다.
라디오 프로그램 자체는 고유의 ‘규칙성’을 가집니다. 편성표를 토대로 온에어 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거의 예외 없이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죠. 이로 인해 청취자는 예측 가능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10시에도 그 라디오 프로그램이 하겠구나’, ‘DJ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과 같이 말이죠.
규칙성과 예측 가능성은 고정된 청취자를 만들고 더 나아가 팬(fan)을 만듭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다 보면 그 프로그램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진 다양한 팬을 만날 수 있습니다. ‘팬’을 가지는 창작자의 기본자세를 이렇게 배웁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규칙성은 ‘성실성’을 전제로 합니다. 이 세상에 성실하지 않은 직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라디오 DJ의 성실함은 ‘라이브’로 인해 더 주목받습니다. 녹음 방송보다 라이브 방송의 비중이 훨씬 더 높다 보니 라디오 DJ는 연중무휴 정해진 위치에서 약속된 시간에 청취자와 만납니다.
DJ가 성실하지 않고서는 결코 라디오 프로그램이 운영될 수 없습니다. DJ와 함께 뛰는 게스트, 작가, PD의 성실함도 함께 더해집니다. 여러 사람의 ‘성실’이 만드는 프로그램이기에 더 아껴 듣는 것도 없지 않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배우는 콘텐츠 창작자의 마지막 자세는 바로 ‘기획력’입니다. 오디오는 오로지 ‘목소리’와 ‘소리’로만 구성되는 콘텐츠입니다. 영상과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매우 제한적이죠. 그런 매체적 제한에도 라디오 프로그램은 매번 변화를 시도합니다.
새로운 코너를 기획하기도 하고 전화 연결, 인터뷰, 노래방, 추리극, 퀴즈, 콩트, 음악 라이브 공연 등을 통해 색다른 오디오 콘텐츠를 선보입니다. 오로지 소리와 목소리로만 전달할 수 있는 한계에도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위해 여러 사람의 기획력이 응집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획력의 부족을 단순히 매체적 한계로만 둘러댔던 과거의 여러 경험에 대해 깊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청취자와 만나는 ‘규칙성’, 이를 통한 청취자의 ‘예측 가능성’, 정해진 시간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DJ의 ‘성실함’, 오디오라는 제한된 포맷에서 어떻게든 돋보이기 위한 코너 ‘기획력’을 라디오에서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콘텐츠 창작을 하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라디오 신청 곡이 가지는 의미
라디오를 들을 때 빠질 수 없는 재미는 바로 ‘좋은 노래의 발견’입니다. 요즘 제 플레이리스트는 모두 라디오에서 발견한 노래입니다. ‘로니라디오’ 앱 기능으로 선곡표도 함께 제공되다 보니 흘러나오는 좋은 노래를 모두 수집합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왜 뮤직 서비스의 인공지능 추천과 달리 라디오에서 더 좋은 노래를 발견하는 것일까였습니다.
멜론, 애플뮤직, 유튜브 뮤직 등의 뮤직 서비스는 자체적인 알고리즘을 통해 사용자의 노래 취향에 맞는 노래를 자동으로 추천해줍니다. 이 중에서 저의 취향을 저격한 노래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추천 서비스는 없었습니다. 추천곡을 듣다 보면 이런 곡을 왜 추천해줬지 싶은 것들이 생겨났고 그렇게 하나씩 다음 곡, 다음 곡을 누르다 보면 그냥 내가 직접 찾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디오는 AI 추천과 달리 여전히 ‘사람 손’을 탑니다. DJ가 직접 노래를 선곡하기도 하고 제작진에 의해 플레이리스트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청취자의 ‘신청 곡’입니다. 사연과 함께 듣고 싶은 신청 곡을 보내면 DJ가 택해서 사연을 읽고 신청 곡을 틀어주는 거죠. 이 신청 곡이 바로 취향저격이 될 때가 많은데요.
누군가의 신청 곡이 노래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신청 곡이 개개인의 ‘1위 곡’이기 때문입니다. 신청 곡은 분명 한 사람이 들어본 수많은 노래 중 가장 아끼는 노래일 확률이 크고, 그렇다면 각자의 최애곡이 모여 재생되는 곳이 바로 라디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디오는 개인의 플레이 리스트 1위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최고의 뮤직 큐레이션 콘텐츠가 아닐까요?
마치며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가 내거는 비즈니스 원칙 중 하나는 바로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비즈니스’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도 의미 있지만 지금까지 오랜 시간 지켜졌던,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비즈니스에 집중했을 때 승률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라디오가 마치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랜 시간 대중 곁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그런 존재. 그리고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갖는 매체와 콘텐츠에서는 ‘지속 가능성’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라디오를 즐겨 들으면서 콘텐츠 창작자의 기본자세를 찾아보고 좋은 노래를 발견해 나가는 재미를 꾸준히 느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생각노트 Radio’라는 이름으로 직접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팟캐스트가 아닌, 정해진 시간에 ‘라이브’로 만나는 진짜 ‘라디오 프로그램’ 같은 것을 말이죠.
원문: 생각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