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형산업’이라는 말이 있다. ‘강신주 현상’에 대한 비판에 사용된 용어인데, 또한 자기계발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 혹은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잘 표현하는 말이다. ‘자기계발’로 분류되는 책은 여전히 잘 팔린다. 하지만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책 좀 읽는다는 사람에게 자기계발서는 장사를 위해 찍어내는 정신적 마약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한국에 자기계발이 알려진 건 스티븐 코비의 ‘일곱 가지 습관’의 역할이 클 거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더 나은 자신을 원하던 사람들을 위해 한권 두권 자기계발서가 소개 되었다. 그러다 이 시장은 IMF를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맞게 된다.
경쟁이야 항상 있었지만, 경제위기 이후 무한 경쟁이 새로운 표준이 되었고, 사람들 마음에 자기계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여겨지게 된다. 사람들은 조급한 마음을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달래고, 성공을 다짐했다.
자기계발서가 비판받는 3가지 이유
그런데 왜 지금 자기계발서는 비판을 받고 있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쓰레기가 많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에는 여러 종류의 책이 포함된다. 리더십, 시간관리, 성품개발, 인간관계, 재테크, 목표관리 등. 그 모든 책이 ‘몸과 지식의 치열한 소통으로 생긴 지혜가 300페이지로 쓰여진’ 것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아니다.
그중 대표적인 쓰레기인 ‘시크릿’이 200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책이란 사실은 차라리 코미디다. ‘시크릿’ 뿐 아니라 수많은 책이 별로 새롭지 않은 내용을 마켓팅만 달리하며 쏟아냈다. 일년에 열권 넘게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 하는 자칭 ‘천재작가’도 생겼으니 뭔 말을 하겠나.
이런 쓰레기가 자기계발이란 포장하에 아직도 잘 팔리는 건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도 있다. 한국 사람들 평균 독서량이 한달에 0.8권이란다. 그것도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초중고 학생들을 포함한 수치다. 그러니 성인남자들은 얼마나 읽겠나. 일년에 한두권 읽다보니 쓰레기를 구별해내는 능력도 떨어질 수 밖에 없고, 팍팍한 현실에 성공의 비결이 있다고 하면 모두 달려드는 거다. 돈 벌기에 목매는 출판사는 거기에 호응하고.
둘째,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는 가슴이 뛰고 자신이 생긴다. 어느 부분에서 부족했었는지 알 것 같고, 가르침을 따라하면 뭔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따라 해본다. 하지만 며칠 후에는 그대로다. 또 다른 책을 만나면 부푼 마음으로 ‘그래 새로운 내가 되는거야’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실망한다.
이런 과정을 몇번 반복하다보면 두가지 결론을 맺게 된다. ‘나는 안돼’ 혹은 ‘자기계발서 다 그게 그거야.’ 보통은 두가지 다 온다. 많은 자기계발서의 내용이 거기서 거기인 것도 사실이고, 자기계발서로 포장된 많은 불쏘시개들이 이런 현상을 부채질했다.
셋째,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자기계발서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개인’이 노력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나은 인생을 살아야하기에, 그렇지 못한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거다. 실패한 이들을 동정할 이유는 없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의 논점을 극한적으로 따라 가면 그렇게 적용된다. 자본의 논리는 이런 자기계발서의 편향된 가르침을 증폭시켜왔고, 국가와 회사는 그렇게 자신의 손을 씼어댔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다들 한번쯤 일 못하는 동료가 승진 못하는게 당연한거고, 최소한 나는 저들과는 다르기에 같은 대접을 받는 건 불합리라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특징이고 자기계발서라고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흐름을 선도해야 잘 팔린다. ‘남과 다르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숨어있는 욕망을 건드려주는 책에 끌리는 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효율성이 올라가서 적은 인원으로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평균 수명도 올라가서 나이 들어도 일할 힘은 있다. 자본의 편만 드는 정권에게 중소기업은 찬 밥이다. 그러니 새로 사회에 들어서는 청년들에겐 자리가 없고, 일찍 회사를 떠난 가장은 오랜 시간 가족 부양에 허덕인다. 이런 상황이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도 개인의 책임만 강조하는 자기계발서가 달갑지 않은 거다.
중요한 것은 훌륭한 삶을 이루는 것
이런 이유로 ‘자기계발서’는 비판받고 비난받고 있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사람은 그저 성공에 목말라하는 인문학적 교양이 없는 이로 치부되고, 스스로 참된 ‘지식인’이라 여기는 많은 이들은 앞다투어 이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왜 모든 답이 ‘OR’가 되어야 할까? ‘AND’가 될 수는 없을까?
자기계발은 ‘잘’살기 위한 여정이다. ‘잘’산다는 것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고 (꼰대스럽게 말한다면)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 훌륭하게 사는 것은 이룰 수 없는 목표다. 날마다 내 안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성찰하며,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루어야 하지만, 이룰 수는 없는, 그럼에도 이루려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표다. 지향점이나 동인은 다르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도 같은 과정으로 본다.
세상이 지랄 같아져 ‘잘’산다 하면 곧 부와 성공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자기계발서에서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계발이란 개인의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듭 말해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계발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최소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원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지금 처한 상황이 내 잘못이든 불의한 사회의 책임이든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자기계발이다.
스티븐 코비의 일곱가지 습관은 ‘주도적이 되라’로 시작한다. 주도적이 되는 것은 나에게 영향을 주는 영역인 ‘관심의 원’ 대신에 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향력의 원’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노력을 기울이자는 거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잊어버리라 해석될 수 있다. 눈 앞에 보이는 일, 가족, 돈, 공부 이런 일에 집중하고, 정치나 국가 경제, 멀리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영향력 밖이므로 신경쓰지 말라고 이해될 수 있다. 같은 선에서 , 사회나 국가가 아니고, 개인이 자기계발의 의무를 가지고 책임을 져야한다. 노력하지 않아 실패하는 이는 동정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말한 자기계발이 비판 받는 이유이다.
맞는 말이다. 영향력의 원과 관심의 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시각으로 본다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또 그렇게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혹은(OR)’의 문제로 바라봐야하나? ‘그리고(AND)’의 시각으로 바라볼 순 없나?
짐 콜린스는 그의 책 에서 ‘그리고의 천재 (Genius of the And)’라는 말을 소개했다. 위대한 기업들은 핵심 분야를 공고히 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열광하는 조직을 만들면서도 고객만족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한쪽의 시각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컨텍스트는 다르지만, 같은 시각을 여기에도 적용하고 싶다. 자기계발에 대한 비판은 사회대 개인의 대립구조의 시각을 가질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청년실업이 왜 개인의 문제냐, 국가와 기성세대의 책임이지 이런 식이다. 물론 청년실업은 국가와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은 가만히 있을건가? 국가가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개선할 책임이 있다면, 개인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계발할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각자 처한바에 따라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의 시각이 필요한 이유다. 사회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고 개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
‘관심의 원’과 ‘영향력의 원’이 고정되어 있는 개념도 아니다. 지금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도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통해 ‘영향력의 원’에 들어오게 할 수 있다. 오랫동안의 기자 경력을 바탕으로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을 보호하는 단체에서 활약할 수도 있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사회적 불의를 없애기 위해 정치에 나설 수도 있다. ‘배워서 남 주고’ 싶어할 수 있는 거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는 것. 단점을 알고 극복함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지경에 이르는 것. 사회구조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며 자신을 성장시켜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그런 자기계발이 신자유주의의 지배도구라 할 수 있을까. 개인의 부와 성공이 목적이 아닌, 내가 성장함으로 주위와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삶이 훌륭한 삶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누구에게나 자기계발은 필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는다. 도덕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알고 있을 당연한 이야기를 사서 읽어야 하는가 하는 거다. 자기계발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할 이유인가? 당연히 아니다.
성숙해지기 위한 교훈은 어디서든 얻을 수 있다. 굳이 자기계발서를 통해서만 얻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예를 들어, 습관에 대해 이해하고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고칠 방법에 대해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자신의 강점을 몇십년동안 쌓여진 통계 자료를 기반으로 상당한 정확도로 진단해줄 수 있다면.
마흔이 넘어선 늦은 나이에 멋진 새 인생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소개하며, 희망과 동시에 구체적 방향을 제시해 준다면. 이런 내용을 닮고 있는 책이 있다면 편의상 자기계발서로 분류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자기계발서냐 아니냐를 떠나 훌륭한 삶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이다. 이건 자기계발서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옥과 석은 있게 마련이다.
필요한 건 도움이 되는 ‘착한 자기계발서’와 사이비 혹은 새로울 것 없이 돈벌기만 위한 ‘나쁜 자기계발서’를 구별해내는 것이다.
원문: Futuresh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