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은전 한 닢’에서 한 거지가 묘사된다. 그는 ‘그저 은전 한 닢이 갖고 싶어’ 여섯 달 동안 구걸을 해가며 동전을 모으고, 동전을 각전으로 바꾸고, 각전으로 은전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검사받고 싶어 한다. 의심하는 행인에게 거지는 말한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연봉 2000만원이 적은가요?” 20대에 1억 모은 짠돌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위 소설이 다시 떠올랐다. 이 청년을 거지라 보는 건 아니다. 14년 이상 봉사활동도 했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다. 다만 그가 돈을 모은 과정은 성공담보다 비극에 가깝다. 그의 인생역정은 아래와 같다.
청년은 지방대를 갔다. 부모님이 학자금을 대줄 형편이 아니니 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대입 후, 필사적으로 돈을 모아 입대 전에 200만 원을 모았다. 군대에서 푼돈을 모아 다시 100만 원을 모았다. 제대 후 주독야경을 해서 졸업 때까지 3,500만 원을 모았다.
그는 자신의 초인적인 노력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가며 구직활동을 했다. 연봉 1,800만 원짜리 회사에 들어갔으며 거의 모든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31세인 최근까지도 이런저런 알바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회사채에 투자한다. 회사채는 안전해서 선호한다고 한다. 수익율은 연 8%다. 아침마다 20분씩 경제뉴스를 읽는다. 최근에는 ‘짠돌이 근성’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한다.
스펙 상승의 기회 없이 돈을 모은다는 희생
근검절약하고, 근성 넘치고, 집요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포부를 품는 청년. 아마도 이것이 기자가 노린 반응이었을 것이다. 한국 저널리즘의 수준을 생각하면 당연한 예측이다. 하지만 이 흐름은 어떻게 빈곤이 고착화되고 계층이 고착화되는지, 그걸 돌파하기가 왜 어려운지를 한 청년의 20세부터 31세까지의 흐름으로 보여줄 뿐이다.
우선 그는 명문대를 들어가지 못했기에, 1차적으로 ‘과외’라는 대학생이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벌이가 상당부분 봉쇄되었다. 동시에 그는 학자금 대출을 받았기에 원금과 이자 상환의 압박이 생겼다. 이자도 갚고 자금을 모아야 하니 돈을 번다. 군대에서 100만원을 모을 정도면, 아마 부대 안에서도 베풀 여력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대 후에도 그는 일을 한다. 남들은 제대 이후 ‘공부’에 집중하는데, 그는 일을 한다.
여기서 분기점이 또 하나 생긴다. 평범한 대학생은 제대 이후 학업과 경력 형성에 집중한다. 안정적이고 처우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알고 있으며, 그동안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학자금, 최소한 용돈 정도는 지원 받는다. 또 인턴이나 공모전이라는 형태로 자금과 경력을 동시에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기에 낮에만 공부하고 밤에는 공부하지 못한다. 결국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미래 소득을 높이기 위한 인적 자본에는 투자하지 못한다.
이런 학창 시절의 약점은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과 맞물려 극대화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온갖 아르바이트와 잡다한 활동경력을 모은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해 구직활동에서 어필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구직 담당자들의 관심사는 학벌, 영어, 자격증 등 스펙이다. 스펙과 경험을 요구하는 ‘남들이 선호하는’ 직장에 그가 들어갈 곳은 없다. 그래서 그는 1800만원짜리 직장을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돈은 아끼면 그만? 저숙련 노동의 불투명한 미래
그는 2,000만 원이 박봉이 아님을 주장하며 자신이 돈 쓰는 방법을 얘기한다. 식사와 커피는 회사에서 해결한다. 교통비는 2,000원이다. 옷도, 머리도 대충 관리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친척 집에 얹혀’ 산다. 이것은 단순히 큰 지출을 요구하는 주거비의 면제가 아니다. 교통비가 2,000원인데 만약 친척이 집 한 켠을 내주지 않았다면 그가 이 직장을 2,000원을 내고 다닐 수 있었겠는가?
그는 돈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30세가 된 시점에도 ‘최근에는 주로 대학교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실험실 아르바이트, 좌담회, 대학원 논문 수정을 한다’고 했다. 이 청년은 지금 대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이다.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직장인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직무 역량을 높이고 자신의 기량을 연마하면서 대규모 조직사회에서 일을 배우는 시기다. 이 시기에 그는 20대와 전혀 다르지 않게, 자신의 휴식 시간을 저임금 알바로 쓰며 자신의 통장 잔고를 더 높이고 있다.
그렇게 해서 1억 원을 갖고 있다. 그는 현재 31살이다. 대기업 계열사라지만 지금도 2,000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 것을 볼 때 배타적인 직무 역량이나 기술 능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주된 직장도 저임금이며 투잡, 쓰리잡도 저임금이다. 그가 한 알바의 종류는 많지만 그것은 ‘인생 경험’이라는 하찮은 글자로 이력서 글자를 채울 때나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지 가치를 인정하고 연봉을 많이 줄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결국 그가 ’30대가 되면서 좋은 자리가 사라진다’고 표현하듯 그의 역량은 일반적인 20대 대학생이 노력하는 것처럼 ‘고소득 화이트칼라 사무직’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전문적인 기술을 보유해 경력만 높으면 임금을 자연스럽게 높일 수 있는 흐름을 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20세에도 잡부였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그의 페이는 ‘알바로 월급보다 더 번 적이 있을 정도로’ 올라가지 않았으며, 본격적으로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독립해 독립된 경제적 개체가 되길 요구받으며 결혼과 2세라는 사회적인 노동력 재생산의 압력이 생기는 30대에 들어섰는데도 그의 소득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심지어 그는 이런 생활이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 하다.
1억과 맞바꾼 11년의 가치
돌이켜 보면 그의 11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소모되었는가? ‘1억’을 위해 소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 1억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직장인에게 1억은 ‘여윳돈’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그는 11년째 단순노무자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믿을 건 이 1억밖에 없다.
이 11년은 고작 통장 1억과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 따위가 아니라 향후 20년에 걸쳐 최소한 10억을 좌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가 얻은 것은 자기만족과 1억 원이며, 20세의 청년일 때도 31세의 청년일 때도 비숙련 노동자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현대 경제에서 필요한 노동자로서의 경쟁력이 없다. 블루워커로도, 화이트워커로도.
그런데 이 1억으로 장사를 하고 싶어도 1억은 매우 영세한 장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그와 그 주변의 경제적 입지는 그가 1억을 기반으로 제도권의 돈을 끌어들어 고소득을 노리고 더 큰 장사판을 벌려볼 만한 시도 자체를 봉쇄한다. 신용이 없고, 경쟁에서 살아남을 만한 어느 정도 유형화된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청년이 이것으로 뭔가 창업을 한다면 그 정체는 뻔하지 않은가? 좀 창의적인 치킨집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회사채’에 투자했다고 한다. 회사채가 안전하다고 말하며 가장 이율이 높은 것에 투자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이율은 리스크에 반비례한다. 한국에 연 8%의 이윤을 ‘안전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금융자산 같은 건 없다. 그는 투자에 실패한 이유를 주식과 펀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연 8%의 회사채가 주식이나 펀드에 비해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청년의 경제와 금융에 대한 식견의 수준 역시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 세대의 자화상
이 청년은 뭔가 베풀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하고, 지금까지의 성실한 삶을 볼 때 그 생각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베풀 수 있을 때까지 그가 넘어야 할 벽은 많아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 청년은 11년을 바쳐 1억을 벌었고, 통장의 1억 원 외에는 아무것도 번 것이 없다. 친척을 희생시켜 주거비를 절감했다. 조금이라도 현 상태에서 연애와 결혼, 2세와 같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요구받는 일에 눈을 돌리면 기실 그 1억은 큰 돈이 아니다.
한 사회에서 사회적 노동력의 재생산은 이렇게 궁지에 몰려 있다. 이 청년의 현실은 11년 간 똑같았으며, 이 청년은 그 현실을 극복할 어떤 디딤돌도 없었다. 11년의 가치가 1억이었다는 계산서만이 그의 인생에 놓여 있다. 이것은 삶의 자세같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다. 이 사회에서 한국인은 출산율을 깎고 사회적 재생산을 없애고 있다.
원문: 잉간 블로그 /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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