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손이 발발 떨리더니 결국 냄비 손잡이를 놓쳐버렸다. ‘골로 갈 뻔’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달달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 마법의 가루(?)를 털어 넣었다. 효과가 진짜 있는 건지, 아니면 이게 그 유명한 플라시보 효과인지 알 바 없었다. 살았으니까. 암 스틸 얼라이브!
“선생님, 저 진짜 죽을 것 같아요. 그냥 포기할까 봐요. 너무 힘들어요.”
“그동안 그렇게 굶어본 적 없구나. 첫날만 버티면 돼요. 먹어야 할 양 반드시 챙겨 먹고요. 조금만 더 견뎌봐요.”
마법의 가루의 정체는 대나무 통에 아홉 번이나 구웠다는, 그래서 각종 유기미네랄이 들었다는 ‘구죽염’이다. 단식 강의에 따르면 이 마법의 가루는 나의 균형 즉, 몸의 전해질 균형을 맞춰주는 목숨줄과 같다고 했다. 고로 단식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다.
작년 이맘때, 쉽게 피곤해지고 컨디션 회복이 좀처럼 되지 않는다는 내게 한 지인이 단식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었다. 당시 나의 상태는 잦은 술자리와 외식으로 살이 불어서 그런지 기력이 없었고 몸이 아주 무거운 느낌이었다. 단식? 맨 처음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쐐기를 박으려고(단식은 절대 할 것이 못 된다는 후기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단식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센터에 전화를 거는 놀라운 나를 발견했다.
칼을 대지 않는 수술이라니, 온갖 약을 쓰고 몸에 좋은 건 다 먹어봐도 소용없던 병이 나았다느니, 살이 쪽 빠져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느니. 이런 단식 뽕에 취한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아주 충실히 반응하는 나였다(으응?). 그렇게 작년 이맘때쯤에 5일 단식+5일 보식 프로젝트에 성공했다. 진짜 죽을힘을 다해서 열흘을 보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1년 후, 나는 결국 센터에 전화하여 이번 달 단식 명단에 내 이름 석 자를 올렸다. 맞다. 단식은 정말 중독이다.
그냥 평소에 술 좀 덜 먹고, 채소 많이 먹고, 과식 안 하고, 운동 적당히 하고 응? 그러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유난이야. 그러다 몸 더 상한다!
그걸 몰라서 안 하나요. 단식하는 5일 내내 육성으로 듣고, 눈빛으로 받아냈다. 여기에 일일이 대응할 힘과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그냥 실실 쪼개고 말았다. 그러다 단식 5일을 마치고 보식으로 접어드는 일주일째는 날 보는 사람마다 혈색이 좋아졌다고 했다. 야윈 것 같다고도 했다(사실 이 말이 제일 좋았다). 실실 신이 났다.
실제로 내가 느끼기에도 피부가 보들보들해지고, 낯빛이 환해졌다. 체중이 약 3kg 정도 줄었다(찌는 건 금방인데). 아침마다 무거워서 곤욕을 치르던 몸뚱이가 가벼워졌다. 기력이 달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었다.
단식하면 먹을 일이 없어서(?) 여유로울 거라 생각하겠지만, 절대 네버 에버 아니다. 단식원에 가면 모를까 나처럼 9 to 6의 직장인한테는 결코 만만한 스케줄이 아니다. 단식하는 내내 나는 마치 뺑뺑이 학원은 도는 아이처럼 꽉 채운 하루를 보냈다.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먹어야 할 양을 체크하여 먹어야 때를 적절히 안배해야 한다. 회의할 때조차 알람을 맞춰놓고 무언가를 챙겨 먹어야 했다. 하루에 약 4L의 물(효소와 감잎차 포함)을 마셔야 하고, 된장차 혹은 미소차로 부족한 염분과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마법의 가루, 하루 2.5~3g의 죽염을 먹기 전후 15분 동안은 액체류를 먹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도 시간을 쪼개고 보면 꽤 까다롭다.
이뿐이랴, 매일 목욕탕에 가서 냉탕지옥과 온탕천국을 번갈아 가며 몸을 수축이완해 혈액 순환에 집중하고 노폐물 배출을 돕는 ‘냉온욕(冷溫浴)’을 해주어야 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피부가 호흡할 수 있도록 발가벗고 침대에 누워 바람으로 목욕하는 일명 ‘풍욕(風浴)’도 해야 한다. 작년엔가 ‘미우새’에서 윤정수와 박수홍이 단식원에 찾아가 엄동설한에 옷을 벗고 쇼를 했던 그 풍욕이 맞다.
사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주변의 반응은 ‘그래, 뭐 한 번쯤은 해볼 만하다’는 표정으로 당장 내일부터 도전해볼 기세다. 그러다 이다음 한 가지, 저얼대 빼놓지 말아야 할 이걸 이야기하는 순간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건 바로 관장. 대장내시경 할 때 하는 그 관장이 맞다. 다른 점은 대장내시경을 위한 관장은 마셔서 해결(?)하는 것이고, 이건 장에다 직접 관장액을 주입하고 비우는 것(?)이다. 30여 년 만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관장기라는 것을 받아 들었을 때,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이 기괴하게 생긴 고무 덩어리, 이건 대체…….
단식의 주요 목적이 그간 쌓인 독소를 배출하고, 깨끗하게 비우는 것을 감안하면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혹시나 잠복해있을 기생충이 자랄 틈(?)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구충제를 먹기도 하는데, 이는 장 속에 있는 좋은 균과 나쁜 균을 동시에 박멸하므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센터에서는 권하지 않는 방법이다.
여하튼 이 짓을 다시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 이것만 생각하면 다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작년에 겪은 그 열흘이 내게 가져다준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단식 이후 변화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단식이 준 몇 가지 변화
1. 몸이 가벼워진다.
최소의 영양소만 공급하고 비우기만 해대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몸무게가 줄어서 기력이 달릴 것만 같은데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처음에는 온몸의 기관이 예민해지고 쭈뼛 서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뭔가 몸의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내 필력으론 한계다. 몸이 평온해진다고 해야 하나. 진짜 한계다. 인정!
2. 평소 나를 괴롭히던 잔병이 완화된다.
당시에 잦은 술자리와 외식으로 역류성 식도염과 간혹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렸다. 하루 이틀은 이 두 가지가 더 극에 달하는 느낌이라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관장기를⋯). 그러다 한 3일째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두 증상이 완화되었다. 없어졌던 것 같기도 했다.
단식을 추천해준 지인(무려 30일 단식을 한 분)은 예전에 접질렸던 발목이 갑자기 아려오더니 괜찮아졌다고 했다. 이후로 비 올 때마다 쑤시던 증상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몸에 좋다는 거 하면 귀신같이 알고 어김없이 찾아오신다는 그 명현(瞑眩) 반응이 맞는 것 같다.
3. 모든 게 귀해진다.
‘이게 다 먹고살기 위해’하는 짓이라며, 생각 없이 욱여넣던 그 많은 음식물 앞에 내가 놓치는 건 없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의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물론 생각이 안 난 것도 아니다). 약 7년 전에 1년 동안 비건(vegan) 채식을 경험한 적이 있던 터라, 사실 미루고 미룬 생각들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현재는 돼지, 소 등 붉은 고기를 제외한 가금류, 유제품, 해산물을 먹는 폴로 베지테리언(pollo-vegetarian)…이라고 쓰기도 참 민망한 그냥 ‘프로 편식러’쯤 된다).
인간은 본래 잡식동물이라 채식이 어렵다 쳐도 기왕 살생(殺生)하는 거, 버리는 것 없이 더 귀하게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무슨 가슴살, 날개, 안창살, 허벅지살 등을 찾는 우리의 까탈스러움이 만연한 밥상이 과연 당연한지 의문도 들었다. 쌀을 씻다가 톡톡 튀는 쌀 한 알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급기야 이렇게 어렵지 않게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4. 식습관의 개선과 변화가 (반강제로) 가능해진다.
사실 이거는 쓸까 말까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이어졌다면, 아마 첫 번째로 무슨 미담처럼 썼을 얘기다. 고작 열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기간 동안 비워내기만 했으니 내 안의 장기가 흡사 막 태어난 아기의 상태와도 같아졌다고 한다. 위도 줄 만큼 줄어서 평소처럼 빨리, 많이 먹다가는 체하기 일쑤였다.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조금씩 먹기 시작했고 그동안 비워낸 것이 아까워서 가려먹게 되었다. 그토록 맥주를 좋아하는 나지만, 단식 이후 한두 달 동안은 평소보다 횟수가 줄었다. 참고로 나는 맥주 반주를 매우 좋아한다. 살도 빠졌다. 오히려 단식 이후 추가로 2kg가 빠졌다. 신이 났다. 단식에 대한 책을 읽으며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아침 식사도 과감히 폐지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지속된 건 6개월까지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지하는 한 가지는 너무 많이 채웠다 싶을 때는 비운다는 것. 몸이 무겁고 지쳤다 싶을 때는 하루 단식을 한다. 이제 비움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적당한 비움이 몸에도 좋다고 한다.
5. 자신감 충전.
나는 자기절제가 매우매우 서툰 편이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사고싶은 것도 원하는 걸 제때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이다. 스스로도 약점으로 자기절제를 꼽을 정도다. 그런 내가 무려 2주에 가까운 기간 동안 가장 좋아하는 모든 것(밥, 맥주, 커피)을 끊어냈다니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 중이다.
자연스럽게 살이 빠지면서 안 맞던 원피스까지 꺼내 입었다. 거울 속 내 얼굴이 빤지르르하니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너무 갔…). 내가 가장 취약하다 생각한 부분을 보완했다 생각하니 뭐든 못할 건 없다는 자신감이 붙은 거다.
과거엔 영양 결핍으로부터 병이 왔다면,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과잉이 병을 만든다고 한다. 본래 몸은 예민한 조직이다. 피부에 있는 땀구멍 하나하나가 숨을 쉴 정도라니 보통 설계가 아닌 모양이다. 넘치고 흔하다 보니 무뎌지고 무감각해졌을 뿐이다.
하나뿐인 내 몸뚱아리, 하나뿐인 지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소중하다. 그 누굴 위해서가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내 몸과 감각을 위해 참아내면 보이는 것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어째 글이 이미 성공한 후기가 되어버렸는데, 사실 오늘까지가 감식 기간이었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단식에 들어간다. 이 글은 작년 경험을 되짚으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의 의지를 불태우려는 글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시작 전이라 선비 같은 말을 줄줄이 읊었다. 곧 죽네사네마네 하는 글이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글이 오르지 않으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끝까지 선비인 척하려는 심산이거나, 아니면 소리 소문 없이 포기했다는 역사 속 사연이 되었거나. 오늘은 유난히 넘치는 식탁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꼬르륵…)
※ 주의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단식을 위한 세세한 준비와 주의 사항은 빼먹은 것이 많아요. 단식을 통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혹시나 단식을 생각하신다면 충분히 검색 및 공부해보시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쓴 것 말고도 다양한 방법이 있더라고요. 맛있는 이야기로 만나요!
원문: 오가닉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