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칸투칸 8F에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
개복치의 등장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언급했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개복치는 ‘유약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2014년 8월, 한국수자원공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유리멘탈 물고기 개복치의 사망원인’이라는 게시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당시 기록된 14가지 사망원인은 다음과 같다.
- 아침햇살이 너무 강력해서 사망.
- 바닷속 공기 방울이 눈에 들어가서 스트레스로 사망.
- 바닷속 염분이 피부에 스며들어 쇼크로 사망.
- 앞에 다가오는 바다 거북이와 부딪칠 것을 예감하고 스트레스로 사망.
- 근처에 있던 동료가 사망한 것에 쇼크를 받아 사망.
- 근처에 있던 동료가 사망한 것에 쇼크를 받아 사망한 것을 목격하고 스트레스로 사망.
- 물 위로 점프했다가 수면에 부딪혀 아픔의 스트레스로 사망.
- 민첩한 선회를 하지 못하여 헤엄치다가 바위에 부딪혀 사망.
- 너무 바다 아래로 내려가서 추워서 사망.
- 수면 근처에서 일광욕하다가 갈매기한테 쪼여서 사망.
- 자고 있다가 파도에 휩쓸려 육지로 떠밀려 사망.
- 물고기 뼈가 목구멍에 걸려서 사망.
-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 못해서 사망.
- 새우나 게 등의 갑각류를 먹고 내장에 찔려서 사망.
사실 사망원인이 겨우 14가지뿐이라면 꽤 생존력이 강한 듯싶다가도, 그 내역을 살펴보면 역시 개복치는 개복치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약간의 농담이 섞인 걸 감안하더라도 사망 원인으로 보기엔 너무한 것들도 있다. 몸길이 4m, 몸무게 1t 이상이라는 거대한 외관과 전혀 다른 생명력 때문이었을까. 개복치는 ‘쉽게 죽는다’는 이유만으로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했다.
게임 방법이 단순하지만 수시로 죽어대는 개복치를 케어하는 ‘살아남아라! 개복치’라는 모바일 게임이 유행했고, 소심하거나 쉽게 상처받는 이들은 ‘유리멘탈’이라는 별명에 더해서 ‘개복치’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고 나서 살펴보니, 우리 주변엔 사람 모양을 한 개복치가 꽤 많았다.
내 주변 개복치들
내 주변에도 개복치가 몇몇 있다. 당장 내 여자친구도 개복치인데,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 있거나 직장에서 깜빡하고 잊은 일이 있으면 바로 신체적인 반응이 온다. 입술이 부르트거나 입천장이 내려앉거나 편도가 퉁퉁 붓는다. 마음만 먹으면 10초 안에 잠들어서 10시간 넘게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인데도, 마음이 괴로우면 수시로 악몽을 꾼다.
살면서 겪는 문제들이란 대부분 때가 되어야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리 괴로워하지 말라고,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해줘도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개복치들은 그걸 몰라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니까.
또 친한 친구인 J도 대단한 개복치다. 그녀는 대기업 물류 회사에서 근무 중인데, 같은 업계에서 업무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입사 초기부터 회식도 잦고, 야근도 잦았다. 업무시간이 종료되면 사내 컴퓨터 전원이 꺼지는 강제 업무 종료 제도는 개복치인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지. 컴퓨터가 꺼졌는걸.’ 하면서 제도를 명분 삼아 자신의 무능이나 나태를 합리화할 법도 한데, 그녀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독이었다. 정해진 기한 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상태로는 퇴근해도 내내 마음이 괴로우니까. 결국 퇴근 후에도 어떻게든 업무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마는 것이다.
내 여자친구와 J는 연애에 있어서도 비슷한 개복치다. 둘 다 꽤 오랜 연애를 해왔고, 향후 1년 이내에 결혼을 계획 중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마음이 허물어지곤 한다. 한 번은 두 커플이 다 같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개복치 둘은 섭섭함을 토로하고 사람 둘은 (일단) 미안하다며 수습하기에 바빴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그간의 경력으로 봤을 때, 나는 ‘살아남아라! 개복치’ 게임의 베테랑이 아닐까. 11년째 개복치와 연애 중이니까.
반전 있는 개복치의 태도
그런데 그런 개복치들이, 의외로 대단한 면이 많다. 내 여자친구는 수년째 대학교에서 근무 중인데 하필 소속된 학과가 신생 학과라 업무 매뉴얼이 뒤죽박죽이다. 원년 멤버로서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토대 위에 지금의 체계를 잡아 온 셈이다. 그 과정에서 타 학과나 본부와의 의견 대립도 많았고, 대부분은 양보해야 했지만 종종 강력하게 의견을 관철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학생들 또한 아는 것이 없으니 자연스레 교수님이나 교직원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강했는데, 여자친구는 유능하고 든든한 선생님이자 친근한 누나처럼 제 역할을 해냈다. 매번 집에서 앓는 소리만 하던 개복치가 현장에선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지 놀라울 따름.
J는 소위 ‘빡센’ 물류 회사에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능력을 인정받은 케이스다. 한때 일이 너무 힘들어 퇴사 의사를 밝히기도 했는데, 윗선에서 “여성 임원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한 인재인데, 떠나지 말아라. 원한다면 거주지 근처로 근무지도 옮겨주겠다.”라고 붙잡았을 정도. 덕분에 그녀는 동기는 물론이고, 역대 어느 여성 직원보다 빠른 진급으로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과장직을 앞두고 있다. 누가 들어도 사소한 일 하나에 손까지 벌벌 떨며 죽는시늉을 하던 J는 또 어떻게 그런 위치에 오른 걸까.
두 개복치의 공통점은 역시나 유리멘탈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일을 철두철미하게 마무리하기도 한다는 것. ‘만족할 만한 수준’의 정도가 나 같은 곰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라면 ‘대충 이 정도면 됐지, 뭐.’ 하는 수준이 개복치인 그들에게는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어. 어떡하지.’ 수준인 것이다.
입천장이 내려앉고, 며칠 내내 악몽을 꾸면서 그 개복치들이 했던 건 그저 불평불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걱정하는 만큼 노력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만큼 마음에 들 때까지 매달렸다. 어떤 결과를 맞닥뜨리면 쉽게 상처받을 것을 다 알기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 과정을 더 부단히 살아내는 것. 다시 말해, 스스로가 개복치인 것을 아는 개복치들이었던 셈이다.
여자친구와 J가 모두 월급을 받는 직장인인 반면, 나는 이름만 프리한 프리랜서다. (항상 받는 월급보다 더 노력하는 그들이지만) 어쨌든 월급은 대충 일해도 따박따박 나오고, 나는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구조다. 아까 여자친구와 J가 톡을 주고받다가 내 이야기도 있다고 해서 나도 내용을 보게 됐다.
나한테는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고 응원해주고, 자기네들끼리는 “오늘도 대충하는 하루 보내자!”라며 끝인사를 나눴다. 세상에서 가장 ‘대충할 줄 모르는’ 개복치 둘이서, 대충했다가 금방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는 개복치 둘이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 생색내면서 실상 대충할 때가 더 많은 프리랜서와, 대충 살자고 노래를 부르면서 매번 최선을 다하는 개복치 둘. 저마다의 장단이 있겠지만 요즘은 개복치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야 뭐, 아무리 걱정을 하고 최선을 다해도 입천장이 내려앉을 일은 없으니까. 설렁설렁해도 괜찮은 일도 있지만, 남의 돈 받고 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
개복치의 학명은 ‘Mola mola’라고 한다. 한글로 하면 ‘몰라 몰라’. ‘아 모르겠고 대충하자.’는 뜻과도 잘 어울리지만 그 뜻은 ‘맷돌’이다. 단단한 피부와 커다란 몸집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어쩌면 ‘사람 개복치’의 태도와 참 잘 어울리는 학명이 아닌가. “몰라, 몰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든든하게 제 몫을 다 해내는 개복치의 태도 말이다.
원문: 김경빈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