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다들 회사에서 쓰시는 컴퓨터에는 MS 오피스가 설치되어 있으실 겁니다. 이중 가장 많이 쓰시는 프로그램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네요. 아래아한글? 아니면 워드? 또는 엑셀이려나요. 그러나 분명 몇몇 분들은 파워포인트인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은 제 회사생활의 많은 부분에 큰 영향을 끼쳤던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파워포인트. MS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만든 바로 그 프로그램입니다. (깊은 한숨) 학생 때 컴퓨터 좀 했었던 저였지만 회사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이 있는데요.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라고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보고서를 쓰는 선배들이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런 용도로 쓰일 것을 예견했었을까요. 했다면 나쁜 사람입니다.
제가 입사했던 대기업에서는
당시 한창 이런저런 컨설팅을 받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수많은 글로벌 컨설팅사가 보고서를 찍어냈습니다. 그중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M사와 A사의 PPT 양식은 회사 내에 대유행 중이었습니다.
컨설팅사의 장표들은 정말 근사합니다. 보고 있으면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장표마다 가득한 표와 그림들은 어찌 그리 멋있는지, 또 여러 도형을 조합해서 만들어내는 희한한 그림들은 일종의 예술 같았습니다. 파워포인트에서 저런 도형과 표가 나올 수 있다는 데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컨설턴트가 작업하는 걸 옆에서 보신 적 있나요? 단축키를 써가며 현란하게 장표를 찍어내는(정말 찍어냅니다) 모습을 보면 프로게이머 같습니다. 어린 제게는 그런 게 엄청나게 멋있어 보였습니다. 존경스럽달까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장표를 잘 만들면 물론 좋은 일입니다만, 제 경우는 너무 어릴 때 여기에 몰입한 게 문제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겉멋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HDD 한구석에 컨설팅 보고서들을 하나둘씩 모았습니다. 이 보고서 중에 멋있고 근사한 도형이나 표가 있으면 다시 잘 모아두었죠. 보고서를 쓸 일이 있을 때마다 멋진 장표를 가져다가 붙여넣었습니다. 오와 열을 맞추고 그럴듯한 말들을 헤드라인에 넣으면 (뭔가 컨설팅 보고서 같은)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어릴 때 저는 이게 일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큰 착각이었죠.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보고서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간결하고 빠르게 전달하는 게 목적입니다. 디자인의 우수성을 겨루는 장이 결코 아닙니다. 주니어 때의 제가 배워야 했던 건 예쁘고 멋진 장표 디자인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빠르고 간결히 그걸 전달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죠. 그렇지 못한 데에는 파워포인트라는 툴 자체의 속성 탓이 컸습니다.
워드나 아래아한글과 달리 파워포인트는 일종의 캔버스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발표자료를 보여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보고서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똑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디자인, 색감 등에서 차이가 나면 큰 격차처럼 보인 것이죠. 한편으로는 부족한 내용이더라도 디자인을 잘하면 ‘있어 보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겉멋이 잔뜩 든 주니어 길진세의 앞날은 어두웠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게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제 결재 라인에 계시던 분들은 내용은 뜬구름이더라도 컨설턴트 장표를 가져다 버무린 제 장표를 좋아하셨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이분들도 내용을 안 보셨던 것 같습니다…). 몇 번 이렇게 안타를 치니 우쭐해졌죠. 대단한 보고서도 아닌, 팀 회의용 사업 아이템이나 임원 주간보고 정도를 이렇게 만들면서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러다 지표면으로 추락한 건, 절정 고수들의 TF에 차출되면서였습니다. 당시 K사는 무선인터넷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사내의 전략가들을 모아 TF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있던 본부에서 이를 주관한 터라 저도 운이 좋게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주니어다 보니 간단한 앞뒤 소개 장표라든가 파트별로 과·차장님들이 작성한 자료를 수합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했는데요.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백 장의 PPT 보고서가 디자인이 아니라 글자로 말했습니다. 이미지는 투박하고 단순했지만 알아보기 쉬웠고, 꼭 필요한 자리에서 필요한 말을 했습니다. 도형, 글자 모두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모든 게 겉멋만 잔뜩 든 저와는 달랐습니다. 보면 설득이 되는 경험은 참 신기했습니다.
6개월 정도 운영되었던 그 TF에 있는 동안 저는 PPT를 어떻게 만드는지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합니다. 고수 선배들 사이에 있다 보니, 진짜 잘해보고 싶었습니다. 처음 제가 만든 장표를 보며 표정이 굳어지시는 것을 보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거든요.
그때 제가 배운 것은 ‘PPT는 (용과 호랑이가 뛰노는) 디자인이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논리 전개 방식과 간결한 메시지, 영리한 구성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글로 읽으면 ‘뭐야 당연한 소리 아니야’ 싶으시겠지만 PPT는 디자인의 마력이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기란 참 어려웠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하며
저는 그렇게도 원하던 PPT의 고수가 되었을까요? 아니요. 어떤 경험을 하며 한 번 더 크게 변했는데요. 시간이 꽤 흐른 후 다른 회사와 다른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젝트의 팀장님은 그야말로 PPT 성애자, PPT 덕후, 인생이 PPT…라고 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스마트’와 ‘PPT 사랑’과 ‘농업적 근면성’. 말만 들어도 무서운 3종 세트를 갖추신 분이셨죠. 이 3가지가 힘을 합하면, 회사가 집이 되는 마법이 일어납니다.
당시 저는 제가 속한 회사와 모 그룹의 M&A 프로젝트에 막 투입되었던 때였습니다. 상대방과 몇 차례 미팅 이후, 사업 방향과 아이템에 대해 양사가 1일 워크숍을 갑작스레 하게 되었습니다. 논의 사항은 명확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게 있어, 너희는 이런 게 있지. 그러니 우리 이런 걸 해 볼까?’라는 자리였죠.
워크숍을 한다는 것을 듣고 제발 팀장님이 안 그러시길 바랬습니다. 네, 슬픈 예감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워크숍 전날, 팀장님은 전체 어젠다를 PPT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팀원들이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만류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희 팀원 전부는 한 땀 한 땀 장표를 치기 시작합니다. 팀장님과 한 장 한 장 그리다 보니 어느덧 동이 터 왔습니다. 팀 전체는 다음날 Full day 워크숍인데 밤을 새운 것이죠.
사무실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저희가 만든 수십 장의 PPT가 화면에서 영롱하게 빛났습니다. 피곤했지만 뿌듯함이 느껴졌습니다. 하여간 뭔가 밤을 새워서 만들었으니 해냈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죠. 그 후로도 이 팀장님과 많은 밤을 새웠지만 이날이 유독 기억나는 이유는 그날 아침에 워크숍 장소에 가서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저희는 힘들지만 뿌듯함을 느끼며 회의실에 들어섰습니다. 이어서 밤을 새우신 팀장님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상대 회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발표를 지켜보았습니다.
이야… 짧은 시간 동안에 이렇게 만들어오셔서 발표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신데요. 이러면 저희가 너무 비교되는데… 하하.
이어서 상대 회사가 발표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을 때, 저희 팀은 깜짝 놀랐습니다. 발표 자료는 평범한 워드였습니다. 대단한 양식도, 화려한 이미지도 들어가지 않은 폰트 ‘신명조’의 고풍스러운 워드.
발표를 워드로 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내용 때문에 다시 놀랐습니다. 아주 필요할 때 아니면 이미지도 쓰지 않고 표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강조할 부분에 대해 Bold를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치장도 없었습니다. 발표 내용 안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정말 잘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저희 자료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내용은 뜬구름이었던 반면, 상대 회사는 자신들의 업무 내용을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주제를 논했습니다.
물론 갑자기 저희 또는 상대측의 임원이 갑자기 참석했다면 저희 PPT는 훨씬 큰 의미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열심히 한 것처럼 보이니까요. 저희 팀장님도 거기까지 내다보고 하셨던 밤샘 작업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실무 밑바닥에 있던 제게는 그날의 워크숍은 상당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작업하는 실무자의 모습이 마음속에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파워포인트를 쓰지 않고 워드로 작업을 하게 되면 아이템과 내용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날 워크숍은 말씀드렸듯 Full day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자 저희 팀원들은 하나둘씩 졸린 눈을 비비기 바빴고, 그날 저녁 회식까지 이어지면서 야근+밤샘+소주 그야말로 철인 3종 경기에 임해야 했습니다. 상대방 회사에 저희의 PPT 저력을 보여주었을지 모르나 그 외에는 무엇을 얻었던 건지 지금도 알쏭달쏭한 기억입니다.
요약정리
쓰다 보니 긴 글이 되어버렸네요. 제 의견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능한 PPT를 쓰지 않는 게 최고다.
쓰지 말라고 하니 워드 뒤에 괜히 Appendix 한 다발을 만든다거나… PPT로 만들어서 워드에 그림으로 붙인다거나 하지 마시고요. PPT는 오로지 발표할 때만 씁시다 제발(물론 공허한 외침인 것을 잘 압니다).
2. 꼭 보고서로서 써야 한다면 일단 내용에 집중하고 예술혼은 최소화하라.
개떡 같아도 사안을 쉽게 설명하는 보고서가 훨씬 좋은 겁니다. 불타는 예술혼은 퇴근 후 집에 가서 피겨라도 만들며 달래줍시다.
3. 보고서 작업이 진도가 안 나간다면 콘텐츠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자문해보자.
보고서에 하고 싶은 말이 다 머릿속에 있다면 진도가 안 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건 일기든, 브런치든 인간의 모든 저작물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장표 도형을 고민하기 전에 여기 쓰고자 하는 말이 뭔지 생각해 봅시다.
아마 오늘도 무수히 많은 직장인이 PPT 화면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화공(畫工)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 무수히 많은 A4지가 이면지로 희생되겠지요. 우리 장표는 오늘도 푸르게 푸르게 되지만 대체 이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지 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월급쟁이 화공들 파이팅입니다. 🙂